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윌리엄 케네디는 말햇다.

 

- 나는 부랑자나 깡패의 생활 내부에 숨겨져 있는 인간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 인물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갈 때 비로소 극한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구석진 곳에 무엇이고 번득이고 있는지를 발견하기 시작하지요. 그게 바로 작가가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적인 것, 인생의 신비로운 요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작가의 삶 속에는 신비로운 것이 너무나 많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 더욱 그 화려한 존재를 드러내지요.

 

 때때로 나는 이러한 사람을 비난한다. 도대체 극한에 가서야만 진심어린 인간성을 볼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애매하다. 그리고 꼭 그렇게까지 만들어야 했나, 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물론 문학이기에, 그러한 설정을 거리낌없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분명 밑바닥에서 헤엄치며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그럴 수 있으나 개개의 사정으로 인해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체가 못마땅한 것이다. 왜 인간을 있는 그대로에서 보지 않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자신의 내면에 대해, 스스로도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꼭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 또한 내 개인의 성향이며, 나의 신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니, 이만 접도록 하자. 서로의 모든 것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물론 이견은 존재하며, 언제나 그 이견 또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허나 과연 나 스스로 그러한 바탕에 가정을 세우지 않고서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 진솔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확실히 답할 수 없다. 죽음과 삶, 폭력과 평화라던가 살인과 전쟁, 오해와 비극이라던가 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 어떤 위대한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은 눈을 통해 들어온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암만 많이 보고 싶어도 이 세상을 너무 많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우니까.

 

 이 책의 주인공, 프랜시스는 분명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나, 그 삶 속에도 웃음과 기쁨은 존재한다. 그 아이러니가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며, 동시에 인간 근원의 내면인지도 모른다. 부자와 거지가 공존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이 시대의 존재가 바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윌리엄 케네디는 바로 그러한 점에 착안해 이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이라,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랜시스는 몇몇 살인 끝에 지금의 자신에 대해 애석하기도 하지만,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치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22년의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그 속에서도 분명 웃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이면에 죽음이 있듯이 비극 이면에 희극이 존재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원제 : 억새풀)>에서는 그 삶의 이면과 운명을 숭고한 의미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극한에서의 삶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으나, 분명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느꼈다.

 

 역자 장영희는 이 책에서 희망을 느꼈다고 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은 타인이 보기에 보잘 것 없고 역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은 은하수가 어딘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빈 위스키병과 달이 만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희망 아닌가.

 

- 프랜시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 달과 병이 만들어 내는 음악 소리에 다시 귀 기울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더이상 거기 누워 있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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