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의 아나키즘
노암 촘스키 지음, 이정아 옮김 / 해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만큼 편견에 휩쌓여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 사상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정부는 통치기구 전체, 혹은 내각만을 가르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실행하며, 그것을 어길 경우 처벌을 가하는 기구이다. 이러한 정부가 없는 상태, 즉 무정부주의가 뜻하는 의미가 잘못 전달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촘스키의 말처럼, 오판된 이유가 권력의 어두움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으나, 단어 그 자체에서 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무정부주의, 즉 정부가 없는 상태, 그러니까 질서와 규칙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책의 3장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에서 질문자 또한 그렇게 묻는다.

 

- 내년 1월 1일에 지금까지 있던 정부가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 즉 경찰도 없고 도로교통법이나 그 어떤 법률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금 징수원이나 우체국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 분명 경찰이 없다는 말은 맞을 겁니다. 그러나 도로교통법까지 없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무정부주의란 문자 그대로 정부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 상부가 아닌 하부에서 발생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일터와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조직과 관리의 두가지 양식에 대해서 논한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망과 이보다 상위 조직으로 공장이나 각 산업 지부 혹은 수공업까지 전체 산업을 대표하는 대표단 그리고 더 나아가 지역단위와 전국단위 그리고 국제적으로 조직된 노동자평의회 총회이다. 그리하여, 지역별로 연합된 형태로서 연맹과 같은 형태를 갖춘 전국적인 차원 이상의 관리체제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이즈음하여 무지한 독자는 골머리를 앓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불가해한 것이다. 무정부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설명과는 달리, 아예 무지한 나로서는 어렵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상의 설명은 분명한 견해를 제시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명할 때가 잦았다. 이 책의 전체를 들어 보았을 때, 그는 대충의 이론적 성격과 느낌만을 제시하고, 그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라 칭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얼핏 이해할 수는 있으나, 의문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무정부를 외치면서, 정당이 출현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고도 말한다. 국가를 이용해 무정부주의의 핵심인 자유를 더욱 평등하게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무정부주의가 단시일내에 실현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사안으로 생각하고 차차 무정부주의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 듯 하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성선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할 수 있다. 워드와 마찬가지로 촘스키도 인간의 기본적인 선함과 고귀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높이 산다. 또한 그것만이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큰 무기라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정확하게 옳고 그름을 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 즉 전제 자체가 무리인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선설(性善說)이나 성악설(性惡說),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모두가 진실 혹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설이기 때문이다.

 

- 견실한 무정부주의자라면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와 이런 개인 체제를 지탱하는 임금 노예제를 반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노동이 자율적으로 생산자의 관리 하에 수행되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견실한 무정부주의자라면 소외된 노동뿐만 아니라 자칫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노동의 전문화라는 말에도 반대해야 한다. 노동의 전문화는 생산수단의 거듭된 발전으로 말미아아 노동자를 단편적인 존재로 격하시켜 단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러한 견해를 소개하며 이 폐해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한 가지 특징으로 간주했으나, 사회주의 또한 그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터이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생산조직에 반대한다고 하였으나, 결국 또 다른 특권층을 만들어 그들에게 그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율적인 생산자들의 자율적인 연합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 치켜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제적인 착취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노예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의아해진다.

 

 특히 공감했던 부분 중 하나는 'Devil take the hindmost 체제' 라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통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과연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라는 철학적 의문이 든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생각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들어 맞으리라. 듀이는 인본주의적 생각이란, 생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조건에서 서로 협력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물론 생산도구가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강압적인 체제 하에서 평등을 찾기란 근본적으로 힘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야망에 눈이 멀어 기를 쓰며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

 

 촘스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분명 18세기나 19세기, 혹은 그 이전과도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닥 변한 것이 없다. 변한 세상에서 변한 것은 물질이지 정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분명 이러한 근본적 문제는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단편적인 지식으로 그러한 것을 논의하거나, 비판을 가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허나, 미국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처럼 '혼자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다고 하여 자유의지적 사회주의, 혹은 실용적 무정부주의 등 그 많은 사상에 대해 정통한 것이 아니기에 옳은 대안인지에 대한 의견을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말처럼 평등과 자유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라는 것, 노예 상태에 놓여져 억압받고 탄압받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차차 구체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 본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 첫 발걸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