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표본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책속의 <표본실>. 문득 이런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뒤로 제쳐둔다.

 

 사이다 공장에서 일하던 여자는 약지의 살점을 일부분 잃고나서 더이상 그 곳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사이다를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하늘하늘 움직이는 살점을 본 후로, 상처의 아픔은 지워졌으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벗어나 도회지로 나온 여자는 표본실에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오래된 아파트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데시마루는 정체모를 무언가가 있다. 여자는 제 용도를 상실한 욕실에서 데시마루와 은밀한 정사를 벌이며, 점점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사랑으로 이름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상대가 주려고 하지 않으면, 청할 수 없는 그것. 과연 그것이 사랑인가는 알듯 모를듯 답답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다.

 

 게다가 데시마루가 선물한 구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조 할아버지가 그 구두를 신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구둣방에 찾아 갔을 때, 할아버지는 벗으려면 지금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없다. 구두에, 그리고 데시마루에 종속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자유가 없는 사랑일지라도.

 

- 자유롭게 되고 싶지 않아요. 이 구두를 신은 채 표본실에서 그 사람에게 봉인되어 있고 싶어요. (110쪽)

 

 여자는 마침내 약지를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표본 제작실의 문을 두드린다. 그에게 영원히, 봉인되고 싶었던 것일까.

 

- 데시마루씨는 나의 표본을 소중히 여겨 줄까. 때때로 시험관을 손에 들고, 떠도는 약지를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껏 그의 시선을 받는 것이다. 보존액 속에서 내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아마도 한층 더 맑으리라. (114쪽)

 

 섬뜩하기 짝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물론 사랑이리라. 사랑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진실된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으니까. 나에게 묻는다. 나라면, 구두를 벗었을까. 여자가 구두를 벗지 않고, 영원히 그의 표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려고 했을까.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짜릿한 사랑도, 얽매이는 사랑도 원치 않는다.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무모해 보이기는 해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제 나름대로의 방식이라 짐작할 뿐이다. 허나 여자가 봉인한 것은 단순히 약지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과연 봉인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일까.

 

 그리고 또, 궁금하다. 상처를 봉인한다는 것은 필요한 것일까. 추억은 추억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표본으로 만들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는 발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물론 내가 참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진정 슬픔이라면, 그것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화상을 입은 소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라 하더라도.

 

-

 

 책 속의 또다른 이야기. <육각형의 작은 방> 또한 금방 이야기에 빠져버릴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여자는 어느날, 수영장 탈의실에서 미도리를 만나게 된다. 단숨에 자신의 관심을 받은 미도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우연히 밖에서 만나 그들을 뒤따라 간다. 도착한 곳은 사택관리사무실. 하지만 그 곳은 '이야기 작은 방'이라는 묘한 곳이다. <육각형의 작은 방>에서 혼자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하지 못했던 이야기, 억눌려 있던 마음의 이야기.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 곳에서는 말을 한다.

 

 그 곳으로 안내한 셈이 되어버린 미도리는 마음이 어지러운 여자에게 있어 홀려버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을까. 미도리에게 '이야기 작은 방'의 냄새가 났는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웠던 여자는 그 곳을 출입하며 서서히 마음이 정화되어 가고 있었으리라. 마침내 모든 것을 털어냈을 때, '이야기 작은 방'은 사라진다. 아쉬움과 함께, 그 곳이 정말 존재했었는지 의문이 일 정도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방이 존재했던 것일까. 혹, 그 방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환상인 것일까. 방이 사라졌지만, 그는 혼란을 씻어낸다. 그 방의 존재가 더이상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고친 것인지, 그 방법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이상 방과의 관계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 방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속삭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돌아보고 성찰할 시간, 혹은 마음껏 내뱉어 버릴 말들을 모아서 내버릴 시간. 나에게도 그 방은 필요할까. 그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보고 싶다. 아니, 말이 아니라도 좋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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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보낸 백 년
조용미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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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의 어느 섬에서 보낸 봄 한철을 묶어 내었다 한다. 개인의 기록, 일기를 이렇게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시인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아니, 그는 치열했으리라. 섬을 시에 담아내야 했으니까. 삶의 열정, 그것이 고스란히 느꼈졌다. 시에 대한 열정도.

 

 10.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55쪽, 流謫)

 

 그는, 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그리움이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그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 지친 마음을 섬이 푸근히 안고 기다리도록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는 섬에서의 3개월을 마냥 은둔한 것은 아니었으니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섬에서는 마냥 외롭다고 한다. 대놓고 외롭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는 이 없는 섬에서의 고독, 그 모르는 이의 존재도 마주치기 힘든 섬에서의 고독.

 

 문득 인간은 섬이 아니다, 라는 존 단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대륙이 한 조각이며, 대륙의 일부분일 뿐, 인간은 섬이 아니다. 그렇기에 섬에서는 육지가 그리워지는 것일까.

 

 32. 나는 늘 바람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바람을 말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늘 광기와 손잡아 왔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바람이 나를 밤의 산속으로 불러내어 컴컴한 숲길을 헤매 다니다 길을 잃기도 했다. 바람이 잠을 데려가 새벽이 되도록 귀를 곤두세우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바람이, 바람이......, 모든 것을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가. (88쪽)

 

 그를 키운 것도 8할이 바람이었을까. 바람과 광기는 늘 몰래 붙어 다니며 그를 괴롭혀 왔단다. 하지만 바람도 광기도 그가 찾아간 것일 뿐.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애써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그를 책상 앞으로 데려가 시를 쓰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람을 데려와 시로 만든 것임을 안다.

 

 조용미는 이 산문집에 많은 것을 담았다. 그가 가진 시에 대한 열정,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오만함까지 감싸주던, 그 무던한 바람을 담았다. 그 바람을 닮았다.

 

 33. 새벽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새벽 네 시, 전등을 준비해 놓지 못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마음을 만져 본다. 마음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지는 이상한 물건. 깨어 여기가 섬인 줄 알았을 때 나는 어땠나. 길 위의 마음이었나 집의 마음이었나. (89쪽)

 

 이 수필집을 반 정도 읽었을 때, 놀랐던 것은 그가 동식물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이름과 생김에 대한 것 뿐이더라도.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섬에서 보낸 백 년>에 등장하는 많은 꽃과 나무들. 그것들 중에 내가 생김까지 알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민들레와 진달래, 제비, 목련, 매화, 유채, 동백 정도일까. 그렇기에 그가 안고 있는 지식만큼, 풋풋한 애정이 있었을텐데도 그는 길 위의 마음이지 않았나를 의심한다. 아아,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33. 인간은 공간적 존재다. 현실적인 공간과 환상적인 시간 사이에서 인간의 삶은 이루어지고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세상을 머물다 간다. 한 인간이 평생을 머무르다 가는 공간들이 어쩌면 그 인간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비롯되어지거나 또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작가들이 자기의 영혼과 육체가 합일되는 공간을 찾아 평생을 떠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94쪽)

 

 그는 인간이 공간적 존재라고 단언한다. 자신만의 시공간을 찾기 위한 노력, 그 수많은 노력 중에 진정한 결실을 이루는 씨앗은 몇이나 될까. 한 평생 머무르던 그 곳이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야말로 허탈하지 않던가. 시인은 아마 그것을 알았던 것이이라. 그렇기에 섬에서 보낸 시간이 마냥 꿈같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리라. 그가 섬을 꿈같이 여겼던 소치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잠시나마 그 섬에 머물러 보고 싶은 소원이 절로 난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 섬은 그에게 영혼과 육체가 합일하는 공간이던가.

 

 40. 별이 초파일의 등불처럼 커다랗게 주렁주렁 걸려 있는 섬의 새벽하늘을 바라본다. 저 등불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119쪽) 

 

 시인다운 감성은 곳곳에서 단물을 빨듯 베어 나온다. 스륵, 입맛을 다시게 한다. 섬의 새벽하늘을 보고 싶다. 등불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는 별이, 내게도 피어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애먼 감수성을 탓한다.

 

 99. 말들을 나의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 모든 존재의 현상을 지배하는 말들의 세계, 말들을 다듬어야 한다. 말들의 탑에, 이미지의 탑에 깔려 무너지지 않으려면 말들을 가지런히 쌓아 놓고 줄 세워 놓아야 한다.

 명상과 통찰의 힘이란 개안을 하듯 세상을 새로이 보여 주는 것, 새로움이란 또 무엇인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것 아니던가. 매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으로 나는 어지럽다. (154쪽)

 

 그는 수많은 말 중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시 속에 담아 내고 싶다는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민망할 정도로 하나없이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릿속 사전에서 무수히 영롱한 언어를 뽑아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그의 삶이며, 동시에 소원이며, 또 바람이다. 나의 고뇌 또한 다르지 않다. 씨실에 날실을 엮어 베를 짜는 옛여인처럼, 무던히도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자연의 경이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침내 다 짜낸 청포의 빛깔에서 땀이 묻어날 때, 그 때 즈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霖

 

-

 

'전혀 새롭다.(96쪽)'는 비문이다. 문장의 호응이 어긋났다. '전혀'를 사용하려면 서술어가 부정이어야 한다. 예.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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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권현숙 지음 / 세계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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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권현숙의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삼중주」, 「열린문」「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마지막 수업」,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라는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매 단편마다, 그는 도시 속 인간의 외로움을 절절히 표현한다. 하나같이 이국적인 분위기와 몽롱함이 조화된 단편들은, 외로워하는 인간들을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해화 속에 미묘한 불협화음은 내재된 외로움을 간지럽히고,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불협화음 가운데 진정한 해화를 위한 구원은 언제나 늦다는 것이다.

 

- 순순히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어. 주인이 허락한다면, 살아갈 용기까지도....... 하지만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141쪽,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인간」은 세미노마를 앓고 있는 남자와 음악잡지에 기사를 쓰는 여자가 이국의 땅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확정성이 넘치는 미래를 내다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단편이다. 사랑이 거세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망에 환희를 느끼기도 전에, 남자는 허망한 말투로 말한다.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고.

 

- 길은 푸르스름한 밤의 빛에 싸여 있다. 그 너머 깜깜한 어둠은 숲이다. 하늘에는 아직 먼동이 트는 빛도 보이지 않는다. 고독한 시간, 밤의 가장 쓸쓸한 시간이다.  (42쪽, 「삼중주」)

 

 또 「삼중주」에서는 새벽은 깊어 가고, 먼동은 아직 트지 않은 시간을 가장 고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외로움은 시시때때로 각 장에서 몸을 비틀고, 꼬아대며 외치고 있다. 마치 그 단어 자체에서 어떠한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이라도 하듯. 

 

 「삼중주」에서는 윗집 여자가 아내를 잃어버린 아랫집 남자의 집을 몰래 다녀가는 과정 속에서 생긴 오해를 섬뜩하게 그렸다. 우연히 아랫집 남자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게 된 여자는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남자의 집을 들락거린다. 남자는 아내의 향수 '바디'의 향기, 깨끗해진 프라이팬, 푹 파인 사과차, 작은 단추 등으로 누군가의 침입을 짐작한다. 덫을 쳐놓고 기다리지만, 낌새는 전혀 없다. 남자는 깨닫는다. 혹시, 죽은 나의 아내가, 라고 말이다. 여자도, 남자도 각자의 방에서 제각기 미쳐가고 있다. 그들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편집적일 정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놀랍기 그지없다.

 

- 쓸데없이 전기를 낭비하며 마냥 돌고 있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나는 돌발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소비, 무규칙, 방임.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무구한 기쁨. 갑자기 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졌다. 이 중세도시가 내게 인본주의의 맛을 보였다. (154쪽, 「마지막 수업」)

 

 그들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가는 것일까. 역시나 이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수업」에서, 쟝은 사고로 죽는다. 안과 싸우고 내연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다. 쟝은 죽어버렸지만, 안은 살아 있다. 게다가 뱃속에는 쟌느까지 있었던 것이다. 쟝의 친구인 아담은 안이 걱정되어 매일같이 그들이 동거했던 집에 찾아가 안을 돌본다. 안은 자신이 쟝을 죽이고, 쟌느까지 죽였다고 고백하며 그에 따른 죄책감과 그렇게 만들게 한 쟝에 대한 분노가 한데 뒤섞여 있다. 스스로 죽음을 찾아 가려던 안은, 애초에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아담으로 인해 되살아 난다. 이것은 「인간」에서 얼핏 보이던 희망과 같은 종류의 것일까. 물론, 의뭉스러운 작가는 이것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의사인 남자와 화가인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허나 남자가 결혼을 말하여도 여자는 거부한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을 의심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껴안는다. 반면 여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연애 속의 사랑을 자제하는 것도, 냉송하는 것도 힘든 여자에게 결혼은 두려움이다. 억눌러 온 집착을 억제할 수 없다고 짐작한 여자는 끝끝내 거부한다. 이러한 줄거리는 달리는 바이크 위에 앉은 여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바이크 위의 두 남녀의 대화는 못내 진지하다.

 

- 넌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회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해. 좀 더 근원적인 것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어. (203쪽,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

 

  이어, 그들은 추락한다. 앞에 앉은 남자를 꼭 붙잡은 여자의 손이 늘 위태하긴 했다. 하지만 이 추락은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의도적인 외도이다. 여자는 사과꽃 향기가 풍기고, 달려오는 숲이 보이는 아름다운 순간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언제나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잡아 먹는다고 말하지만, 이 단편을 보면 그 반대인 듯 하다.

 

 어쨌든 의심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는, 전개 과정 내내 템포가 한 박자씩 느리게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살짝 지루해질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일까. 혹은 또 다른 복선일까. 또, 이 문제점은 「열린문」에서도 살짝 비친다.

 

 죽을 때가 다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네의 정신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방탕했던 노인이, 나이가 들어 외로움과 병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성욕이 불끈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독특한 소재로 다가온다. 이것 또한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노인은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에서, 늘 문을 열어두고 사는 특이한 인물이기도 한다. 또, 등장하는 여자는 성욕을 잃은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향기에 발기해버리는 노인에게 역겨움과 구토감을 느끼며 떠밀치고 도망친다, 라는 설정이 씁쓸하다.

 

 인간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오는 것인가. 도시는 도대체 무슨 힘을 갖고 있기에, 곧 세상을 버릴 노인까지 답답한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인가. 단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올 수가 없다. 마치 진혼곡 도중, 그 장엄함에 짓눌러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올가미 속에서도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인간」에서 여자가 그토록 싫어하던 프랑스에 발을 묶이게 만든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이다. 물론 이 인본주의에도 불협화음은 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만 인간답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시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답은 뻔하다. 허나 그것이 도시의 외로움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 자체의 감수성과 아스팔트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섣불리 속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제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는 것만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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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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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 서편제라는 세 편의 연작 소설은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세 편의 제목만 읽어서는 <천년학>이라는 제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누이의 진정한 만남과 깨달음이 <천년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독하지 않은 이상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년학>을 찾기 위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렸다. 문득, 이렇게까지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배다른 오누이가 짊어져야 했던 한을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리를 해야 했던 누이의 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은 그 자체가 한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언제나 소리에 얽매여 있었고, 햇덩이를 가진 오라비는 그러한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수를 해야 했지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햇덩이를 감당할 길이 없던 오라비는 결국 아버지와 누이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 다시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을 찾아 헤매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누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게다가 누이는 장님이라 한다. 오라비는 누이가 눈을 잃은 이유를 단숨에 꿰뚫는다. 오라비가 떠난 것 처럼, 누이가 떠날까봐 겁이 난 아버지의 횡포라는 것을.

 

 소리로 인해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는, 소리로 인해 눈을 잃은 누이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를 용서한 누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소리는 한의 정서에 의해 태어났다는 기존의 학설처럼, 그들에게 소리는 그 자체로써 한의 대상이며, 한을 풀어 내는 매개체이다. 그런 아이러니는 이루 감당할 길이 없을만큼 처절하게 느껴진다. 한의 대상인 소리를 듣기 위해 떠도는 오라비와 소리를 뽑아 내는 누이는, 그렇기에 더욱 쌍둥이같은 닮은 꼴로도 보인다.

 

 오라비가 누이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결국 오라비가 누이를 찾았는가는 의문이다. 찾는 동안 한 번의 만남은 있었으나 그것으로 누이를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 오라비에게 나를 찾게 하지 마시오. 전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 하시오…….

 

 누이는 이런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남은 <천년학>을 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학동은 이미 옛 모습을 잃었지만, 누이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천년학>을 보고, 또 오라비가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리라. 그리하여 오누이는 가슴에 지닌 한을 끝끝내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의 한을 이해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라비가 생의 분노와 살기인 햇덩이에 취해 소리를 청하는 것을 누이가 이해했듯이, 누이가 아버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을 오라비가 이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허나 이렇게 닮은 꼴이기에 서로의 한을 서로가 덮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이는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소리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오라비는 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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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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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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