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하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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