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 서편제라는 세 편의 연작 소설은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세 편의 제목만 읽어서는 <천년학>이라는 제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누이의 진정한 만남과 깨달음이 <천년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독하지 않은 이상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년학>을 찾기 위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렸다. 문득, 이렇게까지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배다른 오누이가 짊어져야 했던 한을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리를 해야 했던 누이의 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은 그 자체가 한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언제나 소리에 얽매여 있었고, 햇덩이를 가진 오라비는 그러한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수를 해야 했지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햇덩이를 감당할 길이 없던 오라비는 결국 아버지와 누이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 다시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을 찾아 헤매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누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게다가 누이는 장님이라 한다. 오라비는 누이가 눈을 잃은 이유를 단숨에 꿰뚫는다. 오라비가 떠난 것 처럼, 누이가 떠날까봐 겁이 난 아버지의 횡포라는 것을.

 

 소리로 인해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는, 소리로 인해 눈을 잃은 누이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를 용서한 누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소리는 한의 정서에 의해 태어났다는 기존의 학설처럼, 그들에게 소리는 그 자체로써 한의 대상이며, 한을 풀어 내는 매개체이다. 그런 아이러니는 이루 감당할 길이 없을만큼 처절하게 느껴진다. 한의 대상인 소리를 듣기 위해 떠도는 오라비와 소리를 뽑아 내는 누이는, 그렇기에 더욱 쌍둥이같은 닮은 꼴로도 보인다.

 

 오라비가 누이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결국 오라비가 누이를 찾았는가는 의문이다. 찾는 동안 한 번의 만남은 있었으나 그것으로 누이를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 오라비에게 나를 찾게 하지 마시오. 전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 하시오…….

 

 누이는 이런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남은 <천년학>을 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학동은 이미 옛 모습을 잃었지만, 누이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천년학>을 보고, 또 오라비가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리라. 그리하여 오누이는 가슴에 지닌 한을 끝끝내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의 한을 이해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라비가 생의 분노와 살기인 햇덩이에 취해 소리를 청하는 것을 누이가 이해했듯이, 누이가 아버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을 오라비가 이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허나 이렇게 닮은 꼴이기에 서로의 한을 서로가 덮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이는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소리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오라비는 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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