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권현숙 지음 / 세계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권현숙의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삼중주」, 「열린문」「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마지막 수업」,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라는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매 단편마다, 그는 도시 속 인간의 외로움을 절절히 표현한다. 하나같이 이국적인 분위기와 몽롱함이 조화된 단편들은, 외로워하는 인간들을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해화 속에 미묘한 불협화음은 내재된 외로움을 간지럽히고,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불협화음 가운데 진정한 해화를 위한 구원은 언제나 늦다는 것이다.

 

- 순순히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어. 주인이 허락한다면, 살아갈 용기까지도....... 하지만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141쪽,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인간」은 세미노마를 앓고 있는 남자와 음악잡지에 기사를 쓰는 여자가 이국의 땅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확정성이 넘치는 미래를 내다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단편이다. 사랑이 거세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망에 환희를 느끼기도 전에, 남자는 허망한 말투로 말한다.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고.

 

- 길은 푸르스름한 밤의 빛에 싸여 있다. 그 너머 깜깜한 어둠은 숲이다. 하늘에는 아직 먼동이 트는 빛도 보이지 않는다. 고독한 시간, 밤의 가장 쓸쓸한 시간이다.  (42쪽, 「삼중주」)

 

 또 「삼중주」에서는 새벽은 깊어 가고, 먼동은 아직 트지 않은 시간을 가장 고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외로움은 시시때때로 각 장에서 몸을 비틀고, 꼬아대며 외치고 있다. 마치 그 단어 자체에서 어떠한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이라도 하듯. 

 

 「삼중주」에서는 윗집 여자가 아내를 잃어버린 아랫집 남자의 집을 몰래 다녀가는 과정 속에서 생긴 오해를 섬뜩하게 그렸다. 우연히 아랫집 남자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게 된 여자는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남자의 집을 들락거린다. 남자는 아내의 향수 '바디'의 향기, 깨끗해진 프라이팬, 푹 파인 사과차, 작은 단추 등으로 누군가의 침입을 짐작한다. 덫을 쳐놓고 기다리지만, 낌새는 전혀 없다. 남자는 깨닫는다. 혹시, 죽은 나의 아내가, 라고 말이다. 여자도, 남자도 각자의 방에서 제각기 미쳐가고 있다. 그들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편집적일 정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놀랍기 그지없다.

 

- 쓸데없이 전기를 낭비하며 마냥 돌고 있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나는 돌발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소비, 무규칙, 방임.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무구한 기쁨. 갑자기 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졌다. 이 중세도시가 내게 인본주의의 맛을 보였다. (154쪽, 「마지막 수업」)

 

 그들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가는 것일까. 역시나 이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수업」에서, 쟝은 사고로 죽는다. 안과 싸우고 내연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다. 쟝은 죽어버렸지만, 안은 살아 있다. 게다가 뱃속에는 쟌느까지 있었던 것이다. 쟝의 친구인 아담은 안이 걱정되어 매일같이 그들이 동거했던 집에 찾아가 안을 돌본다. 안은 자신이 쟝을 죽이고, 쟌느까지 죽였다고 고백하며 그에 따른 죄책감과 그렇게 만들게 한 쟝에 대한 분노가 한데 뒤섞여 있다. 스스로 죽음을 찾아 가려던 안은, 애초에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아담으로 인해 되살아 난다. 이것은 「인간」에서 얼핏 보이던 희망과 같은 종류의 것일까. 물론, 의뭉스러운 작가는 이것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의사인 남자와 화가인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허나 남자가 결혼을 말하여도 여자는 거부한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을 의심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껴안는다. 반면 여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연애 속의 사랑을 자제하는 것도, 냉송하는 것도 힘든 여자에게 결혼은 두려움이다. 억눌러 온 집착을 억제할 수 없다고 짐작한 여자는 끝끝내 거부한다. 이러한 줄거리는 달리는 바이크 위에 앉은 여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바이크 위의 두 남녀의 대화는 못내 진지하다.

 

- 넌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회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해. 좀 더 근원적인 것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어. (203쪽,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

 

  이어, 그들은 추락한다. 앞에 앉은 남자를 꼭 붙잡은 여자의 손이 늘 위태하긴 했다. 하지만 이 추락은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의도적인 외도이다. 여자는 사과꽃 향기가 풍기고, 달려오는 숲이 보이는 아름다운 순간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언제나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잡아 먹는다고 말하지만, 이 단편을 보면 그 반대인 듯 하다.

 

 어쨌든 의심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는, 전개 과정 내내 템포가 한 박자씩 느리게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살짝 지루해질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일까. 혹은 또 다른 복선일까. 또, 이 문제점은 「열린문」에서도 살짝 비친다.

 

 죽을 때가 다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네의 정신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방탕했던 노인이, 나이가 들어 외로움과 병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성욕이 불끈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독특한 소재로 다가온다. 이것 또한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노인은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에서, 늘 문을 열어두고 사는 특이한 인물이기도 한다. 또, 등장하는 여자는 성욕을 잃은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향기에 발기해버리는 노인에게 역겨움과 구토감을 느끼며 떠밀치고 도망친다, 라는 설정이 씁쓸하다.

 

 인간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오는 것인가. 도시는 도대체 무슨 힘을 갖고 있기에, 곧 세상을 버릴 노인까지 답답한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인가. 단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올 수가 없다. 마치 진혼곡 도중, 그 장엄함에 짓눌러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올가미 속에서도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인간」에서 여자가 그토록 싫어하던 프랑스에 발을 묶이게 만든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이다. 물론 이 인본주의에도 불협화음은 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만 인간답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시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답은 뻔하다. 허나 그것이 도시의 외로움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 자체의 감수성과 아스팔트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섣불리 속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제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는 것만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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