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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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하다는 은희경을 이 책으로 처음 접했다. 글쎄, 그의 명성에 비해 이 소설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유별난 특성 탓일까, 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작가 은희경이 성장의 길목에서 쓰여진 것이든 스스로가 가진 허망함을 표현해 내려고 한 것이든 이 소설집의 아스라한 분위기는 개운하지가 않다.

 

 「의심을 찬양함」에서는 여자인 유진과 남자인 유진이 우연과 통계를 두고 설전을 펼친다. 여자 유진은 기실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운명에 대한 모호함만 느낄 따름이다. 「고독의 발견」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남자와 난장이 여자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고독에 따른 환상일 뿐이다. 그것에서 깨어나 오열하는 남자의 모습이 처연하다.

 

 이어지는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은 좀 더 이야기가 치밀하다.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이어트를 결심한 남자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장례식장을 찾아 간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리라 믿던 그는 결국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유품으로 받고 나서 지친 몸뚱이를 위로한다. 곡기를 끊고 다이어트를 하던 그는 실로 오랜만에 국밥을 두그릇이나 헤치우고, 세상이 자신에게 던지는 멸시에서 벗어났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비너스의 탄생>을 보며 언제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고 생각했던 남자는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언제나 몽상에 빠져 있는 소녀B의 이야기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그린 「날씨와 생활」,  로키 산맥에서의 휴가를 그린 「지도중독」, 제 청춘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남자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은 일련의 괴이쩍은 분위기를 여전히 유지한다.

 

 특히 「지도중독」에서 보여지는 P선배의 수상스러운 행동은 이루 말할 데 없이 괴이하다.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 보아도 목적지를 찾을 수가 없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에만 필요한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떠한 목적을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좌표를 잃지 않기 위해 유지하는 삶, 그 가운데에서 강박으로 연명하는 삶에서 연민을 느낀다.

 

 사람들은 그의 소설을 두고 냉소적이라 말한다. 그것이 그의 전매 특허라고.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연민과 처연함을 느낀다. 설명할 필요가 없을만큼 고요한 가운데 펼쳐지는 연민을. 마치, 지나간 청춘을 붙들고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을 바라보는 처연함을.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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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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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문학의 효시라고 불리우는 에드가 앨런 포우.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의 작가이지 않은가.

 

 공포적 성격을 띄는 소설만 따로 모아 펴낸 <고딕총서2>는, 사실 포우의 추리소설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약간 입맛이 심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포우의 환상적인 묘사, 특히 심리묘사는 여전히 설레이게 만든다. 포우 스스로가 가장 좋아한다는 「리지아」나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던 「어셔 저택의 붕괴」, 익히 보아 알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특히 눈에 들어 온다.

 

 합리적 이성과 판단을 마비시는 이야기꾼, 이라고도 칭하는 포우의 작품은 실로 그 구성이 놀랍다. 게다가 의식의 흐름 수법이 무리없이 사용되고 있다. 200년전의 소설이 서사적 구성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조짐을 보인다는 것에서 놀랍고, 또 유미적 혹은 퇴폐적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시발점이라 할 만하다.

 

 앞서 말했듯이 퇴폐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그의 책에서는 주로 죽음을 다루고 있다. 특히 비정상적인 죽음과 살인, 혹은 복수를 다룬다. 최면과 불가능한 죽음을 소재로 한 「M. 발드마 사건의 진실」,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고 무덤을 파헤치는 「베레니체」, 정신 이상의 남자가 고양이와 아내를 살인하는「검은 고양이」, 고문을 소재로 한 「구덩이와 시계추」, 도플갱어를 다룬 「윌리엄 윌슨」, 역병으로 황폐해진 나라에 대한 표제작 「붉은 죽음의 가면」, 노예가 지혜를 짜내 폭군을 죽이는 이야기인 「폴짝-개구리」, 친구를 죽인 남자의 이야기 「아몬티야도 술병」,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미쳐버린 남자의 삶을 말하는「리지아」, 같이 사는 노인을 죽이고 나서 정신 이상에 의해 자수하는「고자질쟁이의 심장」,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남자의 죽음을 다룬 「직사각형 상자」, 사랑했던 여인에게 한 맹세를 버리고 배신해버린 남자의 이야기인「엘레오노라」, 쌍둥이와 괴이한 저택을 소재로 한 「어셔 저택의 붕괴」등 모두 각각의 소재에서 죽음을 모티브로 좌절하거나 정신이상에 걸린다. 특히 애인과 친구의 죽음은 수시로 등장한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미쳐버린 이의 이상한 행동은 두려워할만하다. 이러한 심리적 좌절감은 두려움으로 한껏 치솟는다.

 

  또 환상적 일러스트의 대가인 귀스타브 도레의 일러스트도 잘 어울려 나타나,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편이다. 허나 추리소설의 개척자이기도 한 포우의 선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공포소설 위주인지라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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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
김진송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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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래브의 거푸집을 떼어내려 할 때 난감한 일이 생겼다. 거푸집 안에서 새가 둥지를 튼 것이다. 내 집 짓겠다고 남의 집 헐 수도 없고, 하는 수없이 새끼를 길러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계획했던 일정이 보름이나 늦어지고 말았다. (215쪽)

 

 책에서 보여지는 김진송은 그런 사람이다. 새가 새끼를 길러 떠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그런 사람 말이다. 쉰이 다 되었는데 목수 경험 10년인 늦깍이 목수, 김진송. 그의 이 책은 겉보기에서 풍기는 DIY 관련 서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에세이에 가깝다. 예술이나 공예의 분류에 넣기 보다는 에세이에 분류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 상상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사고의 틈 속에 존재하며 그 틈 속에서 인간의 인식을 무한히 넓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바로 현실적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했으며 또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기 보다 어른들이다. 상상의 세계가 제공하는 시각의 균열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일상의 경험 속에 매몰되어 상투성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320쪽)

 

 흔히 디자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목물 만들기는 나무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살리거나 그 형태에서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가장 처음의 일이 아니라 나무를 깍고 다듬는 도중에 일어난다. 도면을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

 

 나무를 통해 상상하고, 나무를 통해 만드는 것이다. 김진송은 그것이 목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목수일을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독학한 것이기에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는 그는 뿌리없는 목수라도 좋다고 한다. 도로 가든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어쨌든 그 덕에 목수 김씨의 삶은 만족스러워 보인다. 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가늠하고 배려하려 해도 나무는 목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는 그의 말 속에는 나무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나무가 목수를 기다려주지 않듯이, 시간도, 사람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나무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더라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듯이,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것 아닐까. 그가 나무와 목물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엿보며, 나 또한 내 것을 소중히 여기리라 다짐해 본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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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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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호의 고백대로, 이 소설집은 그의 이야기다. 그는 「나쁜 소설」이나 「수인」등을 통해 자신의 소설관을 이야기한다. 곡괭이질도 결을 따라 파야 하고, 바람따라 긁는 요령이 있듯이 소설가라는 직업에는 하나의 의지가 관철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신경을 오직 시멘트벽에 집중하려 애썼다.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곡괭이를 내리칠 땐 오직 곡괭이 생각만 했다. 그 자신이 마치 곡괭이의 날이 되고, 곡괭이의 자루가 된 것처럼, 곡괭이와 한 몸을 이뤄, 온몸으로 벽에 부딪쳤다. 「수인(囚人)」

 

 특히 이 소설집의 첫번째인 「나쁜 소설」은 이기호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꽤 인내심을 기르도록 요구하고 있어,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껴질 정도였다. 형식을 허물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제시하고, 우연을 남발하여 연속하는 이기호의 글이 분명 낯선 탓이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나 표제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같은 황당한 설정, 독특한 서술은 언뜻 스치면 당혹함을 넘어선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허나, 허무맹랑해 보이는 우연의 연속이란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다시 말해, 필연보다 우연이 더 많다는 말이다. 이기호는 현실에서 현실적인 일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물음을 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현실답지 않듯 소설도 소설답지 않은 것들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며, 말갛게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탓에 이 소설집을 마냥 가볍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밭은 기침에 꾸물꾸물 살아 오르는 글자들이 묘한 경계선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눈 앞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실은 여간 성가신게 아니지만, 마냥 새침하게 쏘아 볼 수도 없는 매력이 있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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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대 남자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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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대한 예감이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언젠가는 그 예감마저 완전히 사라질 때가 오지 않을까? 그건 좀 지나친 바람일까? ( 205쪽)

 

 존 스타인벡의 말을 웅엉거리던 아셀방크가 선명하다. 캐나다의 폭풍설에 발이 묶여, 아내의 애인이었던 패터슨의 집에 며칠 묵게 된 아셀방크는 죽음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메인 남자다. 패터슨 또한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함께 살고 싶었던 아셀방크의 아내, 안나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아셀방크가 떠나버린 안나를 찾아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묘하기 짝이 없다. 떠난 아내를 몇 년이 지나서야 우체국 소인만을 단서로 찾아 나서는 것, 자신의 팔뚝에 직접 주사 바늘을 꽂아 넣는 것, 아내의 연인이었던 남자들을 순서대로 만나는 고역을 참아내는 것도 모두 묘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린 안나는 정말 '온전한 남자'를 찾아 떠난 것일까.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안나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 그러니 제 속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지 않는 게 좋은 겁니다. 거긴 우리의 가장 추한 얼굴이, 평새토록 감추고 살아야 할 얼굴이 숨어 있으니까.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인간은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동물이라 기억 같은 걸 가져서는 안 된다고, 과거의 일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그 잡동사니 상자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하셨죠. (211쪽)

 

 몸도 마음도 유약한 남자인 아셀방크에게 패터슨은 '온전한 남자'로 보인다. 안나 역시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패터슨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악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가 '온전한 남자'인지도 의문이다. 그런 의문 때문에 안나가 패터슨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두 남자 모두 한 여자에게 버림받은 것이고, 이 책의 제목이 <남자 대 남자>로 이름 붙여진 것이리라. 한 여자의 남편과 애인이라는 자리로써.

 

 그들에게 안나가 돌아온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안나는 행복과 불행을 알아내는 것이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인정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던 아셀방크는 그 말의 의미를 얻기 위해 안나를 찾아 나서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마침내 행복을 얻기 위해. 하지만 끝내 안나는 종적이 묘연하고, 그 탓에 아셀방크는 답을 들을 수 없다.

 

 아셀방크는 안나를 찾아 내는 것을 그만둔다. 그것은 단순히 안나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을까. 이미 행복의 답을 찾아 내었기 때문일까. 행복과 불행을 찾아 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던 안나가 아셀방크에게서 잊혀질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안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이제사 찾았던 것은 아닐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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