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
제임스 핀 가너 지음, 김석희 옮김 / 실천문학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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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예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최근 탐독한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 「날씨와 생활」이라는 단편을 보면 좀 황당한 인물이 나온다. 황당하다고는 하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동화 속에 빠져 왕자님이 자신을 성으로 데려 가거나 막대한 유산을 받게 해줄 진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꿈꾸는 소녀B가 그 주인공이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살던 곳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정을 붙이지 않고 홀로 동화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세라 이야기>나 <세드릭 이야기>, <신데렐라>적인 이러한 사고는 어린이라 할지라도 길러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커가면서야 비로소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 방송사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입각한 드라마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동화는 물론 좋은 것이지만 이런 의존적인 사고는 분명 문제가 있다. 제임스 핀 가너는 이것을 바로 잡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를 써낸 것이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PC동화집을 써내었다고 말하는 그는 '마이너리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은 '다원문화적인'과도 일맥상통한다. 동화 속에 숨겨진 남성중심적, 백인중심적, 부르주아중심적, 유럽중심적인 사고방식, 다시 말해 종차별적,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계급차별적, 문화차별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들이 이러한 차별과 편견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마음에 동화를 각색했다. 물론 이것은 어린이의 '베드타임'에 바로 들려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화적 상상력의 저해에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각 단어에 대한 이해력이나 배경지식이 모자라는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같은 성인에게 차별과 편견에 대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으며, 이것을 어린이에게 설명해 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책 속의 문장들은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C(Politically correct)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어, 애매한 문장을 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굳이 설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꽤 해학적이며,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코미디이다. 허나, 이 해학을 단순한 소극(笑劇)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의표를 찌르는 풍자적 해학이라는 것을 충분히 주지해야 할 것이다.

 

- 모두 제 마누라 탓입니다. 마누라가 임신했는데, 마님의 싱싱한 상추를 먹고 싶어서 못견디겠다지 뭡니까. 제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물론 결손 가정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죽으면 앞으로 태어날 제 아이는 안정된 구존(具存) 가정에서 자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제 아이한테서 안정된 가족 구성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라푼첼」, 52쪽)

 

 마녀의 밭에 심겨진 상추를 도둑질하다가 들킨 땜장이는 이렇게 하소연한다. 또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타고 몰래 올라가 그를 만난 왕자는 라푼첼을 자본주의체계의 흐름에 편입시키려 한다. 갑자기 등장한 마녀가 왕자를 죽이려 들지만, 왕자는 마녀에게 매니저 직을 줄테니 라푼첼의 노래를 팔자며 꼬인다. 마녀가 이에 넘어가자, 화가 난 라푼첼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몰래 성을 탈출해서 도시로 간다.

 

- 그후 그녀는 '음악의 무료 보급을 위한 기금'이라는 비영리재단을 설립하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기금 모금을 위한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카페와 갤러리에서 무보수로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짓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라푼첼」, 60쪽)

 

 PC동화 라푼첼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일갈을 퍼붓는 것이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다른 이야기들도 이런 식으로 풀어 나간다. 가너는 이 책이 다른 작가들의 올바른 상상력에 자극제가 되고,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허나 빠뜨린 것이 하나 있다. 이 책은 분명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되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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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범우문고 12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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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시의성이 그닥 중요치 않은 글이 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도 그 중 하나이다. 이미 반 세기가 훨씬 지난 탓에 그가 인용한 글들의 예스러운 문체가 아쉬운 점이기는 하나, 그것이 정제된 우리말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크게 지적할만한 사항은 아닌 줄로 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작문 관련 서적 중에 <문장강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있을까. 나 또한 마찬가지라서 그의 글을 인용할 일이 있는 바람에 <문장강화>를 들춰 본 적이 있으나, 이제사 정독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이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허나 안타까운 점은 범우문고판으로 소장하는 바람에 몇 항목이 빠져 있어, 완전하지 못 하다는 점이다. 전문이 아닌 축약본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 두 벌 일을 하게 된 낭패의 원인이었다. 허나 일이 귀찮게 되었다고 해서 전문을 새로 구입해야 겠다는 생각에는 다름이 없다.

 

 각설하고, <문장강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삼는 점을 꼽아 본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첫째로 말짓기요, 둘재로 개인 본위요, 셋째로 새로움이다. 글짓기가 아닌 말짓기를 주안점으로 삼은 까닭은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이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인 탓이다.

 

 첫째, 말짓기란 글을 죽이더라도 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하려는 본래의 뜻과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서 말하는 것과 같이 쓰는 것은 곤란하다. 낭독을 위한 글이나 비문과 속어 등을 사용한 글은 이미 문장으로써의 자격을 상실하는 탓이다.

 

 둘째, 개인 본위의 문장작법을 내세운 것은 현대 문화 만반에 있어 개인적인 것을 강렬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문장이나 사상을 널리 또 정확하게 표현하기에 문장만한 것이 또 있을까. 따라서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방식을 연구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새로운 문장을 위한 작법을 주요히 여긴 것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새롭다는 의미에서다. 즉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 까닭은, '오늘'이 '어제'를 향해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향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호적(胡適)의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에서 전고(典故)를 일삼지 말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문장 본연의 임무인 표현을 위해 말짓기를 주요히 삼고, 개인적인 것을 새롭게 쓰는 것은 이치에 타당하게 보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며, 다른 것과 같을 수 없으니 새로운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참신함의 지향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것을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문제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말과 글이지만, 이와 같은 유의점을 염두에 두고 쓴다면 새롭고 훌륭한 글이 될 만하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글을 다듬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글이라도 보고 또 보고, 다듬고 또 다듬는 것이 퇴고이며, 퇴고란 글을 따져보고 내놓는 것이다. 만족할 수 있을만큼 퇴고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 글이라 하겠다. 이를 소홀히 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여도 본래 뜻을 온전히 전하기 어려울 것은 당연지사다.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반 세기가 넘도록 표표히 유영하는 그의 글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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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캐러멜! 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3
곤살로 모우레 지음, 배상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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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캐러멜!>은 사하라위족의 농아 소년 코리와 숫낙타의 캐러멜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선천성 농아인 코리는 말을 배우기 이전에 귀머거리였고, 따라서 벙어리이기도 하다. 그런 코리에게는 친구도 없고,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받는다. 때로는 돌팔매질도 당하지만, 코리는 캐러멜을 만나 그런 시름은 모두 잊는다. 캐러멜의 엄마낙타는 아무리 말을 붙여도 알아 듣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막 태어난 캐러멜은 자신의 말을 알아 듣는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코리에게 말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코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입모양을 통해 자신의 이름도 알았기에 캐러멜의 말도 알 수 있었다.

 

 몇가지 손짓을 제외하면 가족과의 의사소통도 어려웠던 코리는 완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캐러멜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캐러멜에게 캐러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위는 김춘수의 시, <꽃>의 전문이다. 어린 숫낙타에게 캐러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순간, 그는 코리의 캐러멜이 되었다. 마음의 열고,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어떤 것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열고, 서로의 어깨에 기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의 관계는 그 열린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배고픈 주민들에게 캐러멜을 제물로 바쳐야 했을 때, 코리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캐러멜은 아흐메드 삼촌과 점잖은 어르신들에게 목을 내놓는다. 코리는 캐러멜의 죽음을 슬퍼 했지만, 캐러멜의 영혼은 부드럽게 그를 끌어 안으며 말한다.

 

내 생명이 꺼진다고

눈물짓지 마.

우리가 함께 산 날을 생각해.

 

난 죽음을 받아들였어.

난 너의 기억을 안고 하늘의 초원으로 가는 거야.

네가 사는 동안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을게.

 

넌 아직 알 수 없지만

네가 밤을 맞으면

너도 그것을

이해할 거야.

 

작은 코리, 내 하나뿐인 친구…….

 

 생명을 영위하기에도 힘든 사막에서 젖이 나오지 않는 숫낙타를 키우는 것이 사치인 것을 알았던 것일까. 캐러멜은 온순하게 죽음을 받아 들였고, 온몸으로 울고 있는 코리를 이해시키려 했다. 캐러멜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던 코리는 어느덧 청년이 된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시인으로, 멋지고 굳센 어른으로.

 

 캐러멜은 이미 죽었지만, 자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코리에게 그것은 이미 슬픈 것이 아니다. 한줌의 고깃덩어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을 지켰던 코리는 이미 아픔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그들의 우정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겠지만, 이 동화는 여전히 아름답다. 인간중심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고, 백인중심적, 부르중심적, 유럽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사하라위족이라는 난민을 그려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순수한 마음을 깨끗하게 표현해낼 줄 알았던 그들이 고마워서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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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2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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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교 음악실로 돌아가 선생님께 클래식 강습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중학교 음악선생님은 여선생님으로 성악을 전공하셨는데, 친절하지는 않으셨지만 클래식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 분이었다. 비제의 <카르멘>을 비디오로 시청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된 것이었는데, 클래식이라고는 어릴 적 아버지의 권유로 들었던 베토벤의 지루한 선율이 다였던 나에게 신선했다. 또 놀라웠다. '와!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고. 그리고 고등학교때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보았다. 역시나 애니였는데, 조수미의 목소리가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밤의 여왕> 아리아는 한동안 교실에서 유행했던 기억이 있다. 이 반 저 반에서 찢어지는 목소리로 흉내내던 친구들 덕분에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번에는 금난새라는 유명 지휘자를 음악선생님으로 두게 되었다. 책으로 살짝 만났을 뿐이지만, 반가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1권에는 유명한 작곡가들이 많은데, 2권에는 그보다는 좀 덜 유명한 작곡가들이 포진해 있어 모르던 이야기도 많았다. 게다가 음악이라면 듣고 즐길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작곡가의 생애나 시대적 상황, 작곡하게 된 계기나 얽힌 비화 같은 것은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기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금난새는 이렇게 말한다.

 

- "가요나 팝송은 아무런 준비가 필요없는데, 왜 클래식을 즐기려면 준비를 해야 하나요?" 왜냐고요? 클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처럼 음악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가요나 팝송은 우리 시대의 유행음악이므로 현대인의 취향에 맞을 수밖에 없지만, 오래전에, 그것도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음악인 클래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표지에서 발췌)

 

 또 유행가가 룰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공놀이'라면, 클래식은 룰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야구경기'라는 유쾌한 비유도 들먹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야구는 9회말부터 시작이라느니 하는 말을,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루한 것이 끝이라고 재미있겠냐며 맞받아 쳤던 기억이 난다.

 

 요즘들어 더욱 즐기게 된 클래식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던 차, 내게 온 이 책은 꽤 도움이 된 듯 하다. 어떤 곡에 대한 배경이나 각 작곡가가 지은 곡 중 추천곡을 살며시 권하는 것도 좋다. 허나 무엇보다 내가 무심결에 한쪽으로 치워버린 작곡가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 좋았다. 특히나 나는 말러, 라흐마니노프같은 이들을 잘 듣지 않으려 했었는데, 이 기회에 접할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몰랐던 사실에 눈이 뜨인 것도 물론이다. 특히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같은 명작이 처음에는 그토록 비난받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메타나의 불우한 생애나 그의 자전적 음악인 현악사중주 <나의 생애에서>를 접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가장 마음에 들면서도 슬펐던 부분은 4악장 후반부에 제1바이올린의 높은 피치였다. 청각 상실과 환청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런 점들을 알고 들으니 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또, 구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은 드레스덴 학살 이후 그 현장을 둘러보고 작곡한 것이라 한다. 끔찍한 역사에 대한 사명감에 쓰여졌을 이 곡은 씁쓸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이 음악을 듣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이름 이니셜인 DSCH를 음계로 삽입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 음악을 들으며,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을 읽는 것도 좋은 체험독서가 될 것 같다. 블랙코미디의 정수라 불리는 커트 보네거트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곡과 함께 한다면 울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제 5도살장>을 읽을 무렵, 이 음악이 없이도 눈물을 글썽거렸지 않던가.

 

 <금난새와 떠다는 클래식 여행 2>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작곡가를 한쌍으로 하여 설명한다. 세기말 낭만주의 음악과 현대음악의 거목들을 살펴 보는 것이 즐거운 여행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문학사적으로는 퇴폐적 낭만주의를 즐기지 않지만, 음악사적으로는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1권을 읽지 못했으나,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접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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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기 1 - 부여왕 대소를 제거하라
김상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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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은 이 책을 두고, '역사에 방점이 찍힌 역사 소설'이 아닌 '소설에 방점이 찍힌 역사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중문학을 추구하는 자신은 재미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역사적 사실보다 소설적 사실에 더 비중을 두었고, 따라서 재미가 쏠쏠하다. '역사 소설'이라는 단어에서 소설에 방점을, 그것도 거성(聲)을 찍어 주고 싶다. 가장 센소리라는 뜻처럼, 그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고 동감하는 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재미'에는 상성(上聲)을 찍어 주고 싶다.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소리라는 뜻의 상성처럼, 전개될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는 말이다.

 

 먼저 말하고 싶은 점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몇 부분만을 가지고 장대한 팩션을 써냈다는 점에서 놀랍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장이 실리거나 신화적인 부분은 현실적으로 삭감하고, 또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서사를 덧붙인 점이 만족스럽다. 간간히 던져지는 익살과 해학은 재미를 더해주며, 을두지의 계책이라던가, 자명고라던가, 호동과 낙랑의 이야기라던가, 하는 부분에서 김상현의 재해석력은 실로 재미가 넘친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일단, <대무신왕기>라는 제목을 생각하면 한참이나 의아해진다. 제목에 걸맞지 않게, 초점이 호동 왕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또, 제목을 차치하더라도 호동 왕자를 중심 인물로 내세웠다면, 그의 죽음을 좀 더 긴박하고 사실적이게 만들어야 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기호일지도 모르지만, 호동이 죽는 장면에서 허탈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런 실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잘 짜여져 있는 데다가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김상현은 자신의 데뷔작을 낸 직후, '대중적이지 못하다'라는 뼈 아픈 평을 들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정약용 살인사건>을 아직 접하지 못해, 그것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대무신왕기>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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