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개
양쯔쥔 지음, 이성희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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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짱아오, 즉 <사자개>를 중심으로 화자의 '아버지'가 겪은 일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티베트 시제구 초원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이야기는 먼저 스토리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 제법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엮어 무리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하지만 문체라던가 서툰 묘사, 지나친 오역과 역주, 오타 등은 책에 대한 호감을 상당히 반감시킨다. 

 

 기자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확실히 문장 자체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시처럼 미문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아니오, 기사처럼 정문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아니오, 다만 스토리 자체에만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34장동안 매장마다 사자개와 인간과의 관계, 사자개의 우수성, 야수성, 인강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굉장히 지루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은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사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문학성을 높여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사자개>는 사자개에 대한 사랑이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양쯔쥔이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아, 화자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직접 사자개와 함께 생활했던 아버지를 둔 양쯔쥔은 어릴 때는 도무지 사자개에 정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자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 냄새가 묻어 있는 양쯔쥔에게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는 사자개를 보고서야 사자개에 대한 사랑이 피어 났다 한다. 사자개가 더이상 초원에서 살지 못하고 드문드문 도시 속에서 애완견으로 키워지기 시작하며, 야성이 죽어 사자개답지 않아졌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매우 슬퍼하며 돌아 가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는 이 소설은 자연히 아버지와 사자개에 대한 사랑이 물씬 풍긴다.

 

 오래 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사자개의 사진이 기억난다. 더럽고 냄새가 날 것 같은 털을 가진 채, 기죽어 있는 사자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 사자개가 예전에는 초원을 누비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던 야생동물이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야성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도시 속에서 죽어가는 사자개들에 진정 조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개라며 인터넷에서 떠돌던 사진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그 때는 사자개를 잘 몰랐어도 안쓰러움이 절로 피어났다. 하물며 그 일면을 조금 들여다 본 지금은 오죽하랴.

 

 지금껏 무협소설이 아닌 중국소설은 접하기가 어려웠다. 번역도 문제지만, 그 자체의 문학성이 비하당했기 때문이다. <사자개>는 2005년 이후 10위권으로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는 장기 베스트셀러이다. 그런 만큼 좀 더 훌륭한 성취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 기대에는 약간 뒤떨어지지만, 소재의 참신함과 작가의 애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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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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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순간부터 당신은 무례함을 금지하는 규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주민에게 어떤 질문이든 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116쪽) 또한, 당신은 거짓말을 해도 됩니다. (117쪽)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당신에게 이것을 허용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마 비웃을 것이다. 예의를 지키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 전달자>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을 금지한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인구 또한 적정 수준을 벗어나지 않도록 제어한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이처럼 통제된 사회 속에서 조너스는 성장한다. '기억 보유자'라는 직업에 선택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조너스가 '기억 보유자'가 되자, 그는 처음으로 이 사회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사람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우리 마을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단다. 넌 이렇게 물어야 했어.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래.'란다. / 아니면 '어머니 아버지는 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세요? 라고 물었어야지. 그리고 그 대답은 진심으로 '물론.'이다. / '사랑'같은 단어를 쓰는 게 왜 부적절한지 이해되니? (216-217쪽)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조너스는 이태껏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지만 '기억 보유자'가 된 후 거짓말을 할 권리를 허용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만다. '사랑'같은 단어를 쓰는 게 왜 부적절한지 몰랐지만, 이해한다고 거짓을 말한 것이다. 그 순간 조너스가 받았을 상처는 현재 조너스에게 '기억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선대 '기억 보유자'만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억 보유자'란 <기억 전달자>에서 보여지는 통제 사회 이전의 사회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자를 말한다. 조너스는 이런 '기억 보유자'가 된 후,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고대에 있었던 색깔과 노래 등을 모두 빼앗기고, 심지어 사랑 등의 감정까지 빼앗긴 조너스가 '기억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그것을 다시 되찾았을 때 한없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되찾은 것들을 보유하고 있는 자는 조너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롭고, 또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산아 제한은 물론 이미 태어났다 하더라도 개성적이거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혹은 늙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다면 '임무 해제'라는 허울 좋은 말로 살해하는 사회가 바로 <기억 전달자>에서 보여지는 사회다. 그것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정의할 수 없다. 조너스가 '기억 보유자'가 되기 전까지 모든 걸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없었듯이 아예 이전 사회를 모른다면 그것이 행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선뜻 통제 사회를 디스토피아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다. 또, 그 탓에 조지 오웰의 <1984>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이 통제 사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비교를 하려고 해도 '자유'에 손을 들게 될 수밖에 없다. 허나 냉전의 시대를 생각해 보라. 소련은 사회주의, 즉 통제 사회에 대한 이념을 얼마나 확고히 긍정했는가. 우리가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았더라면, 사회주의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할 수 있었을까. 현대 사회에 대한 긍정을 확고히 주장할만한 기치를 마련하지 못한 내가 이 혼란을 받아 들이기는 매우 힘들다. 이것을 부정하기에는 각 이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정확히 이해한 후 판단을 내린다 해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나요? 왜 색깔들이 사라졌나요? / 우리들이 그쪽을 선택했어. '늘 같음 상태'로 가는 길을 택했지. 내가 있기도 전에, 이 시대보다도 전에,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말이야. 우리가 햇볕을 포기하고 차이를 없앴을 때 색깔 역시 사라져 버렸지. / 그럼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은 포기해야 했단다. (163쪽)

 

 어쨌든 판단은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수정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그처럼 조너스는 고대에 다수가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았다. 허나 안타까운 점은 그 잘못이 수정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 몸 하나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뿐이다. 이 심심한 결말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허나,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재차 삼차 계속 수정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개운해진다.

 

-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기억을 품을 수는 없나요? 모두 조금씩 기억을 함께 나눈다면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한다면 기억 전달자님과 제가 그렇게나 많은 고통을 떠맡을 필요가 없잖아요. (193쪽)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잘못에 순응하고 있는가, 개혁하려 하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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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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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때때로 눈물을 참아 내기가 힘들었음을 미리 말하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겪지 못했더라도 우리네 부모, 혹은 우리네 역사와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세월이 못내 안타까웠던 탓이리라. 혹은 그것의 해결을 향한 막연한 열망 탓인지도 모른다.

 

- 이거 잡수세요, 어머니가 꼭 드시게 하라구 그러셨어요. / 두부…… 거 다 미신이다. / 이제부턴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셔야 된대요. (상권 17쪽)

 

 남들처럼 눈치 보다 제 갈길 찾아 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허비한 오현우에게 조카는 이런 말을 전한다. 현우의 누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출소하면 생두부를 먹는 것처럼, 이제는 남들과 같이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리라. 허나 18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던 연인이 죽고, 이제는 체취조차 찾을 수 없는 오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한때 사랑을 나누었던 윤희가 이미 몇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현우의 마음은 이루 설명하지 못할만큼 찢어 졌으리라. 감옥에 들기 전 혼인 신고라도 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윤희를 만날 길도 연락을 주고 받을 길도 없던 현우는 그가 죽은 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우는 직계가족 외에는 면회도 안되고 편지도 안부 외에는 안되고 더구나 그냥 친지의 것은 열람한 뒤에 다시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갈뫼에서 짧은 몇달을 함께 보냈을 뿐이지만, 그네들의 인연까지 짧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계절을 함께 한 연인들의 속도와 깊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 둘이 함께했던 갈뫼에 마침내 현우가 돌아 간다. 간단한 개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갈뫼의 오두막은 현우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윤희의 배려였음을 모를 수 없으리라. 현우는 그 곳에서 여러 권의 일기를 발견한다. 그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윤희가 현우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그가 없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는지, 어떨 때 그가 생각났는지를 말하려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 딸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현우는 그동안 윤희가 살아왔던 것을 보고 느낀다. 그가 없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현우가 감옥에 있는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 또한 그 못지 않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댓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희가 더욱 안타깝다.

 

- 나는 거울 속에서나 자신을 볼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두 눈은 화면 이쪽의 렌즈에 지나지 않고 세상은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이 저 바깥쪽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하권 111쪽)

 

- 어딘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는 거기 남은 한사람까지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126쪽)

 

 인간은 누구나 혼자기에 감당해야 할 원죄같은 외로움을 항상 느낀다. 그것이 특별히 현우와 윤희를 비켜갈 까닭은 없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 풍덩 빠져 자신을 내맡기는 이는 흔치 않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다른 거대한 힘의 뜻으로 가져야 하는 외로움이기에 그것의 깊이는 더한다.

 

- 잠잘 때를 생각해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여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하권 232쪽)

 

 마침내 윤희의 일기는 끝을 맺는다. 죽기 전 남긴 몇 통의 편지와 함께 윤희의 삶은 마감한다. 18년간 만나지 못하고 갈망했던 서로를 묻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네 삶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과 같은 장기수,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 이념으로 인한 오해등으로 누군가의 삶은 여전히 얼룩져 있다.

 

-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권 308쪽)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딸 은결이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을 발한다. 그것은 그들의 딸일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세대를 이끌어 나갈 우리다. 우리는 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을 본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오래된 정원을 본다. 그것은 색색가지 꽃이 만발하기도 하였지만, 우리네 가슴 속에 남긴 오열의 유산이다. 칠팔십년대의 피로 얼룩진 삶, 우리는 그것을 해결했는가. 우리네 오래된 정원을 찾았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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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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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와닿지 않거나 너무 많은 글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우리는 흔히 난독증을 경험한다. 글이 읽혀지지 않는 것이다. 문자가 문자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색깔로만 구분될 때의 괴로움은 겪지 못한 사람이면 모른다. 허나 그런 일시적인 난독증이 아닌, 장기적인 난독증의 경우 얼마나 괴로움이 심할까. 동구는 그런 난독증을 겪는 소년이다. 아마 꽉 막히고 답답한 집안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 때문이리라. 한창 글을 배워야할 시기에 그것을 습득하지 못했기에 동구는 문자 하나하나를 해체하여야만 읽을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서 늘상 이루어지고 있는 원리이지만, 워낙 빠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기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동구는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일히 인식해야지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라도 글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상당했고, 노력 또한 만만치 않게 컸다. 갑자기 3학년 담임을 맡게 된 박영은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동구는 그러한 선생님에게서 남다른 애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라기보다 동경에 가깝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독자는 안다. 그로 인해 글읽기는 물론 말더듬이 버릇도 차츰 고쳐지게 된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기에, 박영은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자 동구의 글읽기 실력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급기야 박영은 선생님이 고향에 내려간 후 연락두절되어 아예 만날 수 없게 되자, 동구의 마음은 한없이 오그라든다. 잇따라 겹치는 가족 해체에 동구는 점점 더 괴로워지게 된다.

 

 특히 그토록 아꼈던 동생의 죽음은 동구에게 큰 자괴감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감을 따자고 꼬이지만 않았어도 영주가 죽는 일은 없었을텐데, 하는 고통이 밀려 온다. 온가족이 슬퍼하는 가운데 할머니는 끝까지 동구가 아닌 어머니에게 영주의 책임을 묻고, 마침내 어머니가 미치기에 이른다.

 

-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영주의 모습이 천사처럼 해맑다. 맑다 못해 투명하다. (292쪽)

 

 꿈 속에서 만난 영주는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진다. 동구의 목을 쉼없이 조르지만,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힘을 낸다. 박영은 선생님이 동구에게 힘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정말 큰 싸움이 났을 때, 선생님이 한 말이 동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 나중에 동구가 커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몰라. 아버지처럼 괴롭고 난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잖아. 그때 네 아들이 아버지를 원망한다면 동구도 정말 힘들지 않겠니? (115쪽)

 

 한없이 어머니를 괴롭히기만 하던 아버지라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괴로움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러니까 오늘 내가 알려주는 방법은 네 마음 속에 잘 묻어두고 이 다음에 네가 커서 실천에 옮기면 돼. 일단은 동구가 어른들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나 할머니나 엄마에게 늘 힘이 되는 큰아들이 되면 어른들이 정말 기뻐하실거야. (117쪽)

 

 박영은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언제나 옳았고, 그것을 믿고 있던 동구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더라도 그 말씀은 성경처럼 떠받들려져, 동구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알듯 말듯한 관계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할머니의 투정을 받아 들일 수도 있을만큼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생 영주로 인해 동구네 가족은 해체 직전으로 흘러가지만, 그 사이에 가족을 이어주던 울타리 역할을 했으니 영주의 죽음도 가슴 속에 두는것으로 충분하리라. 산 사람은 산 사람의 길을 가야 한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 한다고 해서 그가 돌아오지도 않을 뿐더러,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 동구야, 걱정하지마. 네가 클 때까지 선생님이 기다려줄게. 남자 친구도 사귀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이대로 기다릴게. 아무 걱정 말고 지금처럼 예쁘게 자라기만 하렴. (227쪽)

 

 고향으로 떠나기 전, 박영은 선생님은 동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겉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이제 박영은 선생님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살짝이나마 깨달은 동구에게 이 말은 큰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동구를 포근히 감싸주던 선생님의 내음과 함께, 영원히 동구의 마음 한 구석에서 따스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영원한 사랑과 동경으로.

 

 이제 선생님은 스승이 아닌 교사의 위치만을 자리하고 있지만,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박영은 선생님은 그 스승의 멋진 표본이었고, 젊은 만큼 정열로 가득차 있어 더욱 빛나 보였다. 나도 언젠가 교탁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웃어 보이던 선생님을 보며 즐거웠던 기억이 어렴풋 있다. 이제는 교사도 학생도 그것을 바라기엔 이 사회가 너무 똑똑해졌다. 교활한 미소를 가면으로 하고 텁텁함 웃음만 남길 뿐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도 그런 멋진 선생님이 있었던 것처럼, 동구에게도 그런 선생님을 마음 속에 담을 기회가 있어 다행이다.

 

 교사 뿐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스승이고 학생일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스승으로 기억될 때 혹은 학생으로 기억될 때 그 모습이 언제나 빛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것은 어느 위치나 마찬가지다. 비록 동구의 아버지가 동구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이기까지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살짝 속내를 비쳤을 때 동구는 얼마나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였는가.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을 전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정말 환하게 빛날 것이다.

 

 동구가 그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영영 세상을 피해있을 수만은 없기에, 고달픈 성장통을 이겨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래서 동구의 아릿한 성장통이 안타까움뿐 아니라 사랑스러움까지 더하는 것이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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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베텔스만 클래식 4종 세트 (어린왕자, 키다리 아저씨, 별, 독일인의 사랑) 대교북스캔 클래식
알퐁스 도데 외 지음, 최내경 외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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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그가 쓴 단 하나의 소설이 바로 이 <독일인의 사랑>이다. '남'에게 왜 사랑을 표현해서 안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영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와 타인, 또 나의 것과 타인의 것을 구별하는 것이 유달리 힘들었던 소년은 마리아가 준 반지를 되돌려 주며, '네 것은 곧 내 것'이라고 말한다.

 

-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는 잘 모를거야. 하지만 그걸 깨닫고 나면 너는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을 거야. (46쪽)

 

 하지만 세상에는 계급이 있고, 또 차별이 있다. 결국 마리아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작의 딸인 마리아 공녀와 그렇지 못한 소년은 아무리 소꿉친구라 할지라도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한때 친했던 후작의 큰아들조차 젊은 귀족들과 장교들과의 교제때문에 그를 잊지 않았던가. 어쩌면 소년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훨씬 더 행복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자라 청년이 된 그는 고향에 돌아와 마리아와 재회한다.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리아는 그를 멀리하려 한다.

 

- 하늘의 궤도를 도는 별처럼 인간은 이 땅 위를 정해진 대로 도는 것뿐이야. 신께서는 인간에게 저마다 가야 할 만남과 이별에 관한 길을 정해주셨어.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 잘못하다간 우리가 이 세상의 질서 자체를 어기는 것이 될지도 몰라. (167쪽)

 

 하지만 이처럼 종교에 의지하여 운명론에 입각한 논리는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같은 사람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소년은 결국 사랑하던 마리아를 잃게 된다. 게다가 죽기 전까지 마리아는 그의 사랑을 피했고, 그것은 소년을 슬프게 했다. 고문관의 고백속에 후작 집안과의 관계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초점을 맞출 것은 바로 성장으로 보인다. 소년의 성장은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며, 소년의 사랑이라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어째서 같은 계급 안에서 사랑을 해야 하며, 여러 학문 속에서 영혼간의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두 사람이 그 틀에 갇혀야 했던 것인가.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은 개인의 용기 부족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큰 힘을 가한 것은 세상의 규칙이었다.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소년의 성장이라면, 그 성장은 기뻐해야 할만한 것인가.

 

 하지만 그의 천사, 즉 마리아에 대한 사랑은 죽음 후에도 변치않는 것이 되어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 사랑은, 그의 바람대로 낯 모르던 모든 이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인의 사랑>은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이야기다. 문학, 철학, 종교가 어우러져 우아한 음율을 잡아 내었던 책이니만큼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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