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때때로 눈물을 참아 내기가 힘들었음을 미리 말하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겪지 못했더라도 우리네 부모, 혹은 우리네 역사와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세월이 못내 안타까웠던 탓이리라. 혹은 그것의 해결을 향한 막연한 열망 탓인지도 모른다.

 

- 이거 잡수세요, 어머니가 꼭 드시게 하라구 그러셨어요. / 두부…… 거 다 미신이다. / 이제부턴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셔야 된대요. (상권 17쪽)

 

 남들처럼 눈치 보다 제 갈길 찾아 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허비한 오현우에게 조카는 이런 말을 전한다. 현우의 누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출소하면 생두부를 먹는 것처럼, 이제는 남들과 같이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리라. 허나 18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던 연인이 죽고, 이제는 체취조차 찾을 수 없는 오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한때 사랑을 나누었던 윤희가 이미 몇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현우의 마음은 이루 설명하지 못할만큼 찢어 졌으리라. 감옥에 들기 전 혼인 신고라도 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윤희를 만날 길도 연락을 주고 받을 길도 없던 현우는 그가 죽은 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우는 직계가족 외에는 면회도 안되고 편지도 안부 외에는 안되고 더구나 그냥 친지의 것은 열람한 뒤에 다시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갈뫼에서 짧은 몇달을 함께 보냈을 뿐이지만, 그네들의 인연까지 짧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계절을 함께 한 연인들의 속도와 깊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 둘이 함께했던 갈뫼에 마침내 현우가 돌아 간다. 간단한 개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갈뫼의 오두막은 현우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윤희의 배려였음을 모를 수 없으리라. 현우는 그 곳에서 여러 권의 일기를 발견한다. 그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윤희가 현우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그가 없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는지, 어떨 때 그가 생각났는지를 말하려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 딸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현우는 그동안 윤희가 살아왔던 것을 보고 느낀다. 그가 없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현우가 감옥에 있는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 또한 그 못지 않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댓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희가 더욱 안타깝다.

 

- 나는 거울 속에서나 자신을 볼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두 눈은 화면 이쪽의 렌즈에 지나지 않고 세상은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이 저 바깥쪽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하권 111쪽)

 

- 어딘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는 거기 남은 한사람까지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126쪽)

 

 인간은 누구나 혼자기에 감당해야 할 원죄같은 외로움을 항상 느낀다. 그것이 특별히 현우와 윤희를 비켜갈 까닭은 없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 풍덩 빠져 자신을 내맡기는 이는 흔치 않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다른 거대한 힘의 뜻으로 가져야 하는 외로움이기에 그것의 깊이는 더한다.

 

- 잠잘 때를 생각해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여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하권 232쪽)

 

 마침내 윤희의 일기는 끝을 맺는다. 죽기 전 남긴 몇 통의 편지와 함께 윤희의 삶은 마감한다. 18년간 만나지 못하고 갈망했던 서로를 묻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네 삶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과 같은 장기수,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 이념으로 인한 오해등으로 누군가의 삶은 여전히 얼룩져 있다.

 

-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권 308쪽)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딸 은결이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을 발한다. 그것은 그들의 딸일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세대를 이끌어 나갈 우리다. 우리는 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을 본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오래된 정원을 본다. 그것은 색색가지 꽃이 만발하기도 하였지만, 우리네 가슴 속에 남긴 오열의 유산이다. 칠팔십년대의 피로 얼룩진 삶, 우리는 그것을 해결했는가. 우리네 오래된 정원을 찾았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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