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에 와닿지 않거나 너무 많은 글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우리는 흔히 난독증을 경험한다. 글이 읽혀지지 않는 것이다. 문자가 문자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색깔로만 구분될 때의 괴로움은 겪지 못한 사람이면 모른다. 허나 그런 일시적인 난독증이 아닌, 장기적인 난독증의 경우 얼마나 괴로움이 심할까. 동구는 그런 난독증을 겪는 소년이다. 아마 꽉 막히고 답답한 집안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 때문이리라. 한창 글을 배워야할 시기에 그것을 습득하지 못했기에 동구는 문자 하나하나를 해체하여야만 읽을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서 늘상 이루어지고 있는 원리이지만, 워낙 빠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기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동구는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일히 인식해야지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라도 글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상당했고, 노력 또한 만만치 않게 컸다. 갑자기 3학년 담임을 맡게 된 박영은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동구는 그러한 선생님에게서 남다른 애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라기보다 동경에 가깝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독자는 안다. 그로 인해 글읽기는 물론 말더듬이 버릇도 차츰 고쳐지게 된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기에, 박영은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자 동구의 글읽기 실력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급기야 박영은 선생님이 고향에 내려간 후 연락두절되어 아예 만날 수 없게 되자, 동구의 마음은 한없이 오그라든다. 잇따라 겹치는 가족 해체에 동구는 점점 더 괴로워지게 된다.

 

 특히 그토록 아꼈던 동생의 죽음은 동구에게 큰 자괴감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감을 따자고 꼬이지만 않았어도 영주가 죽는 일은 없었을텐데, 하는 고통이 밀려 온다. 온가족이 슬퍼하는 가운데 할머니는 끝까지 동구가 아닌 어머니에게 영주의 책임을 묻고, 마침내 어머니가 미치기에 이른다.

 

-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영주의 모습이 천사처럼 해맑다. 맑다 못해 투명하다. (292쪽)

 

 꿈 속에서 만난 영주는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진다. 동구의 목을 쉼없이 조르지만,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힘을 낸다. 박영은 선생님이 동구에게 힘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정말 큰 싸움이 났을 때, 선생님이 한 말이 동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 나중에 동구가 커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몰라. 아버지처럼 괴롭고 난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잖아. 그때 네 아들이 아버지를 원망한다면 동구도 정말 힘들지 않겠니? (115쪽)

 

 한없이 어머니를 괴롭히기만 하던 아버지라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괴로움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러니까 오늘 내가 알려주는 방법은 네 마음 속에 잘 묻어두고 이 다음에 네가 커서 실천에 옮기면 돼. 일단은 동구가 어른들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나 할머니나 엄마에게 늘 힘이 되는 큰아들이 되면 어른들이 정말 기뻐하실거야. (117쪽)

 

 박영은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언제나 옳았고, 그것을 믿고 있던 동구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더라도 그 말씀은 성경처럼 떠받들려져, 동구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알듯 말듯한 관계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할머니의 투정을 받아 들일 수도 있을만큼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생 영주로 인해 동구네 가족은 해체 직전으로 흘러가지만, 그 사이에 가족을 이어주던 울타리 역할을 했으니 영주의 죽음도 가슴 속에 두는것으로 충분하리라. 산 사람은 산 사람의 길을 가야 한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 한다고 해서 그가 돌아오지도 않을 뿐더러,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 동구야, 걱정하지마. 네가 클 때까지 선생님이 기다려줄게. 남자 친구도 사귀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이대로 기다릴게. 아무 걱정 말고 지금처럼 예쁘게 자라기만 하렴. (227쪽)

 

 고향으로 떠나기 전, 박영은 선생님은 동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겉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이제 박영은 선생님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살짝이나마 깨달은 동구에게 이 말은 큰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동구를 포근히 감싸주던 선생님의 내음과 함께, 영원히 동구의 마음 한 구석에서 따스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영원한 사랑과 동경으로.

 

 이제 선생님은 스승이 아닌 교사의 위치만을 자리하고 있지만,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박영은 선생님은 그 스승의 멋진 표본이었고, 젊은 만큼 정열로 가득차 있어 더욱 빛나 보였다. 나도 언젠가 교탁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웃어 보이던 선생님을 보며 즐거웠던 기억이 어렴풋 있다. 이제는 교사도 학생도 그것을 바라기엔 이 사회가 너무 똑똑해졌다. 교활한 미소를 가면으로 하고 텁텁함 웃음만 남길 뿐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도 그런 멋진 선생님이 있었던 것처럼, 동구에게도 그런 선생님을 마음 속에 담을 기회가 있어 다행이다.

 

 교사 뿐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스승이고 학생일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스승으로 기억될 때 혹은 학생으로 기억될 때 그 모습이 언제나 빛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것은 어느 위치나 마찬가지다. 비록 동구의 아버지가 동구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이기까지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살짝 속내를 비쳤을 때 동구는 얼마나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였는가.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을 전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정말 환하게 빛날 것이다.

 

 동구가 그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영영 세상을 피해있을 수만은 없기에, 고달픈 성장통을 이겨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래서 동구의 아릿한 성장통이 안타까움뿐 아니라 사랑스러움까지 더하는 것이리라.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