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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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부터 복고가 한창 유행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CM이 생길 정도로 패션도 복고에, 노래까지도 리메이크곡이 인기를 끈다. 걸맞춰 TV드라마도 사극 열풍이다. 뒤따라 팩션도 우리나라의 주류 장르라 할만큼 성장했다. 그 탓에 <뿌리깊은 나무>로 유명한 이정명이 새 팩션을 하나 들고 나왔을 때, 우려도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우려는 나만이 가진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런 우려 속에서 이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정말 기쁨이 컸다. 주인공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컬러 도판이 화려하게 인쇄된 것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줄거리 또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덕분에 2권을 다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과 극이라 할만큼 다른 화풍을 가진 둘의 대결이나 절묘한 반전, 문체 등은 쉬이 이 책을 읽도록 만든다. 특히 10년 전 도화서 참변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라는 정조의 명령을 받든 김홍도의 추리력, 신윤복이 가진 태생의 비밀, 그리고 또다른 비밀, 그가 <바람의 화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흥미진진하다.

 

 또한 작가, 이정명이 말하는 그림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과 해설을 곁들여 그림을 보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욱 새롭다. 학창시절 미술, 국사 시간에 얼핏 스쳐 보았던 그림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고운 선을 가진 그림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참 안타까울 지경이다.

 

 흔히 좋아하는 그림이 무엇이냐, 혹은 좋아하는 화가는 누구이냐, 라는 질문에 외국 작품과 화가들을 대고는 한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라서 고흐나 세잔, 클림트, 프란츠, 쉴레 등 유명 화가들에 대해 말하곤 한다. 물론 개인적 취향은 절대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화가들에 대해, 그림에 대해 모른 채로 그들만을 추앙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지심이 드는 것이다.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가령, '저문 강 노을 지고 그대를 그리노라' 라고 읊을 때, 강을 그리는 것은 곧 못견디게 그리워함이 아닙니까.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상권, 17쪽)

 

 책에서, 신윤복은 그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 그림…. 나도 모르게 되뇌이면서 그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정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예술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나 공간은 어느새 아스라히 스러져 가고, 결국 남는 것은 스스로의 사고뿐이지 않던가. 또한 그것조차 육신의 부패와 함께 이지러질 한 때의 것. 그렇기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것이지만, 정신의 되새김이기에 행복한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남긴 아름다운 그림들처럼, 이정명은 또 한 편의 소설을 남겼다. 이 참에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예술인들이 한없이 부럽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들 한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빈 손으로 와서 세상에 잠시 손에 쥐었던 무언가를 남기고 가는 소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무언가를 남기고, 홀가분하게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다.

 

 신윤복만이 <바람의 화원>은 아니다. 김홍도 또한 이 세상에 잠시 살다 간 바람의 무언가이며,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바람의 무언가이며, 나 또한 바람의 무언가가 될 것이다. 따뜻한 바람 냄새가 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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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
김신홍 지음 / 컬처라인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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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차와 튤립의 나라라고 알려진 네덜란드. 하지만 대개 수도인 암스테르담의 지저분한 거리, 홍등가에서 쇼윈도에 서있는 반라의 여인들, 서유럽답게 찌부드드한 날씨, 마약과 섹스가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거리만 돌아보고 오게 된다고 한다. 

 

 저자, 김신홍은 그런 이미지에 대해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들로 네덜란드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단다. 그 곳은 가장 네덜란드적이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즉, 암스테르담은 관광객을 위한 특구일뿐, 네덜란드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네덜란드의 매춘은 합법적인 것이다. 매춘부들은 수입에 대해 세금도 내고 노조도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으면 엄격한 제재를 받고, 정해진 구역 내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생활 곳곳에서, 통제받지 않고 마약을 즐길 수 있다. 단, 중독성이 매우 약한 마약만을 사용할 정도로 스스로 규제하는 사회다. 그래서 중독성이 강한 마약에 중독된 이들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생각하며, 그들을 교도소가 아닌 병원으로 보낸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관대함이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997년 '국민 건강과 금연을 위한 재단'측은 앞으로 16세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학생들에게 3백 길더의 상금이나 그에 상당하는 여행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만큼 청소년 흡연 문제가 공공연하다. 저자는 길을 가다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는데, 주위의 어른들이 야단은 커녕 이상하게 여기는 눈초리 한 번 건내지 않더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의 흡연이 공공연한 것을 넘어서서 일반화된 사회인 것이다. 물론 학교 교칙에서는 교내 흡연을 금지하고 있다. 허나 그것은 금연 장소에 관한, 즉 교내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일 뿐, 청소년이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방관으로 보일 법한 그들의 태도는 네덜란드 사회의 오점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마약, 매춘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지만 범죄율이나 마약 중독자의 수가 인근 국가보다 낮다. 네덜란드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완벽한 자유인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가정 내에서 그런 절제를 엄격히 배우고 자라나기 때문에, 청소년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자세를 취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고등학생만 되어도 두세가지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교육의 열의가 강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유치원생도 식탁 당번, 설거지 당번, 거실 청소 당번 등을 나누어 할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 자란다. 특히나 철저한 칼뱅주의에 의해 살아가는 네덜란드인이기에 항상 부끄럼 없이 단정하고 청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독일보다 더 지독한 짠돌이들이 사는 나라라고 하니, 그들의 생활 습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진부하다.

 

 또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북해에 면한 국토의 40%가 바다보다 낮고, 최고지점이래야  해발 321m밖에 안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토를 넓히기 위해 자연과 맞서 싸운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만큼 자연의 혜택을 덜 받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는 저력은 인적자원밖에 없다.

 

-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스스로 네덜란드를 만들었다. (God made the world, but the Dutch made Holland themselves.)

 

 그들은 그 인적자원으로 지금의 네덜란드를 세웠다. 끝없는 자연과의 투쟁으로써. 더군다나 네덜란드의 환경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흡사하다. 국토의 면적이 좁은 것도 그렇고, 인구 밀도가 높은 것도 그러하며, 교육열이 높은 것도 그러하다. 허나 반대로 보면, 우리나라와 지나치게 다르다. 국토의 면적이 좁지만 모자란 부분을 간척지로 넓혀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만든 것이 다르며, 인구 밀도가 높지만 그것을 단점으로 두지 않고 외국 각지로 뻗어 나가는 저력으로 만든 것이 다르며, 교육열이 높지만 우리나라처럼 부모의 강제가 아닌 것이 다르다. 더불어 신랄하고 자유로운 언론,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정치가들이 존재한다. 또한 그들은 희멀건(백) 인종답지 않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으며, 한국사회에 만발한 '외모지상주의' 같은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을만큼 신경쓰지 않는다.

 

 오죽하면 저자 김신홍이 네덜란드인은 사시사철 방수재킷 하나로 버티는 사람들이라고 칭할까. 우리나라에서 외모에 대한 칭찬은 매우 유쾌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동시에 의아한 것이라 한다. 누군가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면, 상대적으로 그런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따라서 그들은 외양보다 내면에 힘쓴다. 외양은 자신의 뜻이 아니지만, 내면은 자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 김신홍은 이 책의 제목은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라고 지었다. 강소국(强小國)이라는 것이다. 주변 강대국(强大國), 즉 영국이나 독일, 혹은 미국같은 나라에 비해 전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평한다. 강대국의 국민들은 모국의 강함에 기대어 모국어밖에 할 줄 모를 정도로 타국에 신경쓰지 않지만, 네덜란드인은 스스로 소국임을 인정하며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또한 강대국의 국민들이 모국의 강함에 기대어 타국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치켜 세워 외국인을 차별하지만, 네덜란드인은 누구에게나 관용을 베풀며 차별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장애인도 섹스할 권리가 있다며, 그들에게 섹스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할까.

 

 김신홍도 그렇겠지만, 나조차 네덜란드에 관한 책 한 권만으로 이리도 네덜란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다름아닌 그 다양성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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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살림지식총서 4
김형인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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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us가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에 대해 명확히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나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며, 성서를 모르며, 인간을 모르는 탓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다른 해석을 하는 이가 있으니, 저자 김형인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이 책은 노예제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과정까지, 그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론과 그 근거까지 설명하고 있다. 미국 노예제의 찬성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지속하려 했는가. 혹은 반대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피고자 하는 것들은, 노예제도의 기술하고 난 후 보여준다.

 

 현재에는 대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한다. 더불어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라 여기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200년 전쯤의 일이다. 200여년 이전에는 인간에게 계층이 있고, 따라서 인간들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또한 인간은 그것에 익숙했다. 서양에서 휴머니테리어니즘(humanitarianism), 즉 박애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20년대부터였으며, 약 반 세기 후 인간 사이에 평등한 동포애를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노예들의 처우개선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단체가 영국의 동물보호협회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노예들은 동물보다 저급하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대인들이 얼마나 노예에 대해 무관심했으면, 동물보호협회에서 노예들의 처우개선에 대해 논했을까. 얼마 전, 일데폰소 팔꼬네스의 <바다의 성당>을 읽으며, 노예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에서는 그들의 삶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짐승만도 못하다 여겨졌던 노예들에 대한 처우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욱 가혹했던 것은 다름아닌 기독교인이었다.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그들을 부려먹는 것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보고 그에 근거한 해석을 한 것이었기에 실효성을 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함의 저주를 보면,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또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라는 부분, 레위기의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라는 부분도 그들에게 근거를 뒷받침한다. 더욱 지독한 것은 베드로 전서이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다면, 노예는 당연히 있어야할 것이었다는 말이다.

 

 노예제 반대론자 또한 성서를 인용하기는 매한가지다. 마태복음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부분이 있고, 출애굽기를 보면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노예제를 반대할 근거로 삼는다. 더불어 사도행전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우리가 그의 소생이니라'라는 부분을 인용하며, 모든 인간은 한 혈통이므로 형제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데, 사실 이는 찬성론자들이 성서에서 인용한 부분에 비하면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찬성론자들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란 백인들만은 지칭하는 것이며, 흑인들은 애초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자로써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서를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면, 찬성론자들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 이하의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주인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누군가 노예를 죽이더라도 그것은 살해가 아니라 노예의 주인이 가진 재산의 손실로 여겨져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날 뿐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형성하고, 지키기 위해 노예가 필요했다. 따라서 노예들을 노예로써 유지하도록 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으며, 그것을 성서에서 찾았으며, 법적 근거에서 찾았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백인들에게 우월한 텍스트를 찾기에 앞장서, 백인 노예들을 풀어주며, 자유 흑인까지도 노예 흑인으로 만들며 그들의 이익을 지켰다. 처음에는 백인과 흑인 모두 노예가 있었으나 결국 흑인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흑인=노예'라는 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결국 법 테두리내에서 자유 흑인조차 노예 흑인으로 만들 방법을 고안해 냈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말씀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보는 성경무오설에 따라 노예제를 찬성하게 되는데,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의 형성에 대해서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노예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근본주의가 더욱 더 박차를 가한 것인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노예제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중 그 누가 야누스인지 알아낼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두가지에 대해 정확히 구분할 입장도 되지 못할 뿐더러,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며, 기독교가 아닌 다른 그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다. 즉, 신을 향한 절대적 믿음보다 인간의 상대적 이성에 호소하고 싶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가 잘못되었듯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잘못되었든, 그 구분을 정확히 가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것을 비도덕적으로 분간하는 기준은 인간에 의한 탓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둘의 상관관계가 매우 짙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며, 따라서 그 모두가 인류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당위적인 것이리라 확신한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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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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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미국 노예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다의 성당은 스페인이 배경이지만, 일단 노예제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욱 더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책에서는 성서에 관련하여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자들조차 노예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게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염려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다.

 

 당시 계급사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과 계급에서 오는 차별, 고난 등을 <바다의 성당>에서는 아주 자세히 보여준다. 특히 첫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노예의 초야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이는 실로 그 시대의 악습에 대한 적나라한 시선을 담고 있다.

 

 <바다의 성당>에서 보여주는 시대보다 더 오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주민들은 초야권에 대한 반발심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전에 알고 있었다. 책의 시대적 배경으로 가면, 서서히 노예와 영주민들의 반발, 의식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노예에 대한 처우 개선 과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아버지 베르나뜨는 한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아들 아르나우를 데리고 영지를 도망친 것이다.

 

 책은 아들 아르나우가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사회적 변화, 그 격동 속에서 거쳐야 했던 괴로움과 사랑 등을 담고 있다. 아르나우는 수많은 난관을 딛어야 했지만, 결국 역경 속에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극적인 전개 과정은 실로 작위적이라 할만큼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며,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가해가 안타까웠다. 더불어 절제성이라고는 눈꼽만치 찾아 볼 수 없는 전개와 묘사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할 수 있으리라.

 

 근래에 팩션을 읽을 기회가 많았는데, 나에게 가장 맞지 않았던 책이 아닐까 한다. 상하권을 합쳐 약 9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지리한 전개라던가 불가상성한 연결고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독자인 내가 충실한 책읽기를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일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느슨한 텐션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하는 바다.

 

 허나 중세 계급 사회에 대한 허와 실에 대해 잘 짚어 나가고 있다는 점,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는 점,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뚜렷했다는 점, 민중의 애환을 여과없이 잘 드러냈다는 점 등은 <바다의 성당>의 강점으로 거론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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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문답 - 東湖問答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0
이이 지음, 안외순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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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얇은 책 한 권에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에 감탄을 토로하고자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알아 본 적도 없다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국폐國幣에 초상화가 새겨질 정도의 훌륭한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소홀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선조에게 바치는 '마음'이다. 율곡은 일평생을 선조가 왕도정치를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많은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는 그를 멀리했다.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선조로서는 당시 등장한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야 했으며, 그 까닭에 의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조차 투옥되고 사형의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왕의 세력이 약화된 때에 너무 강한 지지 기반을 가진 자가 생겨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정도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로서는 율곡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게 왕도정치를 실현토록 하기 위해 충정을 다하였지만, 선조는 그것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율곡에게 집중시켜 주어야 하고 그를 지지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곡의 성품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율곡 스스로는 아무리 충정을 다하여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의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런저런 요인으로 인해 율곡은 선조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사망 직전에는 높은 관직을 받고, 선조가 그를 신임하였기 때문에 자칫 선조의 애정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하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선조는 탕평을 위해 이 무리 저 무리를 번갈아 신임했던 까탈스러운 인물이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곡을 멀리하기만 했다. 다만 율곡의 노후에 그를 신임하여 곁에 두려고 높은 관직을 주었으나, 율곡이 이미 늙어 정사를 논하기 힘들어진 탓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율곡과 선조의 관계는 묘했다. 율곡은 선조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흠모하며 성군이 되시리라 하고 기대하였다. 허나 선조는, 이미 언급했듯이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율곡은 그런 선조를 두고, 처음과 달리 세속에 물들었다며 비판했다. 율곡은 선조의 눈에 들기 위해 간언을 올리지 않았으며,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선조를 보고, 있는 그대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으며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호문답>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그를 성군이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조의 형식적인 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더불어 좋은 신하를 등용해야 한다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임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허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쓴 말은 내뱉고 싶어지는 법이다. 선조는 점점 율곡을 멀리하고, 율곡 또한 더욱 더 과격한 언사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결국 율곡은 그런  출사와 퇴사를 반복한다. 마침내 율곡은 참지 못하고, 경연 석상에서 맹자가 제 선왕에게 했던 질문을 선조에게 그대로 던졌다 한다.

- 지금 민생이 곤궁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온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함이 심한데 가령 맹자가 주상께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는다면 주상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허나 선조는 대답하지 않았고, 율곡은 선조를 포기한다. 정녕 선조가 왕도정치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하는 한탄과 함께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훗날 선조가 그를 신임하지만, 율곡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중에 있었다. 율곡의 정치 사상은 매우 훌륭하고 또렷했지만, 그것을 이룰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율곡은 정치인이기보다 문학자로서 명성을 더 높이 날린다. 

 그는 왕도정치를 행하기 위한 첫번째 방안으로서 입지를, 두번째 방안으로서 무실을 주장하는데 그 부분은 [제 7장 무실務實이 수기修己의 요체임을 논하다]에 잘 드러나 있다. 율곡은 주상(선조)이 '입지志보다 앞서는 것이 없지요.'라고 말한다. 더불어 궁리진성窮理盡性, 신민新民, 형우과처刑于寡妻, 모자토계茅茨土階, 박시제중博施濟衆, 수명예악修明樂이라는 여섯가지를 입지의 세부 항목으로 든다. 즉,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며, 백성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만들며, 아내에게 모범이 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며,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며, 예악을 닦아 밝히라는 것이다. 더불어 힘써 실천하라는 뜻의 무실을 한다면 선조는 반드시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즉 선조가 왕도정치를 행할 뜻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기에 있는 힘을 다한다면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또  좋은 신하를 적재적소에 임용할 것과 충신과 간신을 가려 상벌을 뚜렷이 할 것, 안민정책을 펼칠 것, 교육 정책을 개선할 것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안민정책에 관해서는 과세 제도와 공물 제도의 개선, 공물 대납을 통해 이방들의 횡포 금지, 각 지방마다 다른 부역을 균형잡히게 나눌 것과 가렴주구 근절 등의 상세한 사항방법까지 하나하나 제시한다.

 위에서 본 것과 율곡은 선조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는데, 나 또한 선조와 율곡 모두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냥 한 쪽만을 손들어 주기에는 둘 다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되는 탓이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과연 유교가 그리도 폄하해야 할 대상인가. 나로서는 아직 지식이 짧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겠다. 더군다나 <동호문답>에 등장하는 율곡의 유교적인 가르침은 너무나 미화되어 있어, 이것이 제대로 실천된다면 정말 안민한 세상이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탓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한다. 율곡의 가르침처럼 각종 제도의 개혁과 가렴주구의 근절 등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만 속세에 물들어, 그것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짧은 지식이라고 하나 장유유서長幼有序, 남존여비男尊 사상 등이 유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난 뒤에 논하는 것이 옳으리라 여기는 까닭이다. 또한, 어떤 이념이든 깊숙한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수긍할만한 논리들로 가득차 있지 않던가. 물론 폐단 또한 어디에나 산재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의 본질을 훼손하고 그릇된 목적에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폐단을 시정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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