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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은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영화였습니다. 이렇게 문학적인 작품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에로스를 기대하고 본 영화인데, 오히려 기대했던 에로스 측면보다 예상 외로 뛰어난 감성과 현대 문학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게 원작 소설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박범신 작가의 원작 소설 '은교'를 펼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시인의 이야기에 걸맞는 감수성 넘치는 문장과 그 표현력! 시에서나 등장할법한 시적 허용과 생동감 넘치는 글귀는 읽기만 해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보지 않고도, 본다.'라는 모순적이지만 아름다운 문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넘치는 감수성과, 중간중간 상황 묘사에 맞는 명시들을 등장시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욱 세세하게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글솜씨에 감탄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느낌보다는 마치 한편의 긴 시를 낭독하는 듯 했습니다.
첫인상에서는 시의 아름다움과 고루함을 함께 느꼈지만 소설적인 재미가 없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 이적요가 은교를 만나는 시점부터 제자인 서지우와의 갈등이 진행되는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었던 영화와 다르게, 이적요 시인의 사후 1년. 절친한 친구이자 변호사인 Q변호사에 의해 공개된 그의 노트에 적혀있는 "내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글귀와 진행되는 과거 묘사가 흥미진진함을 더합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Q변호사의 시각으로 이적요 시인의 사후 '은교'와 그 주변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는 장면이 오히려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은교라는 제목처럼 일흔이 다 되어가는 시인 이적요와 은교, 그리고 제자의 삼각 관계와 사제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이지만, 모두 읽고나니 '한은교'는 시인 이적요와 제자인 서지우의 관계를 그리기 위한 아름다운 소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스토리를 수정하여 서지우를 악독하게 그려내고 질투와 정염을 강렬하게 그려낸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은교'와의 관계나 성적인 장면은 그리 중요하게 묘사되지 않고, 제자인 서지우 역시 그리 악독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
나는 학교를 이어갈 수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트럭운전사의 조수로 들어가 단지 먹고살기 위한 온갖 노동에 내 젊음을 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게 나의 열입곱이다.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굶주림과 오욕으로 가득 찬 나의 열일곱 기억들을 네게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시인 이적요는 친했던 지인들에게 배신당해 감옥에서 10년을 갇혀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보냈습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D를 떠올리면 매번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의 폭력은 안돼!"" 그 말은 결국 세상을 가로질러온 나의 나침반이 됐고, 내 평생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됐다.'라는 문장 등에서 드러나듯 첫사랑인 D에게서 시발점이 된 그의 이데올로기가 감옥살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험난한 인생을 보여주듯 시인 이적요는 한은교에게 쓰는 편지에서 "너와 나의 열일곱은 너무나 다르다."는 가슴 아픈 문장으로 보여줍니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없다고.
그리고 글 전체에서 작가는 시인 이적요의 입을 통하여 '늙음'의 서러움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시인 이적요는 한은교를 만나게 됩니다. 특출나게 아름답게 생긴것도, 매력적인 것도 아니지만 시인 이적요는 한은교의 '젊음'에 반하게 되고, 그 '젊음'을 접하며 자신도 젊어진 듯 열정을 느끼고, '젊음'을 질투하기도 합니다.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실로 심금을 울립니다.
"난 장르문학이라는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우리 문학판 너무 협소하고 못돼먹었어. 양반 상놈을 아직도 가르려는 패거리가 많은 게 이 동네거든."
이 책을 읽으면서 또 감탄스러웠던 부분은 시인 이적요와 제자인 서지우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그 속에서 현대 우리 문학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직접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입니다. 장르문학을 주로 읽어왔던 저로서는 위와 같은 문장에서 너무나 큰 놀라움과 공감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장르문학을 너무나 천시하는 경향이 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장르문학 시장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북스토어를 보면 항상 똑같은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치 시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고루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품에서 지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인 이적요의 속내를 통하여 권위와 명예,체면만을 중시하는 우리 문학판을 속이고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분이 대단히 인상깊었습니다.
이 소설을 뭐라 평가해야 할까요. 이 소설은 한 편의 연애소설이기도 하며, 현대 사회를 그리며 세대간의 고충과 '늙음',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그린 사회소설이기도 하고, 과거 현대사와 이데올로기를 시인 이적요의 모습을 통해 말하는 역사소설이기도 하며, 스승과 제자가 얽힌 사건과 사제관계를 깊은 내면을 통해 묘사하는 휴먼 드라마, 그리고 우리 문학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글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생각할 점이 많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재미를 느낀 책입니다. 과연 단순히 엔터테인먼트한 재미만을 위해 읽으시는 분들께는 약간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 '늙지' 못한 저로서는 이 소설의 깊은 맛을 모두 느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