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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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알려진 노자 주해서가 수백여 종이나 되고, 국내에서 번역되거나 직접 주해된 서적도 수십여 종이 되는 건, 노자라는 서물 내용 자체가 어쩌면 시와 같기도 하고, 주해자 자신들의 삶과 경험이 제각각이기에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태도도 제각각이어서, 다른 주해자들의 설명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느끼는 각각의 저자들이, 자기만이 파악했다고 느끼는 내용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이런 결과는, 노자가 주장하듯 의 특성 자체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변화생성인데다, 주해서를 쓰는데 사용되는 언어 자체가 가명영역이기에, 개념 차원의 주해서에는 어짜피 상도’ ‘상명과는 거리가 먼 가도지도’ ‘가명지명만을 담을 수 밖에 없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저자는 이전에 노자 주해서를 출간한 바 있는데도 이번에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주해서를 출간하였다. 많은 주해자들이 번자 수준의 주해를 하는데 반해서, 저자는 평소에 다른 주해자들이 놓치는 부분까지도 세밀한 관점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많은 학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으로 여겨지기에, 칠순이 넘은 저자의 학인으로서의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견강부회로 여겨지는 담론들이 다수 있지만, 도덕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라고 여기고 보면 또 그렇게도 여겨진다.

- 다만, 전체 81(500)에 이르는 책에서, 1장에만 거의 90쪽을 할애하며 주로 에 대한 담론을 펼치면서, ”명과 짝을 이루는 지고의 개념은 도가 아니고 상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도덕경은 도와 덕을 말하는 경전이 아니요, 상을 말하는 경전인 것이다(p. 49, 네째 문단)라고 까지 언급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만 졸견을 제시코자 한다.

- 저자는 특히 초원을 언급하며 그가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하나, 그가 상도’ ‘상명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언급한 내용은 왕래무궁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인이나 바보나 다 같이 말미암을 수 있고, 만고에 오래오래 지속되어 폐할 수 없는뿐으로 (p. 52), 지금까지 많은 주석자들이 설명하는 의 특성과 다를 게 거의 없는 것으로 읽혀진다. 또한,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에 관한 구체적 내용으로는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p.24)뿐이고, 이것들 역시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위의 주장이 지나치게 여겨진다. 왕필도 이미 返化終始 不失其常이라 한 바 있으니(p. 256, 아래 둘째 문단), 저자나 초원이 주장하는 모든 게 이미 여기에 다 들어있다. 또한 도법자연이라고, ‘의 특성이 바로 자연의 특성이기에,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미 사시사철에 매우 익숙하고 세상의 변화를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 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 가 아니라면, 1장에 수록된 많은 표들과 일관성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도덕경 속 담론 전체가 이 전의 대부분 주해서들이 언급한 의미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릴 것이다. ‘상도’ ‘상명에서 보다시피, ‘만이 아니라 에도 적용되는 개념으로서, ‘의 수식어지 와 일치하거나 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는 아마도 저자가, 형용할 수 없는 대신에 언어적 표상을 제공하는 의 특성을 더 잘 표상한다 여겨, ‘으로 대체 가능하다 여긴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을 완전히 영구불변하다고 여기는 서양식 사고와, ’상도‘(저자가 도덕경의 핵심 키워드이라고 이해하는)를 거의 번자 수준으로 주해하는 다른 주석자들의 미흡함을 염려한 때문에, 좀 과한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짐작된다.

아울러, 저자가 개념을 부연 설명하면서,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을 거쳐서 산은 산이라는 대긍정에 도달한 여여(如如)의 경지(p. 27, 넷째 문단) ’이문일심등의 개념들을 언급하면서도(p. 65, 넷째 문단),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이나 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개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매우 아쉽다.

- ‘항상 그러한이나 여여한이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건 바로, ‘그러하지 않은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저자가 든 예를 이용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산은, ‘그 산이 항상 그 산으로 명확하기에, ‘산은 산이다(A=A)’(I)라는 명제는 가도지도수준의 명제로서, 평소 우리 눈에 사계절 변화(생사)를 보이며 명쾌하게 이해되는 유와 명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다고만 생각했던 그 산이 언젠가 다르게 보일 때 (내가 알던 그 산이 이 산이 아닐 때; 산의 모습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걸 알게 될 때),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라는 무와 도의 영역에서의 명제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산이 아무리 무한한 다른 이름과 모양을 가져도, 그 산은 여전히 여기 이대로() 있는 이 산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결국 산은 산이다(A=A)’(III). 노자는 철두철미 지금 여기 생생한 현실만을 얘기하지, 결코 초월적 관념을 얘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설명하고자 했던 여전히 그러한, ‘그렇지 않지만(not A)’을 품고 있는, ‘산은 산이 아니다(A=not A)’(II) ‘를 통과한, ’여전히 그러한이고, 그래서 새로운 명제 산은 산이다(A=A)’(III)가 바로 상도의 경지다. 처음의 산은 산이다’(I)라는 명제와 마지막 명제 산은 산이다’(III)가 같아 보이지만, 마지막 산은 산이다는 처음과 달리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를 품고 있다는 게 양자의 차이다. 그 점이 바로 가도지도상도의 차이이고, 이래야 저자가 설명하려는 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게 바로 저자가 그리도 찬탄한 수운의 불연기연그러하지 아니함은 그러그러함이다’(p. 55-56)이리라 짐작된다.

- 저자는 수운이 동학을 창시했다는 점에 착안한 듯, ‘불연서학이라 단정하지만(p. 55, 세째 문단), 저자가 주장하는 측면에서라면, ‘서학불연에 끼어들 틈조차 없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동학교도들에게 수운의 불연인식할 수 없는 현상 너머, ‘기연현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불연기연은 양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불연가도지도를 넘어선 상태로서, 최종적으로는 기연(상도, 상명)과 하나로 되어야 하지만, 일단은 지향해야 할 상태다. ‘서학은 이런 불연개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극단적 명가명상태로서, 지양해야만 할 체계일 뿐이다. ‘A=not A, hence still A=A’라는 개념이 서양에는 없다. 단지 헛소리이고 모순일 뿐이다.

- 대부분 주석자들이 常名참다운 이름이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가는데, 아마도 은 규정되고 고정된 개념이어서 , 의 변화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저자는 常名에 대해서도 분석의 확대경을 들이대는데(p. 32, 셋째 문단), 바로 이런 점들이 저자의 치열한 학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런데 저자는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와는 달리, 명료한 뜻을 전달하지 않고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토톨로지처럼 들린다고 언급하는데, 아마 그 이유는 저자가 다른 주석자들처럼 을 부동하는 와 달리 고정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명은 방편이기에 고착적 성격이 있고, 상은 여여이기에 유동적이다고 하면서도(p. 50, 둘째 문단), p. 51의 표에는 상도상명유동 생성의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표시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저자가 상명과 상반되는 가명지도로만 여기고 있다면 이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설마 이리 여기고 있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상명은 유동 생성 특성을 지니는 게 맞다!

- ‘는 직접 언급할 수 없기에 을 통해 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은 상호 침투하는 대대(對待)’의 관계성에서만 유지 된다는 걸, 저자 스스로 계속해서 강조하면서도 이를 놓치고 있다. 노자에 따르면 만물이 유동하는데 이라고 유동하지 않겠는가. ‘명가명 비상명도가도 비상도처럼만 해석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름이름지으면에서, 앞뒤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의 이름상명이고 뒤의 이름은 가명이어서 전연 동어반복이 아니다. 앞의 이름(상명)이름!’이라고 말하는 순간, 규정되지 않고 무한히 생생약동하던 상명의 의미가, 언어가 지니는 제한성에 의해 총체성을 상실하고 왜곡된 의미만을 지니게 축소되어, 원래의 이름(상명)은 단순한 이름(가명)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에서 언어를 그토록 기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만, 결코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선불교에서는 禪語라는 독특한 화법을 개발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산은 산이다(A=A)(I)’가명이고, ‘산은 산이다(A=A)(III)’상명이다. IIII 모두 언어로 표현된 명제지만, 명제 III은 이미 언어를 넘어 서 있다. 선에서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말을 뛰어넘으려 한다. 가명을 손가락으로 이용하여 상명이라는 달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똥막대기!’라고 선언하는 선사의 답변에 제자가 놀라는 이유는, 제자의 눈에 똥막대기더러운 똥막대기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사의 눈에 비치는 똥막대기는, 우주 전체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자신의 실상을 한점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찬란하고 당당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부처다.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에서 쓰레기가 아닌 한때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하던 존재를 보는 시인의 눈은, 그 순간 부처의 눈과 다르지 않다.

- 1장 처음 두 절의 명제 구조 즉, ‘가도지도 상도가 아니다라는 형식 구조는 ’A X가 아니다는 구조로서, 어쩌면 부정신학적 명제나 ‘Neti Neti’ 담론 혹은 아포하 담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유한한 이성과 개념 영역의 A를 아무리 바꿔도 무한을 품은 기호 X와 같아질 수 없기에, X를 포착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때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구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단지 신의 응답을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노자는 1장에서 우리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고는, 친절하게도 2장 이하에서 다양하게 의 특성들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재촉한다. 선불교의 화두도 철저히 적극적이고 독창적으로 학인을 자극하는 방법론이다.

- 노자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만을 보고 이 곧 인줄 아나(A=A), 우리가 실제 방으로 사용하는 건 이 아닌 빈 공간이라며, 벽 자체가 방은 아니라고 가르친다(A=not A). 그런데, 공간을 남기지 않고 벽만 쌓아도 방이 생기지 않지만, 벽이 없어도 방은 생기지 않는다. 즉 벽과 공간이 함께 있어야 이 생기니, 벽을 볼 때 공간(눈에 보이지 않는!)을 함께 보라는 얘기다. 그러면 우리 눈에는 여전히 벽만 보일지라도(A=A) 공간이 함께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생 모습에서 여래를 보고, 여래 모습에서 중생을 보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렵게 노력하여 깨달았다고 해서, 두 번째 경지인 산이 산이 아니다만을 고집하고, 계속해서 산은 산이다를 거부하는 게 바로 공에 집착하는 거라며, 불가에서는 이를 경계한다. 선사는 똥막대기를 여전히 그렇게 해우소에서 똥막대기로 사용할 뿐, 법당에 고이 모셔두지 않는다또다시 산은 산(III)’임을 보고 저자 거리로 돌아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여전히 그 사람으로 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속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이게 화광동진(和光同塵)’이자 시은(市隱)’이며 입전수수(入廛垂手)’. 진여문을 통과한 생멸문이기에, 진여 즉 생멸이고 이문일심이다. 이즈스 도시히코는 이를 분절을 품은 무분절이라 부른다. 저자가 언급한 바대로, 중국의 사유에서 노 유 불은 혼재한다.

- 사족(많이 주저하다가 쓴다): 전에도 그랬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도 내 해석이 맞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인정한다! 저자의 박식함은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나는 모른다고 주장하여 신탁에의해 아테네 제일의 현자라고 선포되었고, 공자도 나는 아는 게 없다고 선언하였으며(저자가 주석한 논어에서), 석가모니는 아는 게 없기에 안다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저자가 주석한 금강경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조차 광장에서 사람들이 들리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저자가 강해한 도마복음에서).

언젠가 어느 한옥마을에서 처마 밑에 시은이라 새긴 현판을 본 적이 있다. 주인장은 자신이 산이 산이 아닌지점을 지나왔노라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시은을 현판에 새기는 그 순간, ‘시은은 언어 너머로 시현(市顯)’을 가리킨다는 걸 주인장은 미처 몰랐을게다. 공자는 이런 행위를 사이비 군자인 향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맹렬히 비난한다. 누군가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겸손하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명제가 참인가의 여부는, 나의 믿음이나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명제현실 속에서 실천되는 내 삶의 정합성 여부에 의해 저절로 드러난다.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인문학적 명제도 이런 식으로 참/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다른 저서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도덕경에서만은 後其身’, ‘我獨昏昏’, ‘不自見’, ‘不自是‘, ‘不自伐‘, ‘不自矜하면 좋으련만! 아호를 스스로 도올이라 할 정도면, 어릴 적 짱구트라우마 정도는 이제 훌훌 털어내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칠순 넘도록 그 무거운 을 짊어지고 있는 저자가 너무 안타깝다. 앞으로도 강녕하여 좋은 책 많이 소개시켜 주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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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95 2020-11-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대가리가 스스로 짱돌이라 말하니 어찌 상돌있수 있으랴!
 
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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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적 인덱스적 표상으로, ‘상징적 표상인 언어와 개념너머의 의미와 사고를 가능케하고; ‘구성적인 부재로서의 무죽은 자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으며; ‘기호와 형식의 임시 거처로서의 자기에 의해, 생성과 현상으로서의 자기를 이해할 수 있고; ‘기호작용으로서의 생명개념으로, 일체 유기체들과의 연계성을 느낄 수 있으며; ‘목적이 세계외부 어딘가에 있는게 아니라 세계 내부에서 끊임없이 번성하는 생명 영역에 본래적인 것이기에, 실존적 소외와 무의미를 고민할 필요가 없슴을; ‘자신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명사 대신에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대명사’ ‘이것에 의해, 지금 여기(오직 이것! 이것!)현존할 수 있슴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하여 너무나 인간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듯.

역자는 존재론적 전회를 이끄는 저서라고 하나, 내게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전회를 이끄는 저서이지 싶다. 관념 철학(이들은 육체를 결여하고 을 떠나 있다)을 극복한 현상학과 몸철학(이들은 아직 편재하는 패턴을 결여하고 개인의 살에 갇혀있다)을 넘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정표일 듯!

중문의 문장이 많은데도 매끄럽게 읽히는건, 역자가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해준 역자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오자 및 번역 문장 몇 개

- p. 25, 셋째 문단: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재규어를 표상하는 방식(a)재규어가 인간을 표상하는 방식(b)하나의 단일하고 열려 있는 이야기의 상호 교환될 수 없는 구성 요소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원문(p. 9, 넷째 문단) “~~, in which how humans represent jaguars and how jaguars represent humans can be understood as integral, though not interchangeable, parts of a single, open-ended story” 부분.

번역 문장은 ab의 차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유사성은 무시해버리는 느낌이 강해서 원문과는 너무 다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를;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재규어를 표상하는 방식과 재규어가 인간을 표상하는 방식을, 상호 교환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단일하고 열려 있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도면 어떨지.

- p. 40, 첫째 문단:

우리 앞에는 자신과 서로에 대해 자기이기를 멈추는 수많은 길 들이 놓여 있다”: 원문(p. 18, 둘째 문단) “There are many ways in which we cease being selves to ourselves and to each other.” 번역문은 우리자신서로에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서로에는 이미 우리우리 자신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의미가 모호하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또한 서로 간에 자기이기를 멈추는 수많은 길 들이 놓여 있다정도로 하면 어떨지.

- p. 82, 첫째 문단: “~~ -상징적 사고는 더 넓은 기호적 장으로부터 창발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 원문(p. 43, 둘째 문단) “ ~~ symbolic thought has to jump out of the broader semiotic field from it emerges, separating us, in the process, ~~”부분;

상징적 사고뿐만 아니라 아이콘적 인덱스적 사고들도 모두 그들을 품는 더 넓은 기호의 장으로부터 창발하는데, ’너무나 인간적인 상징적 사고는 아이콘적 인덱스적 사고들과는 다른 특질을 지니기에, 저자는 상징적 사고가 그것에서 창발한 공동의 장으로부터 또 한번 jump out‘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위 문장은 “~~ -상징적 사고는 그것이 창발하는 더 넓은 기호적 장으로부터 솟아오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 정도로 하면 어떨지.

- p. 108, 둘째 문단의 자체의 본질”; 원문(p. 58, 넷째 문단) “own suchness”;

본질, 저자가 극복하고자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관념철학( 인류학)의 존재론에서나 이용되는 용어로서, 저자가 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suchness’ 대신에 ‘essence’를 썼을 것 같다. ‘suchness는 원래 서구권에는 없던 기념이기에 영어에 없던 단어로서, 불교의 tathata’에 해당하는 개념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저자는 이미 책에서 노자를 언급하며 쓸모 없슴의 쓸모’ ‘무위의 위등의 개념도 차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대신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여여성(如如性)’으로 하면 어떨지...‘여여성은 궂이 의도하지는 않지만 이미 일체의 가능성(가능태로서의 여래장)을 지닌 채, 더 보태거나 뺄 것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충만한 모습(현실태:tathata)을 지닌 상태로서, 저자의 의도에도 더 부합할 듯하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어설픈 신조어를 전연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어휘들만을 사용하면서도, 우리에게 언어 너머의 것을 친절하게 지시해준다.

p. 154, 첫째 문단, ”양극단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떻게 서로를 알 수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해 수렴된다“; 원문(p. 86, 아래 첫줄) ”These poles are taken to define how beings can relate to and know each other“ ----> ”장대들은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떻게 서로를 알 수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해 이용된다“. ‘poles’은 해당 문장 앞부분에 있는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하는 허들을 뛰어넘는데 사용되는 도구이고, 문단 중에 있는 벌레의 눈이 바로 그 역할을 하는 장대다.

- p. 167, 세부 절 제목(원본 p. 95~96):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 ---> ‘관점주의’, ‘퍼스펙티브적’(perspectival) ---> ‘관점주의적

관점주의라는 용어는 니체가 직접 사용하진 않았지만, 니체가 인식론적 사상을 전개하며 서양에서는 최초로 이용한 사유 방식을 일컷는 용어로서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임

- p. 239, 아래 여덟째 줄: 궁지 ----> 긍지

- p. 382, 아래 여섯째 줄: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것(A), 고로 숲이 생각한다(B)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

고로라는 단어는 통상, 뒤에 있는 단어 혹은 명제에 상응하는, 동류의 단어 혹은 명제가 앞에 대응할 때 사용된다. 때문에 위 문장은 단순한 명사(A)에 술어명제(B)가 대응하게 되어 맥락이 어색하다. 원문 “Chapter2, ”The Living Thought“, sought to unpack the claim that lives, and hence forests, think.”(원본 p. 234, 세 번째 문단)에서는, ‘forests’ 뒤에 또 한번 쉼표를 찍어 ‘hence’ 앞뒤에 정확히 명사 ‘lives’‘forests’를 대응시키고 있다.

고로!! 위 문장은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것이, 고로 숲이, 생각한다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 혹은

‘2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생명체로서의 숲이 생각한다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했다정도면 어떨지,

- 전문 번역가도 아닌 주제에 죄송합니다. 그저 옥에 티 일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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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어드 2022-01-0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능력자시군요. 책 읽고나서 원서와 대조하면서 검토해보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가철학, 감정으로 이성을 말하다 중국철학총서 3
몽배원 지음, 주광호.임병식.홍린 옮김 / 예문서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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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계에서 이성에 비하여 거의 방치되어있던 감정이 유학 이론의 핵심적 주제였다는 주장을, 주로 송명대 유학자들의 주장을 빌어 전개하며, 감정과 이성 및 성리, 욕망, 의지, 지식 등의 관계와 통합성을 분석하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시도가 재미있고 참신하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속에 유사한 주장들이 반복되는 까닭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주로 사변적 개념인 성, , 리만을 주된 핵심어로하고, 구체적 논거로는 자연계의 생의지(생생지리) 하나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변주하며 이용하기 때문에, 논리가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 p. 42, 위 열한째 줄부터 p. 43 위 열한째 줄까지의(2) ”인문주의 ~볼 수 있다는 문장은, p.45 아래 아홉째 줄부터 p. 46 아래 아홉째 줄까지의 문장(3)과 완전히 중복된다. 거의 한 쪽에 가까운 동일한 문장이, 연속되는 것도 아니고 상이한 절에 수록되어 있는건, 5년간의 번역작업이라는 언급을 무색하게 하는 실수다. 문맥상으로는 아마 2절보다는 3절에 있어야 할 문장이다.

- p. 118, 아래의 하이데거 인용문 중의 첫 단어 양지, 하이데거가 전습록을 읽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이 책에서 양지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부적절한 용어다. 양지는 매우 복잡한 개념이기에, 그에 해당하는 독일어가 있을 리가 없다. 저자가 참고한 중국어 번역본에 양지라고 되어있었다 해도, 저자는 독일어 원어를 언급하고 양지를 그대로 인용해야만 할 이유를 설명했어야 타당하다. 같은 쪽 아래 존재와 시간이라고 제목만 나와 있고, 해당 쪽수가 없는 점도 아쉽다.

- p. 138, 위 아홉째 줄, ”~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그들이 공부를 ~~ “: 주희와 왕수인의 논쟁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언급하는 문장인데, ‘시작할 것인가까지는 차이점이고 그 다음 부터는 유사점 이기에, ‘시작할 것인가바로 다음에 만이 차이점이고라는 문장이 추가되어야 맥락이 통한다.

- p. 140 위 둘째 줄: ”원시유학보다는 선진유학이 적절하다. 저자도 p. 176에서 선진유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 p. 171, 아래 문단; ”만일 을 드러남이나 현현으로 이해 한다면(A), 미발은 일종의 잠재적 존재 상태이고, 이것이 일단 한 번 발하면 희노애락의 감정 활동이 된다(B). 그러므로 드러남과 발동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명제 A는 같은 쪽 위의 문단 중 모종삼의 입장이며, 이때 당연히 미발이발은 본체와 현상의 관계이고, 이는 저자도 같은 문단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동일한 명제를 전제 하면서도 반대 결론을 내리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제 B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명제 B을 드러남이나 현현으로 이해하지 않고 발동으로 이해할 때에만 유도될 수 있는 명제다. A명제를 취한다면 B명제는 이것이 일단 한번 발하면 희노애락의 감정이 (새롭게) 발생한다정도가 되어야 한다. 미발 이발을 모두 다 감정상태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앞서고, 논리도 미흡하기 때문에 생긴 전형적인 오류이며, 이하 계속되는 주장들은 따라서 의미가 없다. 저자가 헛갈리고 있기 떄문에, p.173의 위 문단에서도 계속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희도 모종삼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걸 알 수 있다.

- p.173 위 셋째 줄의 아직 발하지 않음과 넷째 줄의 미발은 각각 아직 발동하지 않음미발현쯤으로 바뀌어야 맥락이 매끄럽다. ’발하지 않음미발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미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도로 미발을 사용하면 독자도 헷갈린다.

- p. 173, 위 열한 번째 줄; ”그러나 중용의 원래적 의미에서 보면(A) 발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B)에서처럼 모두 희노애락의 감정을 의미한다(C). ‘이란 바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음이란 의미이다(D). ~~ 미발 시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으며, 또한 저절로 자연스러워 지극히 적당하고 알맞은 것(E), 이것이 바로 중이다“:

명제 C는 명제 A(희노애락지미발)에 대해 모종삼이나 주희의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때만 유도될 수 있다. 또한, 명제 D는 저자가 무리하게 주장한 결과인데, 모든 문제를 야기한 원래 인용문인 중용 1장을 보면(p. 170) ‘절도에 맞는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중절(中節)’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가 명제 D에서 언급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음은 바로 중절(中節)에서 얻어낸 구절인데, ’은 미발 상태에서 사용되고 있고, ’중절은 이발상태의 찰식과 관련된 것으로,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모든게 명백한데 무리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명제 E 역시 발동으로 해석할 때에만 유효하다. ’현현으로 해석하면, 과하거나 부족할게 아예 없어 의미 없는 문장이 된다.

- p. 180, 아래 문단: ‘성자명출의 관점은 후대 유학 특히 송명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곽점초간이 발굴된게 1990년대 일이고 송명대 유학자들에게 곽점초간의 존재는 알려져있지 않았을 것이기에 무리한 주장이다. 거의 천 년 전의 선진 시대 사유를 다시 발견한 송명대 학자들의 학문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기록물 없이도 중국 사상계에 유사한 사유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 p. 195에 있는 인용문 전체 중에 여섯 번 언급되는 마음이라는 단어 중에, 열네 번째 줄 과 열다섯 번째 줄에 있는 마음을 쓰기지혜를 쓰기라고 바꾸어야 한다. 원문에 분명히 용지(用智)라고 되어있고, 역자도 용지를 지혜를 쓰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p. 202, 위 넷째 줄). 또한, 열아홉 번째 줄의 마음이는 아예 생략되어야 한다. 원문에도 이라는 단어가 없을 뿐 아니라, 없어도 문맥에 아무 문제가 없다. 마음()은 성정리와 함께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허투루 쓰면 글의 의미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전체 주장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대중을 상대로 한 저널리스트의 글과 달리 학인의 글은 엄밀함이 생명이다.

- p. 196 위 넷째 줄: ” ~~ 있는데, 이는 수행과 실천, 을 본체라고 본 것이다“: ‘정혜쌍수에 관한 부분인데, ‘수행이고 실천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는 수행과 실천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이는다음에 수행과 실천 중 수행을 체로라는 문장이 추가되어야 적절하다. 정혜쌍수를 언급한 무학의 혜능이 수 백년 후의 송대 최고 유학자들의 사유를 이미 선취했던게 아닌가 여겨진다. 이점 역시 유불을 불문하고 중국 사상계에 고유한 사유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중국불교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선불교의 토양이 선진유학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p. 242; 불가의 화두 부모미생전본래면목과 관련하여 주희가 언급한 감정도 없고 천리도 끊어버렸음과 저자가 언급한 불교의 허무맹랑한 말이나 부모의 생명에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으며 등의 담론은 기막히게 코믹하고, 주희는 한때 불학에 심취한 적도 있었기에 의아하기도 하다. 이 화두는 분절적 관계 속에 제한된 정체성을 탈피하여 무애한 정체성을 탐구하게 하기 위한 질문이다. ”‘누구인가에서 ”‘무엇인가, 다시 “’이것무엇인가(이뭐꼬?)”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진행될수록, 사회관계망 속에서의 자기가 자연계 속에서의 유기체로 확대된다. 그로 인하여 자기와 타자에 대한 시각이 유연해지고, 고정되고 분절된 자기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자기, 생성으로서의 자기를 찾게 하기 위한 질문이지, 인정이나 혈육 관계 등에 관한 담론과는 전연 관련이 없다. 굳이 생로병사까지를 언급할 거 없이 인간들의 고민은 대부분 고정된 자기 정체성(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에 기인한 인지오류의 결과이며, 그에 따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인식도 제한적이고 오류인 경우가 많다. 학벌과 직업, 혈연과 지연, 인종과 종교, 정치적 이념과 경제 상황 등 거의 모든게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관계망(인드라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고, 이것들에 의해 우리의 가치관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분절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많은 심적 물리적 갈등이 발생하는게 엄연한 현실이다. 주희는 할 수 없고, 저자라도 저 화두를 잡아보기를 권한다.

- 이밖에도 논리가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매우 아쉽다.

- 15감정 철학의 현대적 발전20세기 중반까지의 중국 철학사만을 주로 다루고 있어, 20세기 후반부터 쏟아져 나오는 감정에 관한 철학이나 인지심리 및 인지과학 분야의 최신 연구 결과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은, 저자가 아직 생존해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특히 감정이 인지에 의해 구성된다는 감정 구성주의와, 저자의 전공분야인 중용 2장과 4장에 나오는 시중(時中)과 지미(知味)는 맥락의로서의 장이론과 게슈탈트 및 요즘 핫한 알아차림과 관련된 개념이어서 감정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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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정동과 건강 - 감정의 자유를 통해 건강한 삶을 만들다
이상범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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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문장:

p. 54, 아래 여섯째 줄: “여기서 만약 힘이 근육량에 비례하는 것이라면, 힘의 증가를 대변하는 근육량~~ 의지를 자극하는 요소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문장은 상단 인용문 중의 근육의 느낌에 대한 저자의 소견인데, 근육량이 정동처럼 수시로 변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약간 코믹한(너무 나간; 근육에서 근육량으로) 문장으로 느껴진다.

p. 55, 위 열둘째 줄: “이렇듯 니체의 비철학적 해석은 생명체로서의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인 것이다”; 이 문장이 1880년대에 작성된 거라면 긍정할 수도 있겠으나, 몸철학이나 현상학 및 현상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의 담론으로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문장이다.

p. 56 아래 첫째 줄부터: “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한 작용일 뿐, 의지 자체에 대한 자극, 즉 명령일 수 없다”; 이 문장에서 수식어를 생략하고 간략히 하면, “의지(A)의지 자체에 대한 자극(B)일 수 없다는 명제가 되는데, BA와 같은 유개념이 아닌 게 너무나 명확하므로, AB가 다르다는 문장은 무의미하다.

p. 78, 인용문 아래 첫째 줄: ” ~~ 니체는 정동으로 대변되는 원한의 인간의 반동적 감정이 ~~“; 이 문장은 두 가지 정동 유형 중 특히 반동적 정동형 인간에 대한 언급이기에, ’정동으로앞에 반동적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야 적합하다.

p. 79, 아래 셋째 줄: ”~~ 보편적 삶의 진리(A) 아래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창조할(B) 수 없는 자 ~~“; 니체에 의하면 AB는 한 개인에게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 창조적 삶의 진리 아래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창조할 수 없는 자 ~~“ 쯤으로 바뀌어야 문맥이 분명하고 매끄러워진다.

- 그 밖에도 이런 부류의 어색한 문장이 1부에서만도 다수 보인다.

 

오류:

p. 57, 위 다섯째 줄: “ ~~, 정동을 만족시키는 누군가에 대한 ~~”; 니체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이 문장 속 단어 정동을 전제해서 이하 정동에 관한 담론이 계속되는데, 저자가 인용한 번역문(니체 전집 12)에는 분명히 정동이 아니라 격정이라고 되어있다(대부분의 인용문이 전집 번역문과 차이가 없기에, 번역문에 실수가 있어서 저자가 원문을 새로 번역하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요 개념으로 다루려 하는게 바로 정동이고 저자도 언급하듯이 정동과 격정은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므로, 니체의 원문 인용에 실수가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또한,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기존에 학회 논문집에 발표하였던 글이기에, 관련 학회의 논문 심사 체계 신뢰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다.

 

- 니체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명령하는 자복종하는 자의 역동적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능동적 삶을 위버멘쉬의 삶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명령하는 자의 전형적 삶을 사는 대표적 존재로 니체가 예를 든 사자는(짜라투스트라를 통해) 그 내부에서 명령하는자복종하는 자로 분열되지 않는다(사자의 마음을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지구상의 유기체들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신경증을 겪는 원인이 바로 내면의 분열 때문이라는 게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니체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병마와 신경증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며, 다양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가 모색하는 정동에 의한 창조적 건강은 니체식의 분열된 자아틀에 의해서는 실현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 했지만, 신이 오히려 니체는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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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9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박찬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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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까지의 유럽철학을 완성한 니체라고 추켜세우며 니체를 극복하고 참된 철학을 개척한다고 주장하나, 내게는 니체에 대한 실존적 현상학적 해석쯤으로 읽히는 또 다른 유럽철학 가설로 여겨진다. 견강부회하는 주장도 많으며, 계속해서 반복되는 곁가지 담론으로 인하여 요점이 희미해진다. 나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증가시키려는 듯한데, 니체의 저서를 읽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촌철살인적 경구에 의한 상쾌함과 신선한 맛은 전연 느낄 수 없고, 답답함과 텁텁한 맛만이 느껴진다. 마치 니체의 얼굴에 스프레이 낙서를 뿌려대는 악동처럼 굴곡진 삶을 산 강단 철학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

독일철학서 번역본으로는 드물게 깔끔하게 읽혀서 좋다.

 

오류:

p. 12, 제일 아래 줄: 프라이부르크의 브라이스가우(Freiburg im Breisgau) -->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

p. 121, 아래 여덟째 줄: ‘~~ 이것에서는 바로 상태와 같은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실 된다’. ‘바로상태사이에 특정 단어(관조? 자각?) 혹은 문장이 빠진 듯하니 검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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