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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역사
진중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p. 418 아래에서 넷째 줄: ”잘 정돈된 원근법적 공간은 기하학적 추상의 산물일 뿐, 실제로 우리의 육안에 비친 세계는 세잔의 그림처럼 혼란스러운 것이다.“
위의 밑줄 친(편의상) 문장은 ‘실제로 우리의 육안에 비친 세계는 혼란스럽고(A)’, ‘세잔의 그림(p. 417, ’부엌의 테이블‘)이 혼란스럽다(B)’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내게는 세잔의 그림이 별로 혼란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평소에 내 눈에 비친 세계 역시 시각적으로는 전연 혼란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A: 저자가 문제의 문장을 작성하는 전체 맥락에서, ‘세상의 모습’은 단지 시각적 모습을 의미할 뿐 정의와 도덕 등의 의미 측면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리라 믿기에, 명제 A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시 지각 체계는 망막에 거꾸로 맺히는 평면적 영상일지라도, 두뇌의 환상적인 작업에 의해 똑바로 선 입체적인 영상으로 보이게 하여 우리의 혼란스러움을 해소시킨다는 건 상식이기에 말이다.
B: 세잔의 그림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동시에 한 시점에서 관찰되는 형태가 아니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관찰되는 형태로 그려졌기에, 화가의 시선과 원근법이나 광선들까지를 고려하며 보는데 익숙한 전문가의 안목에는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으리라 짐작은 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림 속에 있는 과일이나 화병과 바구니들이 평소에 익숙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전연 혼란스럽지가 않다. 우리는 사진기 필름에 찍히는 영상처럼 세상을 보지 않고 의미의 틀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이 사진 속 영상처럼 일치하지 않아도 이미지가 주는 의미만 맞으면 그냥 자연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메를로퐁티가 말한 ‘체험된 원근법’의 의미일 것이며, 이점이 바로 후설이 ‘판단중지’를 언급한(p.413)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같은 생활세계 속의 일상 인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보던 대로 보기 때문에 세상의 실상(진리)을 놓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그림의 캡션에서(p. 417) ‘시각의 진정한 주체는 정신이 아니라 신체다’는 문장은 어쩌면 세잔의 관점을 놓친 것일 수도 있다(메를로퐁티 역시!). 정신없이 신체만으로 어찌 시각이 얻어지겠는가? 그저 정신에 대한 육체의 우월을 주장하는 전도된 또 하나의 정신 우월주의에 불과할 뿐.
저자가 언급한 후설의 에포케 관점과 연관되는 맥락에서라면, 세잔의 그림이 우리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의미는 어쩌면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월성’이 아니라, ‘사물(세상)에 대한 참모습(진리)은 단 하나의 관점에서 얻어질 수 없고, 다양한 관점을 종합해야만 한다’는 점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한쪽 면만을 고려해서 얻어진 견해는 괄호 쳐두라고! 저자의 표현대로 고정된 정신의 눈으로 고정된 세상을 보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육안으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생한 세상을 보라고(p. 432: ‘지금 여기 나 이 상황에 있다’고)!
오 탈자:
p. 18, 위에서 다섯째 줄: ‘medium theory이 등 고대 감각론의’
---> ‘medium theory 등 고대 감각론의’. ‘이’ 생략해야
p. 464, 위에서 다섯째 줄: ‘내가 속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들 수도 있을 겁니다’
---> ‘내가 속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생각이’ 추가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