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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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근거 없이 저자의 주관적 감상에 따른 해석으로 여겨질 수 있는 구절들이 다수 있으나, 종교 관련 서적이기에 타인의 믿음에 대한 언급은 적절치 않으므로 생략.

다만, 동시대 특정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저주에 가까운 언급을 하는 건(p. 183, 위 열 넷째 줄; p. 289, 아래 아홉째 줄 p. 363, 위 셋째 줄), 저자가 현재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대 학자요 어른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부적절해 보인다. 제한된 시공간 속 청중들에게 강연하는 경우에는 전체적인 맥락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그리 발언할 수도 있겠으나, 활자로 인쇄되는 출판물에 영구히 남기는 건 너무 가벼운 처사로 여겨진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아버지시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p. 362, 위 셋째 줄) 하지 않았던가. 증오가 증오를 낳고 저주가 저주를 낳기에 원수마저도 용서하라 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남남간, 남북간)이 모두 해소되고 화합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삼독이 내게서 멀리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게 바로 탐이고, 나와 다르다고 비난하는 게 바로 진이며,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바로 치다. 예수가 부르짖고 저자가 강조하는 인간들의 메타노이아(회심) 실현이 어려운 것은, 사람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인데(p. 219), 완악함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사람들이 나는 안다고 확신하고 과거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했으며(p. 329), 끝내 회심의 기적을 이루지 못한 제자들 모두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p. 583). 메타노이아는 어느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매 순간 영원히!) 끝없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위대한 스승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고 경계하는 게 아닌가 싶다(p. 339, 위 아홉째 줄). 정상에 도달했다고 방심하지 말라!

 

오 탈자:

p. 82, 위 첫째 줄: ‘되기 때문이다다음에 하지만 편집비평은이라는 문장이 추가되어야 함. 양식비평에 관한 설명 중에 아무런 언급 없이 편집비평에 관한 설명이 계속되기에 맥락이 혼란스럽다.

p. 265, 위 열째 줄: ‘양반의 자식 ---> ‘양반의 자식

p. 280, 위 세째 줄: ‘단지 씨뿌림에서’ ---> ‘씨뿌림에서’. 저자의 구어체식 글쓰기 습관때문에 바로 다음 문장에 씌여야할 단어가 참아지지 못하고 또 한번 미리 발화 되었다.

p. 315, 아래 네째 줄: ‘떠밀려 가듯이 떠밀려 가는’ ---> ‘떠밀려 가듯이 가는

p. 384, 아래 첫째 줄: ‘에미미’ --->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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