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 - 혜초, 천축 다섯 나라를 순례하다
혜초 지음, 지안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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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책이 무척 얇다. 그러나 쥐색표지에 원문으로 가득 매워진 책표지가 너무 멋지다. 보통 불교관련 책은 어렵고 두꺼운데 반해 이 책은 시집처럼 얇고 내용 또한 기행문이라 그런지 크게 어렵지 않다. 저자 혜초스님(704년-787년)은 신라시대에 태어나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인도출신의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사사받고, 스승의 권유로 인도로 구법여행을 다녀와 이 책을 서술했다.
  <왕오천축국전>은 가로 42cm, 세로 28.5cm의 황마지 9장을 이어붙인 종이 두루마리에 총 227행, 5893자의 한자가 필사되어 있는 절략본으로 1908년 중국 감숙성의 돈황 천불동에서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발견했다. 아울러 저자인 혜초가 신라사람으로 밝혀진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고 7년이 지난 1915년 일본의 불교학자 다카쿠구 준지로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다(15p). 그 이전만해도 혜초는 중국의 밀교승으로 불공 삼장의 제자였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중천축국에서는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진다. 그리고 여기 중천축국 경내에 네개의 큰 탑이 있다. 하나는 사위국(슈라바스티) 급고독원에 있고, 둘째는 비야리성(바이샬리) 암라원에 있으며, 셋째는 가비야라국(카필라바스투)에 있은 것으로 그곳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성이다. 거기서 무우수(無憂樹)는 봤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넷째는 삼도보계탑으로 중천국의 왕이 사는 성에서 서쪽으로 7일 거리의 두 항하(갠지스) 사이에 있다. 이곳은 부처님이 도리천으로부터 삼도보계가 만들어지자 염부제 땅으로 내려온 곳이다.(53-54p발췌)"

  기행문이라 저자는 그 지역의 특색과 불교의 모습만을 간단히 기술하였고, 역자는 원문을 실고 그 원문아래 해설을 뒤붙였다. 급고독원은 금강경에 나오는 "기수급고독원"으로 기원정사라고 부르던 절이다. 제타(한역으로 祇樹)태자가 그 땅의 일부를 기증하고, 수다타(한역으로 須達)장자가 그위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헌납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넣어 절이름으로 삼았다. 수다타는 아나타핀다다(한역 給孤獨園, 외로운 이를 돕는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아울러 무우수나무는 부처님의 생모 마야부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 가지에 피어 있던 꽃을 따려다 싯다르타 태자를 낳으셨는데, 어떠한 고통이나 근심도 없이 태자를 낳았기에 무우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도리천은 욕계의 여섯 하늘 가운데 아래에서 두번째 하늘이다. 삼십삼천이라고도 하는데, 사방으로 각각 8개의 천계가 펼쳐지고 중앙에 선견천이라는 천계가 있어 모두 합하여 33천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우주를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큰 대륙이 네 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쪽은 불바제, 서쪽은 구야니, 남쪽은 염부제, 북쪽은 울단월이다. 염부제의 염부는 본래 나무 이름인데, 이 염부나무가 많이 자라 번청한 곳이라는 뜻에서 염부제(閻浮提)라고 하였다. 사바세계, 즉 인간세상을 가리키는 말로 때로는 섬부주(贍浮州)라 부른다.

  책 중간에(61p) 한시가 있다. "편지라도 써서 구름편에 부치고 싶건만.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는구나...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누가 고향 숲을 행해 날아가려나"라는 구절이 눈에 뜬다. 저자는 마지막 해설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돌보지않고 온갖 고행을 자초한다)라는 말로써 혜초의 고행을 말하고 있다. 8세기 천축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현대인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라고 한다. 혜초나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이외에도 수많은 구법승들이 서행구법(西行求法)여행을 떠났고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법을 위해 그렇게 당당히 걸을 수 있는 것은 과연 종교의 힘인가 인간의 위대함인가. 천년전 그 시절에도 이 가을처럼 단풍들고 낙엽지는 쓸쓸함이 있었을텐데 그 인간적인 옹벽을 넘어 구도행각을 떠났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조용히 합장하고 아울러 이 책을 남긴 스님과 다시 만나게 해준 인연들에 대해 고개숙여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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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리셋 - 동경대 출신의 신세대 스님이 들려주는 번뇌 청소법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이혜연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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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고 있다. 매일 일어나서 일하는 것은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씩 날새며 일하지만 일어날때마다 상당한 스트레스가 쌓인다. 처음엔 직장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일었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운명이려니 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저자의 말을 빌면 "고(苦)"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새벽의 새로운 기운을 느낀다. 새벽에 하는 생각들은 명료하다. 조금이나마 깨어있음의 이미를 느낀다. 이럴 때 짬짬이 서평을 읽기도 하고 서평을 쓰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제목에 다소 실망했다. 번뇌리셋이라. 현대적 느낌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지만 뭔가 대중을 의식한 냄새가 난다. 역시 책표지에 이 책은 동경대 출신의 신세대 스님이 들려주는 번뇌 청소법이고 "일본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라고 써있다. 저자의 말처럼 다소 유쾌하지 않은 반발의 에너지(진에 瞋恚)가 일렁였다. 번뇌가 그렇게 말처럼 쉽게 청소될 수 있는 의식이란 말인가. 컴퓨터 리셋하듯 쉽게 리셋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고 한다(샤르트르). B는 birth(탄생)이고 D는 death(죽음)이며 C는 choice(선택)의 약자이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삶과 죽음사이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수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사회속에서 하나의 가치관을 선택해야하고 견지해야하며 판단의 갈림길에서 항상 최선의 해답을 찾아내야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밑바탕이다. 종교도 알고보면 그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스스로 찾은 삶의 위안책일 뿐이다. 저자는 불교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번잡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쉽게 알려주고 있다. 그 실효성에는 다소 의문이 가지만 많은 일본책자들이 그러하듯이 얇고 작은 책에 색상도 화려하다. 사실 처음 책장을 열기전에는 일본 스님의 일본빛깔의 일본식 불교의 모습은 궁금했다. 거기다가 동경대 출신의 스님이니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불교관련 책자에서 지식을 충족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 읽는 일본스님의 불교에 대한 생각이니 탐(貪)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휠씬 쉽다. 여성스럽고 가볍다. 책표지의 저자 사진일 것 같은 모습은 비구승인지 비구니승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책을 읽는 도중에 저자가 비구니승임을 암시하는 글이 있어서 겨우 비구니스님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만화는 잘 보지 않아서 4컷짜리 삽화는 처음 몇쪽만 읽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읽을 셈으로 건너뛰었다. 마지막 번뇌 리셋 레시피는 아주 유효했다. 이 레시피는 불교의 기본상식인 삼독(탐貪, 진嗔, 치癡)과 삼학(계戒,정定,혜慧) 그리고 오온(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과 삼법인(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하여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탐욕은 계율로, 진노는 선정으로 무지는 지혜로 다스린다는 불교의 정법이 더욱 빛났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삼독에 관한 설명이었다. 우치(愚癡)를 뇌안에서 빙글빙글 계속 회전하는 망상의 회전에너지로 설명하고, 분노를 유쾌하지 않은 대상을 밀어제치고 배제하려고 하는 반발의 에너지로, 탐욕을 괘감을 주는 것을 더 끌어들이려는 인력에너지로 설명한 부분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 쉽고 명쾌했다. 특히 우치(愚癡)에 관한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헤매임의 카르마(업 業)가 늘면 점점 더 머릿속에서만 사고가 헛도는 공전(空轉) 인격이 구성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집중력, 결단력, 명석함, 지구력 같은 능력이 쇠퇴해 버립니다. 그리고 또 마음이 뇌 안에서 은둔(隱遁)해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눈앞에 놓인 일에 몰두되지 않아 눈앞의 일이 시시한 것으로 느껴지는 함정에 빠지고 해보자는 끼가 쇠퇴하여 갑니다. 어떤 일이든 사물을 즐기기 위한 필수 조건은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몰두하는 것입니다.(133P)"

불교에서 무지는 알고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있지 않는 몽롱한 상태를 말한다. 수많은 시선이나 수많은 잡생각들에 빠져 헤맬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잊어버리고 몽롱한 좀비(zombie)가 된다. 물론 탐욕이나 분노 또한 멀쩡한 인간을 허수아비로 만들지만 치(癡)야말로 우리삶을 좀먹는 가장 무서운 적이다. 언제쯤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한숨 한번 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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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코이케 류노스케 남자인데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금강인문총서 2
석길암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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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심난하지 않고 무척 편했다. 그것은 이 책이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나 또한 이 책속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어찌보면 종교란 인간의 공짜심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것도 주지않으면서 오로지 뭔가를 받고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종교가 아닌가 싶다. 아울러 인간은 강요받기를 싫어한다. 아무리 좋은 종교도 누군가 강요하면 왠지모르게 반발하고 발뺌하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불교에 관한 책이면서 불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종교책이지만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는 양서임에 틀림없다. 전체를 이야기 하면서 부분적인 불교상식도 갖추고 있어 산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 뒷표지에서도 얼핏 나와 있듯이 저자는 "이미 존재했던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불교가 전해지면서 불교에 의해 동아시아라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대만, 티벳,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불교의 위치는 빼놓을 수없는 중심축에 있으며 바로 문화로 직결되어 있다. 저자는 그런 불교의 화려했던 역사적 위치와 침잠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상식적인 애기일지 모르나 고대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는 인도의 북쪽지역을 경유하여 전파된 북방불교(대승불교)와 남쪽지역으로 전파된 남방불교(소승불교)로 크게 대별된다. 이 중 대승불교는 실크로드(비단길)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때부터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문화적 개념이 정착되었다. 

  한때 불교에 심취해서 3경3게(천수경,반야심경,금강경,법성게,화엄경약찬게,무상게)를 암송하고 다닌 적이 있다. 비록 능엄경과 천주팔양신주경까지 욕심내다 마군에 무릎꿇고 사도(私道)에 빠져 형편없이 전락(轉落)해 버렸지만 아직도 불교를 생각하면 돌아온 탕자처럼 믿는 구석이 남아있다. 이 책에서도 역경(譯經)의 역사를 소개하며 구마라집과 현장법사 그리고 위경(僞經) 부모은중경과 천주팔양신주경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보통 읽는 한문섞인 금강경이 바로 서역 구자국(龜玆國,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쿠차 현) 출신인 구마라집(344-409)의 한역본이다. 구마라집의 일화가 재미있다. 구마라집이 죽음에 임박하여 대중앞에서 맹세하길 "만약 내가 번역한 것이 잘못됨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않아서 그의 혀를 모신 사리탑을 장안 초당사에 세웠다고 한다.(33p) 현장법사는 서유기의 삼장 현장법사로 잘 알려졌는데 그가 벌인 역경사업이 너무 방대하고 영향이 커서 현장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 현장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를 정도였다.(38p) 여기서 삼장(三藏)이란 경과 율과 논의 삼장에 달통한 자를 지칭한다고 한다.(30p)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바로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쉽게 잘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승경전과 보살에 대한 설명도 역사적 배경을 통해 잘 설명되어 있고, 구족계를 포기하고 노동을 택한 삼계교(三階敎)의 신행(信行540-594)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출가 승려는 네가지 규칙(四依)을 지켜야 했는데 사의란 분소의(糞掃衣), 수하주(樹下住), 걸식(乞食), 진기약(陳棄藥)을 말한다. 분소의는 시체감싼 천이나 분(똥)을 닦은 천으로 만든 옷이고, 수하주는 집없이 나무아래서 머무는 것이며, 걸식은 재가자의 호의에 의존하여 먹는 것을 말하고, 진기약은 소의 소변으로 만든 약으로 출가자는 이것만 약으로 사용할수 있었다.(105p) 이러한 기본생활 규정에 의하여 일체의 세속적 직업이나 생산노농을 금지했던 구족계를 포기하고, 일체의 비전(悲田,중생)과 경전(敬田, 삼보) 공양하고 중생구제를 위해 노동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인도불교와 다른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특징이라는 구절은 감동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울러 마지막 부분에 불국사의 석가탑(무영탑)과 다보답의 이불병좌(二佛竝座)를 거론하며 화엄경의 연화장세계해를 신라인들이 화엄불국으로 재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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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집 1 안데르센 동화집 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빌헬름 페데르센 외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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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던 한여름의 열기못지 않게 한 달 넘게 책장을 접었다 폈다 지지부진하게 읽었던 장 폴 샤르트르의 <구토>를 다 읽고 한마디 외쳤다. 자! 이젠 <안델센 동화집>을 읽자. 나도 모르게 뱉어버린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렵다는 실존주의 철학자의 소설을 완독 후 동화책이라니. 그러나 인생이란 그 보다 더 아이러니하지 않을까. 먼 곳을 돌고 돌아 수많은 세월을 헤집고 돌아와 그렇게 다시 이 동화집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를 줄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유치찬란할 뿐이다. 그냥 다시 찾은 인연처럼 옛생각에 잠기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공간이 사라지고 잊혀졌던 기억들이 춤을 추며 아련한 상념과 옛추억들이 어루만져 질 것이다. 책이 없었던 초등학교시절 유일하게 집에 있었던 동화집이 바로 이 <안델센 동화집>이었다.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 책상위에 세칸짜리 나무 책꽂이가 있었고 그 위에 노란색표지의 3권짜리 <안델센 동화집>이었다. 그 이야기들 중에 압권은 역시 <인어공주>이었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때문에 슬퍼했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선하다. 그렇게 다시 찾은 <인어공주>는 익산역에서 무궁화를 타고 읽기 시작하여 논산역을 지나칠 무렵 다 읽었다. 그리고 <백조왕자>로 기억되어 있던 <들판의 백조>를 읽으니 어느새 하차역인 서대전역에 와 있었다. 
 
  바닷속 깊은 곳에 인어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 곳 성벽은 산호로 쌓여 있고 위가 뾰족한 높은 창은 한없이 투명한 호박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조개겁데기로 만들어져 있지요. 그 성에 인어 임금님이 왕비을 잃고  몇해째 혼자 지내고 있었고, 늙으신 임금님의 어머니는 여섯 명의 어린공주들을 무척 귀여워하셨답니다. 그중에서도 막내공주가  가장 사랑스러웠어요. 공주들은 바다 밖의 세상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즐거워했고 열 다섯 살이 되면 바다 위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다섯 언니들이 세상 구경을 한 뒤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드디어 열 다섯 살이 된 막내 공주도 바다 위로 올라갔어요. 해질무렵 구름은 아직 장밋빛과 황금빛으로 빛나고, 분홍빛 하늘에는 초저녁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지요. 바다 위에는 돛이 세개 달린 배가 떠 있었고 배안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눈이 크고 검은 열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왕자였어요. 밤이 깊어지자 파도가 거칠어지고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배가 집채만한 파도에 부딪쳐 두 동강나고 왕자님도 물속에 빠졌어요. 물속에 빠진 왕자님을 구한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사랑하게 되고 영원히 죽지않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마녀를 찾아가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댓가로 주고 물고기 꼬리 대신 인간의 다리를 가질 수 있는 물약을 얻습니다. 마녀는 말합니다. "한번 인간의 모습이 되고 나면 다시는 인어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리고 왕자가 자기 부모보다 널 사랑하여 부부가 되지 않는다면 결코 영혼을 얻을 수 없다. 만약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너는 그 다음날 아침 물거품이 될 것이다"  물약을 먹고 인간의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왕자님도 인어공주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물에 빠졌을 때 자신을 구해준 아가씨를 더 찾는데 벙어리가 된 인어공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왕자님은 이웃나라의 아름다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왕자님의 사랑스런 신부가 되지 못해 인간의 영혼도 얻지못하고 물거품이 되어야 할 인어공주가 상심에 젖어 있을 때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있는 언니들을 보게 됩니다. 언니들은 말합니다. " 우린 마녀한테 머리카락을 잘라줬어. 너를 살려 달라고. 그랬더니 마녀가 단도를 줬어.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이걸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야 해. 왕자의 따뜻한 피가 다리에 묻으면 다리는 예전처럼 물고기의 꼬리로 변해 다시 인어가 될 수 있단다. 그리고 죽어서 물거품이 될때까지 300년은 너끈히 우리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 하지만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비수로 찌르지 못하고 아침해가 떠오르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답니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이고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것은 동화책에 나오는 애기이지만 철학의 영원한 화두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 적이 있었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파란 청춘이 있었던가.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이것은 늙은이의 넋두리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젊고 아직도 사라지기엔 이르다. 아니 모두에게 자신은 항상 사라지기엔 이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동화책속에서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속에서도 사라지고 가정에서도 사라지고 기억속에서도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짐은 항상 우리곁에 있다. 사실 동화책도  내 기억속에서 오래동안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몇십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역시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늦기전에 애들에게 권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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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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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원죄라 하면 原罪 즉  original sin(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을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 <원죄자>에서도 그런 의미의 책이라 생각했었고 책을 읽는 동안 가끔씩 나오는 원죄란 단어도 처음엔 원죄(原罪)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갈등을 다룬 소설들이 많고 그 내면에 숨겨진 사악한 본성으로 인해 인간이란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맨뒤 옮긴이의 말에 나와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원죄는 原罪나 怨罪(원한을 품고 저지를 죄)가 아니라 寃罪(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말하고 있다.

  "내 눈앞의 진상은 환멸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경악은 있었지만 남은 감정은 환멸뿐이었다. 한번 보면 바로 뚜껑을 덮어 어둠에 흘려보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추악한 진실이었다. 손가락이 스위치를 찾아냈다. 그만둬, 빛을 비추지 말고 이대로 무대에서 퇴장해. 빨리 이곳에서 떠나는 거다. 비밀을 알면 네 눈은 먼다. 코가 비뚤어진다. 냄새나는 물건의 뚜껑을 굳이 열려고 하지 마라 - 572 page에서 -"

  윗 구절을 읽으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생각했다. 그것은 열지 말아야야 할 상자이며 보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고, 말하면 안되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며 넘지말아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우리들은 사소한 예(禮)의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 예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마디로 쉽게 말한다면 그것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공자는 예(禮)를 말하고 행하였기에 성인군자로 이름이 남았고  그것은 곧 사회의 질서이자 국가의 법(法)되었다. 우리가 일명 "뻑치기"를 걱정하지 않고 생각에 젖어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禮)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살면서 "험한 꼴" 안당하고 살아감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험한 꼴"의 하나인 연쇄 성폭행 살인사건을 간접체험하게 해준다. 실제로 저자 오리하라는 1994년 여성 회사원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원죄가 증명되어 석방되었지만 그 후에 엽기 살인을 저질러 1996년에 다시 체포된 오노 에쓰오의 범죄를 밑바탕으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소설의 등장인물을 열거하자면, 자유기고자 이가라시 도모야, 그와 결혼한 이가라시 구미코(도치모토 구미코), 이가라시와 이메일을 나누며 정신적 사랑을 나눈 고타니 미카, 그리고 구미코를 만나기 전 도모야의 약혼자였던 일곱번째 연쇄살의 희생자인 미즈사와 마이, 그녀의 여동생 미즈사와 미도리, 연쇄살인 희생자 요코의 아버지 세토다 미쓰히로,  그와 동거한 다른 희생자의 어머니 히구치 가요, <주간 토픽스> 데스크 사타케 슌이치로, 가와하라를 구속 취조하고 퇴직한 경찰관 다카야마 다다요시, 12살때 저전거 하야부사를 타고가다 연쇄살인범과 마주 친 무라코시 겐이치로. 연쇄 성폭행 살인범 용의자로 검거된 가와하라 데루오, 그와 옥중 결혼한 가와하라 이쿠에(모리야마 이쿠에), 가와하라 데루오 구명을 위한 모임 사무장인 사사오카 료조 등이 있다.

  1983년 무더운 여름날 일본의 주오선 철로변에서 여섯번의 연쇄 여성 성폭행 살인사건 발생한다. 첫번째 살인사건의 목격자이자 자유기고자인 이가라시 도모야는 <주간 토픽스> 편집자 미즈사와 마이와 이 연쇄사건들을 취재 기고하며 사랑이 싹터 약혼까지 하였는데, 그녀는 불행하게도 일곱번째 연쇄살인의 희생자가 된다. 미즈사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액과 동일한 혈액형을 가진 전과 5범 가와하라 데루오가 경찰에 체포되고, 수많은 협박과 폭행 등에 의한 자백으로 그는 무기징역에 선고된다. 그러나 가와하라는 구명모임과 모리야마 이쿠에 그리고 이가라시 도모야의 도움으로 원죄를 증명하여 10년만에 항소하여 무죄로 석방된다. 이 후 주인공 이가라시 도모야의 취재와 원죄자 가와하라의 사회생활이 이어지는데 줄거리는 생략하고 다만 소설 마지막에 대 반전이 있음을 말해둔다.

  내가 읽은 추리소설은 중고등학교때 읽은 스콜틀랜드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가 전부이다. 그때 그시절 셜록 홈즈가 준 재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켠이 흡족하다. 그 이 후 이책 저책을 전전하다 올 여름 갑자기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역시 범죄 추리소설의 묘미는 반전이다. 이 소설도 마지막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있다. 작가 오리하라의 소설을 처음 읽지만 이 소설은 제 118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이며 그의  "자(者)시리즈"소설중에 최고라고 한다. 아울러 작가는 해외 서스펜스 소설에 정통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한여름 밤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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