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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ㅣ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평점 :

#1. 필립 K. 딕의 장편과의 만남
사실은 필립 K. 딕의 장편이 재미가 없기를 바란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지난번 단편 때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양반이 나의 사랑 너의 사랑 하인라인 형님을 제치고 세계 3대 SF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양반의 이력을 살펴보니 '싫어하면 안되겠다'라는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작품으로 큰 돈을 벌지 못했고, 쌍둥이 여동생이 출생하자마자 죽게 되어 평생을 우울증 및 정신착란 같은 상태에 있었다는 이력 등을 대하니 좀 짠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분도 우주의 기운이 함께해서 넘치는 개시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의 사랑 너의 사랑 하인라인 형님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인라인 형님이 나름 은인인 셈이니 너그럽게 봐줘야지..'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편 중에 뭘 먼저 읽어볼까 생각하다가 제일 궁금한 건 역시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였습니다. 저는 이런 뭔가 황당무계한 제목을 좋아해요. 엉뚱한 SF 같은 느낌이 확 들지 않습니까?
일단 읽어보니 딕 형님이 참으로 생각이 많으신 분이란 건 확실했어요. 굳이 분류하자면 소프트 SF 쪽에 가깝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있어 시대와 설정을 미래로 하고 있지만 과학적인 원리 따위는 껍딱을 핥는 수준으로 나오고 그냥 다 "그렇다치고 읽기"로 읽어야 되는 설정들이거든요. 그래도 집필 시기를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다양하다고 하니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대체로 SF 작가들 중에 작풍으로는 좀 진지한 쪽인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저에게는 무척 좋았습니다. 하인라인 형님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하인라인 형님은 조금 더 테크니컬 한 쪽으로 치중하면서 메시지는 중구난방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는 데다가 한편으로는 천진난만 한 느낌이 있는데, 필립 K. 딕은 조금 더 철학적 메시지에 무게중심이 가 있군요. 가독성 면에서 중반에 조금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역시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2. 이 작품에 나타는 중요한 두 가지 철학적 테마들
한 작품에 크게 두 가지의 철학적 문제를 던지고 있는데, 첫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특질로 인간을 인간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작품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인데, 안드로이드의 모습과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을 대비해서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작품 속 안드로이드는 겉모습만 보면 인간과 구별을 못할 만큼 정교하고 완벽한데, 정신적인 부분에서 인간과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타인의 입장이나 감정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죠.
중간에 등장하는 애완용 고양이 주인 부인이 병원으로 고양이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죽게 되자, 남편이 가슴 아파할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과 극명히 비교되는 장면은 안드로이드가 거미의 다리를 일부러 자르고 움직일 수 있는지 관찰을 하다가 죽자 그냥 싱거워하는 장면입니다. 거미의 아픔이나 목숨 따위에는 안중도 없죠.
당시 작가의 생각처럼 안드로이드가 아무리 정교해도 인간의 공감능력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으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의 차이를 가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타인에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도 못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작가가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작품 전반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현실이란 무엇이고, 가상세계란 무엇인가?'입니다. 작품 속에서 머셔 교라는 종교, 집단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로 접속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 데커드가 접속 장치의 도움도 없이 머셔 교 체험 현상을 경험하게 돼요. 그러니까 현실 속에 가상세계가 곧바로 구현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가상세계는 데커드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사실은 애초에 가상세계 속에서 또 다른 가상세계로 들어가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일지?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작품을 읽어보면 상당히 진지하게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부수적인 설정과 생각할 부분들이 있어요.
#3.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대체로 좋은 원작을 영화화 한 경우는 원작의 장점과 메시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 합니다. 영화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한데, 모든 메시지를 영상과 등장인물의 대화 장면 등으로 표현을 해야 하죠. 그리고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려면 지나치게 진지하기만 해서는 안되니까요.
그리하여 위에서 언급한 이 책의 주요한 메시지들 중에서 오히려 데커드의 직업인 안드로이드 사냥꾼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자연스레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 그중에서도 인간과 안드로이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쪽으로 흘러가면서 예쁜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러브스토리 쪽으로 가닥이 잡힙니다. 다행히 말미에 남성형 안드로이드와의 대립을 통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를 보여줌으로써 나름 메시지가 묵직한 영화로 자리 잡고,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명맥을 이어오게 된 것이죠.
사실 원작 소설에 비하면 영화가 가지는 메시지는 무척이나 궁색하기까지 합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다수 있어요. 혹시나 블레이드 러너를 찾아보시거나 다시 보실 분들이 계시다면 꼭 원작을 읽어보시고 영화를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훨씬 풍성한 내용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는 제작 연도를 생각할 때,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선보인 영상미만큼은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과거에는 2000년대만 되어도 자동차들이 다들 날아다닐 거라는 상상을 많이들 했는데, 이게 참 안타까운 게 대부분의 SF 작가들의 상상력 속에는 자원의 유한성이나 기술의 독점 등에 대한 충분히 현실적인 고려가 없어요. 본인의 천진난만함 만큼이나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고 넉넉하게 나누며 살 거라는 생각들을 하셨던가 봅니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우리의 세상은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인간들을 바이러스와 가장 가까운 존재로 묘사한 것과 무척이나 유사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는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싶다.
내가 당신 종을 분류하려고 했을 때 알게 되었다.
당신들은 사실은 포유류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 행성 위의 모든 포유류는 그 주변 환경과 본능적으로 자연적 평형을 발전시키지만, 당신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한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증식하고 또 증식하여 모든 자연 자원들을 소비한다. 당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이다.
지구 상에서 똑같은 패턴을 따르는 또 다른 유기체가 있다. 바이러스다. 인간들은 질병이고, 지구의 암이다. 당신들은 전염병이며 우리는 치료제이다.
-영화 매트릭스 중에서 스미스 요원의 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