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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1. 정교함, 그 애틋한 정교함...
저는 미치오 슈스케의 다른 작품을 만나보지 못해서 정확히 어떤 작풍을 가진 작가인지 모르는 가운데 이 작품 "랫맨"을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느낌은 스케일이 작고 촘촘한 가운데 밀도높은 정교함을 지닌 공예품을 찬찬히 감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정된 인물과 정해진 몇군데에서 반복되는 장소의 제한은 어쩌면 답답함을 의도한 것도 같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공간은 아예 밀실트릭을 연상시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이 정교함이 '와... 정말 정교한게 짱이야..' 이런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애틋함을 풍깁니다. 정교함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포석이 있는데 그 인도를 따라 놀라울 정도의 섬세한 장치들이 향하는 한 점을 만났을 때의 그 느낌이 애틋하고 애잔함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엄청 막연하고 '뭔소리야?' 하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거뭐, 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남습니다.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주제의식처럼 읽어도 저랑 전혀 다른 부분을 본다면 같은 책을 전혀 다른 면만 보고 착각하는 상황이 발생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결국은 '사건과 진실은 하나인데 각자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본다'라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각자 보고싶은 것만 보고 판단을 해버렸는데 어느날 돌아보니, 곰곰히 잘 생각해보니 사실은 내 생각은 완전 착각일 뿐이더라. 뭐 이런 이야기말입니다. 그런 경험이 많지 않던가요? 살면서 각자의 선입관과 잘못된 정보로 오판을 해서 일으킨 실수가 한두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완벽하다.." 이런 사람 있으면 혼내줄꺼야...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동안 보아 온 것, 들은 것의 색채는 서서히 희미해진다. 어느 날 어디선가 가만히 서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봤을 때, 징검다리 돌처럼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실수뿐이다." p299~300
#2. 전형적인 일본소설에서의 쿨한 설정들..속터진다...
가끔 이런 관계설정의 작품을 읽다보면 좀 짜증이 납니다. 가족은 늘 뭔가 비밀이 있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상적인 구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뭔가 남달라요. 무관심하다거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학대한다거나 속이거나 이런저런 상황입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또 증상의 차이만 있지 어느 가족이나 이런 면이 다 있지 않겠어? 하고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속에서 이런 모습을 너무다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게 전개해 나가면 좀 짜증이 나요.
일본소설 중에는 이런 설정을 다중적으로 해놓는 경우를 많이 만나죠. 이 작품처럼 자매가 있는데 남자는 한명입니다. 이 남자는 언니를 사귀다가 뜬금포로 동생과 성관계를 막 가지죠. 그리고 동생은 언니와의 관계를 잘 알면서 언니와의 심리적 갈등 때문에 언니의 남자를 차지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냥 별다른 저항없이 그렇게 되요. 근데 또 세사람이 서로 그걸 말안해도 다 알아. 이쯤만 되도 거시커니한데 언니가 죽었는데 동생이 "슬프지 않아서 슬퍼요~~" 이런 멘트를 날려요... 남자를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 허어... 이거 뭐 '내가 다 이해한다. 나는 관대하다..'라고 정신승리를 해 가면서 읽어도 상황만 보면 개막장이죠. 다만 각자각자 캐릭터의 심리를 이해해가며 읽자면 또 이해가 안되는 상황은 아니야. 이게 골치 아픈 겁니다.
또 있죠. 가까운 지인이 바로 옆에서 죽었는데 이 인간들 하나같이 쿨내가 진동해요. 엄청 당황하고 경황없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생각해보세요. 내 지인이 죽었어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 공간에서 어느새 끔찍하게 죽어있어. 근데 같이 본 친구가 갑자기. "아무것도 손대지마~~" 이라믄서 형사 흉내를 내고 자빠졌어.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널려있는 것들을 보고 이런저런 추리를 하고 지랄을 떨어요. 저같으면 벽집고 공중 3회전 후 쌍뺨따구를 날리고는 넘어지는 도중부터 뼈마디가 다 부러지도록 밟아주겠습니다.... 만은 이 작품안에서는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그들의 룰이니 따라가야지 뭐...
#3. 반전이 주는 재미... 쥐인간 이론...
이 작품이 대단한 점은 결국 반전에 있습니다. 저는 반전을 정말 좋아하지 않아요. 몇시간 동안 완전 몰입하도록 잔뜩 떠들더니 마지막에 갑자기 "다 뻥이야!!!" 이런 느낌 말입니다. 그럴꺼면 왜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한거야? 하고 면박을 주고 싶어지거든요. 그러고보니 저는 정말 진지한 사람이군요. 가끔 만나는 어설픈 반전의 작품들은 허무맹랑합니다. 한참 떠들고는 "아, 갑자기 깨어보니 꿈이었구나.."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무책임함이라니요..
별 다섯을 그냥 준게 아니지만 그 중 한개 쯤은 이 작품의 공들인 반전 몫이겠습니다. 소품격으로 끼어있는 연습실 밀실트릭 같은건 대충 누구나 눈치챌만한 스토리죠. 그러나 사실은 읽는 중에 '에이.. 범인은 누구구만...'하고 깨닫기는 힘듭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등장인물의 시각과 감정. 그러니까 그 인물에 제한된 시각에 따른 서술만 제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거든요. 그것도 사실은 트릭이고 헤깔리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아 이양반이 범인아냐?'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만 정보가 없어요. 가능성만 있죠. 그래서 중요한건 누가 범인인가가 아닙니다. 범인은 있는데 각자가 엉뚱한 사람을 지목하고 각자 편한데로 행동하고 의심하고 추리하고 난리법석을 떨죠.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연습실 사건의 진상과 함께 마치 평행선처럼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 하나 더 나오는데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이 이야기의 핵심사건입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과 연습실 사건을 통해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랫맨"효과를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더 눈여겨 봐지는 것은 사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히메카와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프로이트의 쥐인간 이론입니다.
저자가 책속에서 설명하는 "랫맨" 효과와 조금 다르게 프로이트 쥐인간 실험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효과를 설명합니다. 아버지와 다른 선택으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마음, 불안과 강박이 있었지만 유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종류의 선택을 하고 마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정말 탁월합니다.
#4. 연습실과 공연장, 배출의 쾌감과 허무함...
또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제한된 공간인 연습실에 계속 갖혀있는 주인공들, 작은 공연을 통한 배출,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서의 허무함 등의 묘한 분위기를 상당히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무거운 느낌을 받게 만듭니다. 깔깔 웃으며 읽을 수 없고 읽고 나서도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습니다.
심지어 반전의 반전을 거쳐 결국 주인공은 진실에 닿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된 진실의 순간마저 깔끔하고 속 시원한 쾌감 따위는 전혀 없어요. 진실을 대해도 그저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속에서 오해와 호해의 벽을 쌓아가며 살아가고 있구나. 겨우 죽을동살동 애를 써야만 한꺼풀 벗겨내고 수많은 껍데기 중 한가지를 볼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의 허망함과 마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 잘 읽었는데 찝찝해.. 대단한거 같은데 찝찝해... 나의 치부가 드러난것만 같아서 찝찝해... 리뷰가 너무 길어져서 찝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