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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평점 :

#1. 처음 만나는 에도시리즈, 의외로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인문학적 소양도, 역사적인 배경지식도 전무한 저에게 일본 에도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에도시리즈"는 그 단어자체만으로도 범접하기 힘들 것만 같은 위화감을 조성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표지가 워낙 예쁘고 북스피어 책이다보니 왠만큼 성의를 갖추는 정도는 구입을 했습니다만 여전히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도 시리즈라는 위압감 외에도 미미여사나 게이고 같은 작가는 워낙 다작하시니 뒤늦게 독서의 재미를 알게 된 저로써는 엄두가 안난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기피하는 것도 있었더랬죠.
여튼 언젠가는 읽기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차에 북스피어 홈페이지를 통해 [맏물 이야기]로 퀴즈를 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 이참에 그럼 한번 읽어나 볼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렇게 읽게 된 에도시리즈 첫번째 작품이 바로 음식 미스터리라는 묘한 장르인 이 작품 [맏물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이 작품이 흥미를 끌었던 이유는 사실 제목 때문입니다. '맏물이라니 그게 뭐야? 가뜩이나 범접하기 어려운 에도시리즈인데 제목마저 생소하구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책을 넘겨볼 것도 없이 앞, 뒤 표지만으로도 충분히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맏물이란 과일, 푸성귀, 해산물 따위에서 그해의 맨 처음에 나는 것으로, 이걸 먹으면 '수명이 75일 늘어나기 때문에 길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중략)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서민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맏물'에 있다!"
뒷표지의 이 소개글만 읽어도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지 가이드가 되더군요. 참으로 친절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에도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예전에 한번 찾아본 적이 있어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런 교과서적 지식은 이 책을 읽는데 딱히 도움이 안될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서민 실생활에 밀착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디테일한 내용들이 나올거란 거죠. 용어가 생소하겠지만 일단 읽어나 보자 하고 펼쳐들었는데 의외로 읽어가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외국소설을 읽을 때 괴로운 부분이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등장인물 이름입니다. 길고 비슷비슷한 이름이 여럿 등장하면 그놈이 그놈인지 그놈이 딴놈인지 첨 나온 놈인지 무지하게 헤깔려서 흐름을 놓치기 일수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맏물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상당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9개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각 편마다 내나 그놈이 그놈.. 똑같은 주인공이 이야기의 중심을 딱 잡고 있습니다. 절대 주인공 '모시치'와 그 아내, 모시치의 두 부하 '이토키치'와 '곤조' 그리고 '유부초밥집 주인' 정도가 고정으로 출연합니다. 이건 왠만한 로봇만화의 공식과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마징가Z가 되었건 그랜다이져가 되었건, 매칸더V가 되었건 여튼 늘 고정 주인공이 출연해서 적을 섬멸하는 스토리가 아닙니까? 침략해오는 적만 계속 바뀌는 구조죠. [맏물 이야기]도 사건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과 사고친 사람, 숨기는 사람 등등이 바뀔 뿐이지 결국 중심 인물들이 북치고 장구치는 방식입니다. 이런 연작구조는 잡지에 한 편씩 연재하는 방식이다보니 아주 적합한 구조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재미있게도 매 편마다 주인공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은 이런저런 사람이다~~"라는 설명이 계속 반복됩니다. 책 한권에서 인물소개가 9번이나 들어가 있다는 말이죠. 이 비슷한 인물 소개가 나올 때마다 재미있더군요. 후후.. 어쨌거나 두꺼운 책인데 등장인물 때문에 스트레스를 안받아도 되니 무척 좋았습니다.
또 한가지 좋았던 점은 "옮긴이의 주석"이었습니다. 에도시대의 독특한 용어들이 수없이 등장하다보니 이게 뭔소리인고?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필연적으로 집중력과 흥미도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역사물의 한계일텐데 으응? 하는 용어가 나올 때마다 역자의 주석이 바로 달려있으니 사전찾을 일없이 옆에서 대신 찾아서 읽어주고 있는 듯한 상황이어서 읽어나가는데 지대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옮긴이 김소연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어디어디, 핫슨(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상차림 가운데, 장국과 함께 맨 먼저 나오는 안주 요리)은 '별미 설 음식'이라니~~(중략) "다음에 나온 '국화잎 가이시키(음식을 담는 그릇에 까는 것)'라는 건? 아아, 삶은 달걀인간."(중략) "다음에 나온 국도 도밋국으로, 도미 쓰쿠네(생선을 다져서 으깬 어육이나 닭고기를 갈거나 저민 고기 등에 계란,녹말 등을 갈아 섞어 둥글게 만들어 기름에 튀긴 요리)에 색깔을 내고~~"p340
이렇게 모를만한 단어만 나오면 바로바로 주석을 달아 주시니 편히 읽을 수 밖에요. 부담스러웠던 에도시리즈를 접하고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라고 선입관을 깨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이 주석이 아닐까 합니다. 어렵지 않네요. 계속 읽어봐도 좋을.... 아니.. 계속 사모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마츠모토 세이초 Vs 미야베 미유키
이 연작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히 세이초옹이 떠올랐습니다. [맏물 이야기]속에 담긴 작품을 세개쯤 읽었을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 이거슨 무언가 세이초옹의 향기가 풍긴다..'싶은 생각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아, 이거슨.. 한편으로는 무척 다른 느낌이구나'하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세이초옹의 역작 '잠복'이 단편집이라 [맏물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떠올랐는데 마츠모토 세이초하면 다들 잘 아는 바와 같이 미야베 미유키가 스승이라고 할 만큼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대선배이자 개인적으로는 저를 미스터리의 길로 인도해준 은인같은 분이신데 말입니다. '잠복'의 신선한 충격은 그보다 훨씬 재미있는 소설을 많이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불가한 것입니다. 첫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세이초옹이 단순한 문제풀이식 미스터리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사회적 문제와 실상을 많이 담았기에 이야기속에 인간이 부각되고 그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미야베 미유키의 이 작품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비록 시대가 과거이기는 하나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잘 다뤄주고 있기에 좋은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세이초옹은 상당히 남성미가 넘치고 박력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무척 무심하고 건조해보이는 문체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미미여사의 이 작품은(읽은게 이거 뿐이라 미미여사의 작품은 이라고 도저히 못하겠다...)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부드럽고 세심하면서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이 많이 났습니다.
내용상 두사람다 사회파로 분류하겠지만 세이초옹의 글이 읽고나면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것이 있다면 미미여사의 에도시리즈 중 이 작품은(아, 이거 비교자체가 무리일 정도로 성급한 일반화가 아닌가 계속 의심하고 회의하고 있음...) 깊은 여운은 없지만 따뜻한 느낌이 더 강하게 남는다고 해야겠습니다. 물론 미미여사의 현대물 중에는 엄청나게 충격을 주는 작품들이 꽤나 있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에도시대 이야기라면 조금은 더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풀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3. 작품속에 녹아있는 따스함,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
[맏물 이야기]의 각 단편들이 한결같이 따뜻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역시나 주인공 '모시치'의 됨됨이가 단단하고 바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담스럽지 않도록 편안하고 엉뚱한 모습도 보여주지만 중요한 판단앞에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하되 법이나 지침이 "인간"보다 앞에 있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역시나 인간사에 중요한 것은 '원칙'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도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주로 서민들에 의해 우주평화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를테면 감정적 불만과 그 해소)로 살인이 나고, 범죄나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간의 알력다툼이나 정치권력 싸움이라면 긴장감 넘치기야 하겠지만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맛을 느낄 수는 없겠지요. 하루벌어 하루사는 서민들의 등장이 잦은 것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또한 매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부초밥집 가게주인님의 존재도 이 작품 전체의 스토리를 하나로 이어 통일감을 부여하고 각 스토리마다 매듭이 풀리는 중요한 지점 역할을 담당하므로써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사건을 풀어나가야할 주체인 '모시치'가 벽에 막히고 답이 안나올 때마다 이 유부초밥집에 들렀다가 결정적인 힌트를 얻어 돌아가곤 합니다.
유부초밥집 가게주인이 대단할 만큼 음식솜씨도 좋게 설정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상당히 지혜롭습니다. 주인공에게 충분히 방향제시도 하고 결정적 힌트를 슬쩍슬쩍 던지기도 합니다. 이런 인물의 설정은 여러가지 이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독자입장에서 작품을 읽어나갈 때 상당한 안정감을 주고 이야기속에 빠져들었을 때 의지할 만한 여지를 주는 존재라 좋았습니다.
초창기에 쓰여진 6개의 이야기에 이어 별도로 이후에 쓰여진 작품까지 구성된 이 소설집은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미가 넘쳐 기분좋게 읽을 수 있어 더없이 좋았습니다. 이제 시작이라 아직 생소하지만 에도시리즈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읽어나갈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첫 시작이 [맏물 이야기]라 의도치 않았지만 좋은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