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1. SF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흥분할 만큼 흥미로운 소재와 전개가 가득한 작품

 
   저는 이 작품의 저자 노리즈키 린타로를 잘 모르지만 신본격이라는 표현으로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작가입니다. 적절할지 모르지만 [녹스머신]으로 이 작가를 만난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녹스머신]이 저자의 일반적인 작풍을 반영한 작품인지 알 길은 없지만 매력적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인 듯 한데, 딱 그 결과가 작품에 깊이 반영된 듯 합니다. 아무리 따지고 봐도 이 작품은 사이언스 픽션의 범주에 넣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미스터리라는 요소는 상당히 애매하기는 하지만 네 개의 단편 중 두번째 [들러리클럽의 음모] 정도에서만 느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번째 작품이 표제작인 [녹스머신]은 물론 전반적인 소설집의 분위기와 가장 들러붙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소설집은 SF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워낙 이공계 출신이고 SF에도 관심이 많은 저에게 이 작품은 정말 취향에 잘 맞는 내용이었습니다. 블랙홀이라던가 평행이론, 타임머신 이론 등이 익숙하기도 하고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양자역학이라던가 양자비트를 활용한 양자컴퓨터니 이런 내용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소리인지는 충분히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 흥미진진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 자주 접하게 되는 타임 슬립, 타임 패러독스 등의 개념에 "우로보로스의 뱀"까지 등장하자 얼마나 반갑던지요. 한편으로는 공학적인 분야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어떻게 하라고 이정도로 심각하게 썼을까? 하는 의문도 들기는 했습니다. 뭐, 모르면 모르는데로 그런가보다 하고 읽는게 또 이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2. 공부하듯 따져보고 고민해 볼 것이 많은 진중한 작품
 
   이 소설집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단편은 표제작 [녹스머신], [들러리 클럽의 음모], [바벨의 감옥], [논리증발-녹스머신2]입니다. [녹스머신]과 [논리증발]은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전반적인 배경과 인물, 그리고 설정이 동일합니다. 다만 다루고 있는 핵심 포인트가 서로 상이하다보니 별도록 분리해 놓은 듯 합니다.
 
 
(1) 녹스머신
 
   녹스머신은 기본적으로 타임 패러독스와 평행이론에 관한 내용입니다. 타임 패러독스와 평행이론은 사실상 상호영향을 미치는 이론이라고 보는게 적절한데, 타임 패러독스란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어린시절의 나를 죽이거나 나의 부모를 죽이면 그 시점을 기준으로 미래의 나는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나는 없으므로 내가 과거로 돌아가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어서 과거로 가서 나를 죽일 수 없다" 뭐 이런 것이죠. 그런데 이 이론이 성립하려면 시간의 단일성이 성립해야 합니다. 즉, 과거로 부터 현재, 미래까지 세계가 딱 하나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가 바뀌면 바뀌기 전의 역사는 없어지고 새로운 역사가 거기에 덮어쓰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평행이론을 접목시키면 조금 양상이 달라집니다. 아까처럼 내가 과거로 가서 어린 나를 죽인다고 치면 원래의 역사가 변형이 되는 그 시점에 두개의 세계로 갈라집니다. 원래의 세계는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내가 죽어서 없는 새로운 세계가 하나더 생겨서 기존과 평행하게 별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죠. 문제는 그 시점부터 원래 세계의 '나'는 내가 죽어서 없는 새로운 세계에 올라탄 꼴이 되어서 원래 내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양방향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이런 평행한 세계가 만날 수 있는 시점이 있다면?' 이라는 착상에서 시작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녹스머신]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으로 바로 주인공 유안이 날아갑니다. [녹스머신]에는 이런 모험을 한 주인공이 과연 자신의 원래 세계로 되돌아 왔을지 어떨지 의문을 남긴채로 끝이납니다.
 
 
(2) 들러리 클럽의 음모
 
   들러리 클럽은 전형적인 탐정소설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탐정의 조수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클럽이고 이 클럽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결을 그린 굉장히 독특하고 참신한 미스터리입니다. 요즘 정말 자주 만나는 S.S 반다인의 등장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고전 탐정소설의 매니아들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만한 신선한 내용입니다.
 
   저로써는 고전 탐정소설을 별로 접해보지 않아서 그다지 흥미를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읽다보니 "열개의 인디언 인형(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내용을 놓고 클럽내에서 찬반 대립을 하는 진행이 무척 긴장감 넘치고 좋아서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각각 구성원의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이 가상이지만 현실과 다를바 없어보여 좋았습니다.
 
   결국은 크게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고 위협을 느끼는 기존 세력이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이거이거 참 자주보는 모습이다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많은 등장인물과 언급되는 작품들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체 작품중에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별로였고, 전체 흐름에 어색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3) 바벨의 감옥
 
   이 작품은 뭐 너무 진보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달까... 이런 내용은 논문에서나 쓸만한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형식은 탈출입니다. 그러나 탈출 직전까지에서 내용이 끊어지죠. 주요한 컨셉은 인간의 육체와 사념의 분리, 그 사념이 본 인격과 경상인격이라는 두개의 동일한 쌍을 이루고 이를 통해 2차원적인 사념 스캔으로부터 정보를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키랄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어찌되었건 격자형태의 3차원의 방에 분리된 채 갖힌 비동기화 된 것으로 보여지는 한 개인의 사념이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고 관찰자의 눈을 피해 탈출점을 찾고 탈출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평평한 종이 두장이 겹쳐져 있다고 할 때, 본 인격과 경상인격은 각각 종이의 서로 마주보는 면의 서로 반대쪽을 보고있는면의 같은 위치에 찍힌 점과 같습니다. 종이 두장을 겹치면 서로 반대편에 붙어있지만 딱 만나는 위치에 있는 그런 구조인 셈이죠. 이 종이 두장을 각각 반대방향으로 접어올려서 육면체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접는 방법에 따라 두 점의 위치는 틀어지기도 하고 거리상으로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이 작품에서 말하는 행렬격자 형태, 책의 모양과 같은 형태안에 갖혀있다고 하는 구조와 유사합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원래 거리상 딱 붙어 있던 두 점이 멀어지고 즉 본 인격과 경상인격이 분리가 되는 것이죠. 게다가 본 인격에서 보낸 정보가 경상인격으로 가는 경로와 반대로 경상인격에서 본 인격으로 보내는 정보의 경로가 동일하다면 시간지연이 있을 지언정 동기화된 통신이 가능하겠지만 서로 다른 경로로 주고 받는 경우에는 정보의 교환자체가 뒤죽박죽 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사념의 도달과 피드백의 문제는 이런 조건에서 벌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론적으로 이런 조건을 잘 파악해서 두 인격이 동시에 만나서 탈출할 수 있는 좌표를 찾아서 동시에 빠져나가야 탈출할 수 있는 것이고 결과는 없이 시도하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에 또... 이 이야기에 묘사된 개념은 마지막 작품 [논리증발]의 전개에 도움이 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용상 전체 소설집에서 나름 유의미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만...
 
 
(4) 논리증발
 
   [논리증발]은 [녹스머신]의 이야기가 확장되는 형태입니다. 쌍방향 시간여행에 대한 국가간 대립의 피해자로 은거중인 후안이 재등장하고 이야기속의 문제를 풀어내는 핵심 키 역할을 합니다.
 
   큰 틀은 종이책이 사라진 전자책 데이터베이스 사회가 일반화된 이후의 세계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러한 전자책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 데이터를 제어하는 기술로 양자비트와 양자역학을 설명합니다. 이 이야기에 언급된 양자역학이란 굉장히 쉬운 개념입니다.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표현하는 디지털이라는 것은 결국은 "0"과 "1"로 이루어진 비트 단위의 데이터의 집합입니다. 이를 어떻게 저장하고 가공하고 유지하는가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접목시키면 "0"이나 "1" 하나를 표현하는 비트 하나에 다가 "00", "01", "10", 혹은 "11" 총 4가지의 서로다른 데이터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트를 두칸으로 쪼개서 더욱 많은 정보를 담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양자비트입니다.
 
   양자비트 개념을 굳이 집어 넣은 이유는 이러한 양자가 열에 취약하고 제어하기 힘들다는 점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열이 발생하면 저장된 양자비트의 정보가 안정성을 잃고 제멋대로 어긋나버려서 데이터가 모조리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이 되면 종이책도 없는 판에 고유의 정보가 훼손되어서 쓸모없는 쓰레기 정보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설정해서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이 작품 [논리증발]의 핵심 스토리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 양자비트로 저장된 데이터를 뒤흔드는 열을 발생시키는 매개가 있어야 위기상황이 조성이 되는데, 이 위기상황을 만드는 열을 발생하는 현상을 이 책에서는 '호킹 방사'라는 개념을 도입해 설명합니다. 블랙홀의 사상에서 아까 바벨의 감옥에서 등장했던 쌍(페어)의 개념을 도입해서 두 개의 쌍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즉, 하나는 블랙홀로 다른 하나는 블랙홀의 반대방향으로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균형이 깨지면서 블랙홀이 급속히 무너지고 이때 열과 빛이 방출된다는 것이죠. 이 것이 호킹 방사입니다.
 
   저장된 원전 중 엘러리 퀸의 <샴쌍둥이 미스터리>의 독자의 도전에서 시작한 이러한 호킹방사에 따른 열로 인해 저장된 데이터가 줄줄이 훼손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를 막을 방법이 없는 위기가 펼쳐집니다. 물론 녹스장 이론의 개발자인 유안이 등장해 또 한번의 모험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또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서 블랙홀에 몸을 던지고 허수의 몸을 갖추고 결합하고... 아.. 그냥 그렇다고 칩시다. 여튼 유안은 증발하고 전자책 세계는 다행히 불길이 진화되고 대부분 복구 됩니다.  
 
   사족이지만, 데이터가 불타서 사라지는 부분에서는 에반게리온에서 중앙제어시스템인 "마기"가 해킹 당하던 그 에피소드가 떠오르더군요. 에반게리온 덕후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3. 표지디자인, 공중정원의 고퀄리티가 돋보인다.
 
   사실 이 소설이 눈에 띈 가장 큰 이유는 표지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이 일단 예쁘고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지는 디자인이 무척 좋았습니다. 실물을 보고 표지를 펴보니 안보이는 부분까지 깔끔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표지 디자인으로 무척 유명하신 "공중정원"님께서 작업하셨군요. 역시나 명불허전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바는 없지만 이분 디자인은 항상 신뢰가 갑니다. (​아... 뒤늦게 확인해보니 디자인은 일본어 원본 그림과 동일하네요... 완전 헛다리... 이미지 받아서 레터링 작업 정도만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쯥...)
 
   한꼭지의 내용은 이정도로 몇 줄만 해야 되는데 이번 리뷰는 이게 뭔가 싶은 희한한 리뷰가 되었습니다. 작가가 워낙 진중하게 성의있게 글을 쓰신 듯 하여 리뷰도 성의를 조금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길어졌습니다. 비슷하게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알던 모르던 놀랍도록 신선하고 발상이 독특한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거 또 찾아 읽어야할 작가가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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