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을 줄 몰랐어
모르강 스포르테스 지음, 임호경 옮김 / 시드페이퍼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1. '죽을 줄 몰랐어'가 이럴 줄 몰랐어...
시드페이퍼의 신간 [죽을 줄 몰랐어]를 읽었습니다. 시드페이퍼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디자인도 예쁘고 제 취향에 잘 맞는 편이라 좋아하는데 이번 신간 [죽을 줄 몰랐어]도 디자인 만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표지에 덧입혀진 핏자국 같은 효과가 무척 독특하고 좋았습니다.
이 작품은 그냥 창작소설이 아니고 2006년에 있었던 "일란 할리미 납치사건"을 바탕으로 한 실화 소설입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독자입장에서 이 작품은 일반 소설이라기 보다는 '연작 기사'나 주간지나 월간지 '특집 기획 시리즈'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소짓는 사람'같은 르포르타주 소설과도 약간 성격이 다른 듯 합니다. 제목이 [죽을 줄 몰랐어]길래 의도치 않았지만 실수로 살인이 나는 뭐 그런 내용인줄 알았는데 아이구 이 속터지고 멍청하고 멍청해서 결과적으로 나쁜 놈들이 세트로 쏟아지는 이 소설을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순수 창작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픽션이라면 그냥 캐릭터들의 설정을 그렇게 한 거니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작품을 읽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2. "일란 할리미 납치사건"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는 "일란 할리미 납치사건"은 반향이 크기는 했지만 사실 단순한 내용입니다. 프랑스 빈민들이 주축을 이룬 범인 그룹이 유대인 남성을 납치, 감금하고 금전을 요구하였으나 개입한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결국 피해자가 사망한 이후에 범인들을 검거한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한마디로 평가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한 프랑스 경찰들의 대응이 옳았느냐, 아니면 피해자의 생존여부를 너무 등한시한 비윤리적 대응이었느냐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있을 만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경찰의 입장은 납치를 자행한 범죄자와 흥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있을 범죄의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경찰이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 금전적인 흥정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수많은 범죄자들이 납치를 하고 금전을 요구할 것이라는 논리죠. 그럴 듯 하고도 설득력도 있는 논리입니다. 단, 피해자가 내 가족이나 지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나 성립되는 논리입니다. 과연 프랑스 경찰청장의 아들이 납치가 되어도 이런 방식으로 3주간이나 수사를 길게 끌었을까 생각해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 일란 할리미는 죽음에 이릅니다. 그리고 경찰은 범인에게 돈을 넘겨주어 체면을 구기는 일도 피하고, 추후에 범인들도 대부분 잡아들이는 성과도 올립니다. 과연 납치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다음 납치를 염두에 두어 흥정은 안하고 강경하게 대응하다 케이스마다 피해자가 죽음에 이른다면 적절한 방향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성과가 없는 범인들은 경험대로 납치사건은 재미를 못본다며 범죄자체가 줄어들 수는 있겠습니다.
#3. 돈이냐 정치냐
이 작품에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이 사건을 벌인 범인들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이 사건 이후 후폭풍의 주요한 원인이 됩니다. 주범이 체포된 후 언론을 통해 밝힌 내용을 보면 '돈이 필요해서 돈이 많은 유대인을 노려서 납치를 했다'라는 것인데 사실 직접적으로 유대인을 노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최대 유대인 공동체가 위치한 프랑스 유대인들이 가만히 읽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뉴스거리를 놓칠 리가 없는 언론에서 기름을 뿌린 듯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범인들은 그저 돈이 궁한 가난하고 교육을 많이 못 받은 사람들일 따름이었고, 그저 돈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정치적인 행동을 할 정도의 여유나 개념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 필요해서 납치를 시도하고 실패를 반복하다 정신적 압박과 원망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살해까지 한 이 줄줄이 세트로 바보들 틈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진지하게 끼어들 여유가 있었냐는 말입니다. 단순히 자기 등따시고 배부를 생각만 하는 정도의 근시안적인 친구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리더이자 주동자인 야세프라는 인물 만이 정치적 성향으로 보여질만한 언행을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빅 블랙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 부정직한 방법으로 먹고사는 것이었다. 반면, 신앙, 정치, 경제 등 모든 것을 뒤섞은 야세프는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양상을 보였다. 야세프의 눈에 자본의 화신 유대인은 자신을 착취하는 세계의 상징이었다. 야세프는 실제로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지적수단을 지니지 못한 탓에 이런 믿음에 갇혀 있었다."p253
야세프가 가진 편견이 완전히 잘못된 편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야세프는 유대인들에게 사회구조적 문제와 본인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야 말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는 합니다.
한편, 이 사건을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행동으로 이해하는 태도도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그의 저서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에서 이 소설의 실화가 된 할리미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순간 누구나 치정에 얽힌 파렴치한 살인사건의 측면만을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없이 단지 파리 교외에서 발생한 일개 치정사건으로만 여겨진 이 사건 직후, 나로 하여금 곧장 이 사건에서 반유대주의를, 추호도 의심할 여지없는 반유대주의 살인임을 알아채도록 한 것이 바로 그 반사작용이었다. 도대체 파시즘과 비시주의를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젊은 유대인이 고문 끝에 살해당한, 그것도 그가 단지 유대인이고 또한 유대인들은 돈이 많다는 편견 때문에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어찌 다른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이런 평가는 개인적으로는 약간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평가는 인종간, 세력간의 대립 일변도로 치닫도록 하는 선동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건을 충실하게 파악하지 않는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개인의 프리즘을 거친 필터되고 해석된 내용만을 전달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란 할리미 납치사건'이 정치적 메시지냐 아니냐를 쉽게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는 시각에서 이 사건의 핵심은 그저 "돈"일 뿐입니다.
#4. 답답하고 답답하고 한심하고 한심하다.
이 소설은 정말 제가 가장 힘들게 읽은 베스트에 드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히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중에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도덕성이 갖춰진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실화에 가깝기도 하겠지만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찌질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어설픈 범죄행각과 바보들의 향연은 정말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가서 앉혀놓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가르지고 싶었습니다. 인권이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의 함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소설은 잘 넣어두어야겠습니다. 다 읽고나니 표지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정말 고민해볼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 의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딸꾹질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을 멍청이 범죄자로 만든 건 누구의 책임입니까?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하도록 만든 사회구조적인 책임은 얼마나 물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책임입니까? 사회의 책임입니까? 정부의 책임입니까? 죽은 사람만 불쌍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