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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평점 :

#1. 시대를 초월하는 기묘한 이야기의 힘
지금처럼 IPTV나 PC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고,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유튜브, SNS 등으로 갖가지 정보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환경이 일반화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컴퓨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서 애플이니, 286, 386이니 하는 컴퓨터를 접하고는 깜딱놀라고 PC통신 하는 사람들을 '뭔가 불온한 나쁜짓을 하는거 아닌가?' 하고 쳐다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나마 그 이전에는 티비나 라디오가 일방적으로 매스미디어의 역할을 할 뿐, 대부분의 "이야기"는 서로 마주하고 입에서 입으로나 전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좀더 어릴때는 방학때 시골 할머니네에 가면 사촌 형, 누나, 동생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전해듣는 것이 큰 행사였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데 한밤중에 불도 꺼놓고 이불가에 둘러앉아 으스스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얼마나 무섭던지요. 그래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매력에 끌렸었죠.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누구와 함께 했느냐, 어떤 상황에서 나눈 이야기인가에 따라 같은 이야기라도 그 느낌은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전달 매체가 바뀌면 이야기의 뉘앙스와 느낌도 전혀 달라집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가지 속성은 역시나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입니다. 이야기는 형태와 환경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고 공유하고 싶어합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토해내고 표현하고 나누는 과정 중에 정리가 되고, 정화가 일어나고 마음의 치유가 되는 것이죠. 타인과의 깊은 교감도 가능해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야기의 힘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이제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머리속에 그려볼 여유가 없어졌죠. 이야기는, 싸구려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토해진 진실하면서도 추악하고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합니다. " -눈의 여왕 중-
#2. 구성과 전개의 절묘함, 완성도 높은 이야기들
저는 전건우 작가님의 작품을 [밤의 이야기꾼들]로 처음 만났습니다. 프롤로그를 읽고나니 '어, 이거 뭐지? 뭔가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려다가 만 이 느낌은...' 꼭 화장실에 들어가서 방귀만 뀌고 나온 이 느낌은 참으로 거시기했습니다. 그런가 싶더니 다른 이야기가 또 진행되다가 뭔가 시원치 않게 끊기는 것 같고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전반부가 진행되면서 슬슬 이 책 전체의 얼개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액자식 같기도 하고 옴니버스식 같기도 한 구성의 책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하나하나 진행되어 감에 따라 점점 강도가 더해가는 것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놀라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 자체도 완성도가 높고 읽는 재미도 뛰어났고, 전체적인 메시지와 구성도 무척 짜임새가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기담류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뭔가 무섭거나 기묘한 이야기는 읽고 나면 찝찝함이 한동안 남고 저의 유리멘탈에 상당한 타격을 주기 때문입니다. [밤의 이야기꾼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유리멘틀에 금을 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다행히 나이를 좀 먹어 그런지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이야기들이었기에 망정이지 꿈에 나올까 힘들뻔 했습니다.
난쟁이들이 사람을 잡아가질 않나, 도플갱어도 나타나고, 주인공이 미쳐가지고 가족을 막 죽이기도 하고 동물을 죽이면서 놀다가 아이들에게 칼질하러 다니는 여자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지독한 눈귀신 저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냥 들으면 콧방귀나 뀌고 말만한 이야기들인데 읽다보니 쫙쫙 빠져드는 이유는 그만큼 저자의 이야기꾼으로써의 역량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 이거 황당한 소리같은데 왜 자꾸 궁금하지?' 이런 식이죠.
점점 더 빠져들게 만드는 이야기의 배치도 훌륭하고, 읽는 동안 김빠지거나 그만 읽을까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가독성도 뛰어나고 집중하게 만드는 타이트한 짜임새가 좋았습니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대한 고찰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적당히 발란스를 조절하는 기교도 눈에 띄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순문학적 완성도가 아니라 대중이 얼마나 만족할까에 대한 완성도 말입니다.
#3. 이야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야기꾼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체로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고 이야기의 전개나 결말을 전혀 예측 못할 만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포인트가 있는 듯 보이는데, 독자들에게 '와, 이런 이야기가 다 있나!'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 보다는 오히려 저자의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앉혀두고 정겹게 놀려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네 형, 친척 오빠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적어도 제가 느낀 감정으로는 무척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정겨운 그 옛날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무서워하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났습니다.
저자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왠지 동떨어진 기담 만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럴만하다',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도록 설득력 있게 잘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적절한 방법과 순서로 전해 줄 줄 아는 이야기꾼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국내 작가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믿고 사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사겠다라는 것이지요. 물론 읽기도 해야겠지만서도... 어쨌거나 몇 안되는 애정하고 소장하는 국내 작가 목록에 한명이 추가되는 상황을 만나니 무척 흡족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기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