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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1. 빌리 밀리건에 주목하라.
이 소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빌리 밀리건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리 밀리건은 1955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다중인격자입니다. 자그마치 24개의 완전히 분산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죠. 그러니까 이 양반은 한지붕 24 가족인 셈입니다. 이력을 보니 역시나 어린시절 양아버지에게 성적학대를 받았군요. 그런데 성적 학대를 받기 이전에 이미 인격 분리는 시작되었으니 성적학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네요.
빌리 밀리건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나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잘하는 인간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간 및 무장강도로 체포된 그를 대상으로 연기를 펼친다고 생각했던 의사와 수사관들이 갖가지 검사와 취조를 실시했는데 오히려 연기로는 불가능한 각종 능력들을 발휘하면서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격이 바뀌면 갑자기 아랍어와 아프리카어를 유창하게 하고, 다른 인격이 되면 수학, 물리학, 의학을 전문가 수준으로 잘 하는 식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해가 안되는게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 인격이 바뀐다고 갑자기 아랍어를 한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참... 검사한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됩니다.
아마도 어지간한 정신분열 관련 스토리는 빌리 밀리건의 이야기보다 더 허구적이고 드라마틱하지 못할 듯 합니다. 쓰카사키 시로의 [무명인]을 읽다보면 정말 빌리 밀리건 이야기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며, 받아들일 만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달랑 한지붕 두가족 이야기거든요. 게다가 그것조차 영구거주도 아니고 임시 거주의 형태입니다.
#2. 과학 미스터리는 과연 사랑을 받을 것인가?
[무명인]은 전체 스토리 전개로 보면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소재는 과학입니다. 뇌과학이라고 해야할지 화학 또는 유전자학이라고 해야할지 애매합니다만 과학적 상상을 토대로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덧붙여 만들어진 잘 짜여진 소설입니다. 게다가 장르소설의 미덕인 가독성이 나무랄데 없이 좋습니다. 일단은 이 가독성 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갑니다. 이야기를 흡입력있게 끌고 갈 수만 있다면 미스터리는 일단 합격점을 받을 만 한 것이니까요. 뭔가 주인공이 미궁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건의 전말이 어서 밝혀지기를 바란다면 '재미있게' 읽었다고 할 수 있을텐데 [무명인]은 그런 관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문제는 과학적 상상이라는 핵심 소재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뇌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고 좋아합니다. 사건이 발생하는 계기는 다소 생뚱 맞을 지언정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정에는 상당히 흥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반의 밑밥을 까는 부분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이건 조력자건 다들 이게 뭔 일인지도 모르고 흘러흘러 가는 지점이 이 소설의 반환점을 훌쩍 넘어버리니 궁금해서 읽기는 하는데 너무 미궁속에 허우적 거린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뭐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끄는건가?'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어버렸으니 말입니다.
또 하나 아쉬운 부분은 마지막 결론부였습니다. 전말에 대한 설명과 마무리는 관심이 많은 제 입장에서도 약간은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입니다. 분명히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빠지는 느낌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읽고난 느낌은 '과연 이런 류의 과학 미스터리를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좋아라하며 읽을 것이며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호불호가 나뉘는데 쉽게 읽기엔 주제가 좀 전문적이라는 생각입니다.
#3. 불노불사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하모니
[무명인]에서 끝까지 소설을 짜임새 있고 흥미진진하게 끌고 갈 수 있었던 요소는 주인공을 위협에 빠트리는 미지의 세력이 복합적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불노불사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주인공의 연구 결과물을 원하는 한 세력은 어떻게든 결과물을 얻어내는 동시에 손해를 일으킬 화근을 없애려 노력합니다. 한편 이 이야기 전체의 발단이 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또 한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유지하고 파멸을 막기 위해 소극적으로 주인공을 감시합니다.
참,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불노불사의 개념이 색달라서 좋았습니다. 내 한몸이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여 불노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을 건강한 새 몸으로 옮겨버린다는 개념이 신선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마치 불노불사가 가능할 것 처럼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진시황 시대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지 현대에 와서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기는 합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누구 몸을 가져와서 내 정신을 심는단 말입니까? 이 상황을 상상해보니 끔찍한 불법과 범죄의 향기가 품깁니다.
개인적으론 제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찾아가서까지 불노불사할 만큼 아름다운 세상이고 삶인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하이렌더 류의 영화, 드라마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인간이 위대하고 행복한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한성에서 기인합니다. 떠나야할 때를 모르고 악착같이 남의 몸이라도 써서 더 살려고 기를 쓰는 인간이 인간 고유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쉬운 정도가 가장 적당한 정도입니다.
[무명인]을 핑계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았습니다. 한 인간의 몸에 유입된 또다른 인격에서 출발한 미스터리를 긴장감 넘치게 잘 끌고 나간 이 소설은 게놈 프로젝트 같은 뇌, 또는 인간 유전자, DNA 등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소설입니다. 물론 딱히 지식이 없고 평소에 관심이 없었다 해도 미스터리적 요소를 즐겁게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소설입니다. 과학과 미스터리, 음모, 인간의 이기적인 습성 등이 잘 조화된 신선한 소설입니다만 기본적인 소재는 우리에게 이미 상당히 익숙해져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