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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소년법, 오로지 소년법을 겨냥한 극적인 스토리 전개...
[소년법]
"이 법은 반사회성(反社會性)이 있는 소년의 환경 조정과 품행 교정(矯正)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소년법"은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을 교화하고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엉뚱하고 나쁜짓을 하면 붙잡아서 그러지 않도록 보호하고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년법"은 소년에게 모든 관심과 목적이 맞춰져 있을 뿐, 그 소년의 행동으로 인해 회복불가능한 심각한 피해를 입기 마련인 피해자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최악의 죄를 저지른 소년이 있다면 그 소년이 도데체 무엇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방황하는 칼날]은 이런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범죄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청소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반영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도덕만이 존재한다."p88
사실 정말 많은 미스터리류 소설에 이 소년법이 언급되고 주요 소재로 등장합니다. 모든 정책에 명암이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점이 있기 나름이지만 소년법의 경우는 장,단이 너무도 극단적이어서 소설의 주요 소재나 설정으로 활용하기에 아주 용이하고 효과도 좋기 때문이겠습니다. 저는 주로 일본 소설에서 접하다보니 일본에만 특이하게 소년법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군요. 실제로 법정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법이 있으니 집행되겠지요.
최근에 범죄 피해자학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기는 하지만 연구되는 것과 법으로 지정되고 집행되는데까지는 참으로 긴 세월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범죄 피해자학이 오로지 범죄에서 피해받은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질 방법을 찾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범죄를 유발했다는 관점의 접근도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소년법"의 대척점에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2. 국가와 공권력이 놓치는 한계에까지 확장되는 문제의식...
소설 말미까지도 왜 [방황하는 칼날]인지 애매했습니다. 주인공의 태도를 딱히 방황한다라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어디를 겨냥하는지에 대해 전반부에 약간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중략)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p128
그러니까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자 공권력이라 할 수 있는 법원은 범죄자를 벌하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부모인 "나가미네"를 통해, 수사를 진행하는 많은 형사들을 통해 법에 의해 집행되는 과정을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 부각하는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그런다음 이 책의 말미에 본격적으로 본론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p508
결말부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정의의 칼날'이 가진 한계를 지적합니다.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팔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중략)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중략)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p534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합니다. 속도의 충돌 챕터에서 각 사회 구성요소들이 가진 변화속도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가장 빠른 시속 100마일은 당연히 기업이나 사업체입니다. 시속 90마일, 60마일을 지나 5마일, 3마일까지 느려지더니 급기야 시속 1마일 속도로 변화하는 느림보 중에 느림보로 "법"을 듭니다. '법은 살아있지만 간신히 살아만 있다'는 흥미로운 표현도 사용합니다. 앨빈 토플러의 주장처럼 법은 정말 느리게 변합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사회 여건이 변해가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경찰이 지키는 것은 피해자나 국민이 아니라 법 자체다'라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날카롭고도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공권력이 법을 수호하기 위해 구성원을 억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자 불합리한 상황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해묵은 답답한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이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3. 훌륭한 주제의식과 사건진행, 통찰이 담긴 작품... 그래도 책좀 이렇게 만들지 말자...
주제의식도 좋고 생각할꺼리도 많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그 입장이었다면 주인공 나가미네와 마찬가지로 인간 이하의 범인들을 소년법 보호대상이라는 설명만으로 그냥 보내지는 못할 듯 합니다. 끝까지 집중해서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사건 진행과 디테일한 묘사는 무척 좋았습니다. 전형적인 사회파 소설이다보니 깜작 놀랄만한 반전이나 허를 찌르는 인물의 등장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치게 진지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잘 맞는 작품이었습니다.
책 내용과 상관없이 책을 읽는데 불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판형은 작고 책은 두껍고, 본드 만땅 무선제본이다보니 오랜시간 펼쳐들고 읽기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특히 지하철에서 서서 한손으론 지하철 손잡이를 나머지 한손으로 책을 펴서 읽어야 할 때, 상당한 근지구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거 해보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짜증납니다.)
또 하나.... 표지... 표지가 참으로 거시커니 합니다. 물론 취향차이이자 장단점이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워낙 디자인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 워낙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색깔.. 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