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1. 장기판 속의 장기말이 되기, 장군(將軍)이냐? 졸병(卒兵)이냐?
장기판 속에 다투는 두 나라는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입니다. 그 유명한 초패왕 항우(項羽)와 그 이름도 민망한 한왕 유방(劉邦)의 천하패도기를 모방한 게임입니다. 자 이제 당신은 이 장기판 속에 말입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어느 나라에 속하냐를 정해야 합니다. 두군데 다 속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서로 죽이고 싸워 승패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나라를 정하고 나면 이제 어떤 역할과 위치에 있을지를 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정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어느 말은 시작하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돌격앞으로 전사하여 장기판에서 내려와야 하며, 어느 말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장기판의 장기말과 같다고 한다면 과연 각 장기말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전체 판세를 위해 어느때고 나를 희생해서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때로는 장기를 두는 사람의 의중을 무시해가며 무조건 살아남아야 할까요?
여기 [64]에 등장하는 주인공 미카미는 장기판 속의 장기말과 같은 운명에 처합니다. 그리고 이 장기판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처신해야할 지를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경찰조직에 몸담아 오랜동안 형사로 활약하던 미카미는 여느 형사들이 그러하듯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딸 아유미가 가출해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게다가 뜬금없이 오래동안 몸담았던 부서를 떠나 홍보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홍보담당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미카미는 입장이 애매합니다. 원래 속했던 형사부와 홍보실이 속해있는 경무부와의 오랜 대립과 갈등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형사부에서는 미카미를 배신자 또는 잠정적 배신자로 여깁니다. 경무부에서는 본질이 형사부 소속이라 언제든 돌아갈 인물이라 여기고 경무부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게 공중에 떠서 어디에도 적을 둘 수 없는 무국적자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설정 가운데 미카미를 둘러싼 사건의 진행과 주변인들의 반응,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이 남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집니다. 적이 모호해 어디에서도 정보를 주지 않자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미카미는 상황을 파악하려 끝없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자신의 입장과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 눈을 뜬 시점부터 흔들리지 않고 달려나갑니다. 이 과정을 물흐르듯이 그려주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합니다.
#2. 대립과 대립으로 얽힌 복잡한 조직역학에 방황하는 중년간부는 어디로?
이 작품에는 다양한 양상의 대립을 그리고 있습니다. 경찰조직 D현경 내부의 형사부와 경무부 간의 치열한 파이나눠먹기 싸움, 그리고 출신성분에 따른 캐리어 대 넌캐리어의 보이지 않는 자리싸움, 본청 대 지방 현경간의 알력다툼 등이 그러합니다. 개개인의 영역으로 보면 조직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세하려는 자와 그 꼴을 못참는 자, 그저 아무생각없이 시키는대로 하는 자와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폭로하고 양심을 지키려는 자 등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대립들이 혼재한 상황을 적절히 잘 버무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혼란속에 주인공 미카미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등장인물 누구든 나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만한 인물이 있을 법 합니다. 제가 속한 조직이 경찰 조직과 상당히 유사성이 있다보니 개인적으로는 너무 격하게 공감하며 초집중해서 빠져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조직속에서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누리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꽤나 있습니다만 그 권력욕구가 조직의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데 서로 협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합니다. 나만 잘되어야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초월적인 협조와 배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가만히 조직속에 개별적으로 또는 일부 파트별로 움직이는 모양새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통상 이런 지적을 마주하면 '살기 위해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따위의 논리를 펴기 마련입니다.
이런 구도속에서 조직속 자리를 보존하고 진급하기 위해 상급자를 신처럼 떠받드는 모양새는 개인적으로 매우 혐오하는 행태입니다.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 조직의 생리를 혐오하는 저는 아주 모순적이고도 이중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조직생활이 고달프기도 합니다. 제가 피부로 느끼는 바로는 조직속에서 저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저보다 권력욕이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욕과 출세욕은 때로 '가족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 포장되곤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았다. 가족을 위해.... 아니, 궤변이다. 가족을 총알받이로 삼았다. 제 한 몸이 소중했다. 조직 내에서 입장이 난처해질 때마다 가족을 핑계 삼아 인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알고 있었다. 가정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조직 속에서 제자리를 잃으면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그런 남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숨을 거둘 때까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p425~6
이 작품을 통해 여러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는 작가는 당신은 당당하게 진정한 '자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고 슬쩍 묻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누리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족을 핑계로 비겁한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딸이 가출하도록 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무지한 가장은 아니냐고, 조직내에서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진실을 추구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묻습니다.
#3. 인간의 실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기에 호불호가 심한 길고긴 이야기
인간의 속성과 감춰진 속살을 잘 드러낸 이 소설은 저로 하여금 과연 미스터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미스터리적 속성은 그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설정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소설의 테마가 되는 [64]라는 사건은 정작 누가 범인인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어떤 치밀한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범인을 찾으려는 피해자 가족과 수사과정에서 중요한 실수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했던 조직생리에 대해 관심을 보입니다. 결국은 여러 입장에 놓인 인간들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긴 이야기를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조직역학과 그 속에 휘둘리는 개개인의 투쟁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보니 이런 조직의 생리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관심이 없는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도 지루한 이야기가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읽는 내내 이런 생리를 가진 조직 생활을 경험했거나 적어도 풍문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군대라는 비합리적 조직을 경험한 남성들은 대체로 수긍하며 읽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읽다가 콧방귀를 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호불호가 확연히 갈릴 소지가 다분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너무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 수 없이 별점을 개방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직생활 자체를 싫어하고 너도나도 자신의 입지와 입장을 위해 오늘도 쉬지않고 잔머리를 굴리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대하는 저로써는 이 작품이 너무 재미있고 뼈속까지 공감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익명과 실명의 문제라던가, 언론과 경찰의 역할론이라던가 생각해 볼 꺼리가 더 많은 작품이지만 너무 길어지니 마음으로만 음미해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읽고난 끝맛이 오랜만에 개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