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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1. 가독성의 마술, 소설의 미덕은 킬링타임이던가? 인공미가 느껴지는 철저히 공식화된 계산식으로 엮인 상업적 플롯.
귀요미 뮈소 형님의 책은 처음입니다. 신작 [내일]을 읽으면서 계속 감탄한 것은 '이 양반이 정말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능력이 발군이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일]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리더빌리티(readability)"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잘 읽힙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원인 중에 술술 읽어지는 가독성이 8할은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처럼 피곤한 시기에도 출퇴근 길은 물론 자기전에도 이 책을 읽고 싶고 놓기 싫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작가의 능력이 새삼 대단함을 느낍니다. 이 작가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 받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중요한 점이 바로 이 가독성일텐데, 저는 이 작품을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가독성이 작가에게 상당히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이 작품의 가독성은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가독성이 너무 좋은데 전혀 몰입해서 읽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궁금하고 가슴조리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특히 가장 중요한 주인공과의 정서적 공명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작품속의 주인공을 보면서 '아, 나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는 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끝까지 제 3자의 입장에서 남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작품에 몰입한다는 건 작품속의 캐릭터에 공감하고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싶었던 이유는 내용이나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작가의 작가적 능력과 스타일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아, 이런 식으로 구도를 짜고 일을 벌여놨으니 어떻게 수습하고 정리하는지 지켜볼까?' 뭐 이런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야기의 전개와 변곡점, 독자들이 반전이라고 놀랄만한 지점을 애초에 설정해 놓고 탁월한 유연함으로 자연스럽게 잘 끼워 맞춰서 연결을 매끄럽게 해 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이 작가의 최고의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습니다.
너무 잘 읽었고 잘 쓰여진 이야기인데 끝맛이 못내 심하게 아쉬운 것은 이런 계산된 철저한 상업적 플롯과 그것을 풀어내어 "먹히는, 팔리는" 스토리를 뽑아 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킬링타임용 작품에 그친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2. 기술점수 100점, 예술점수 0점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를 보다보면 재미있는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 중 아주 기교좋게 멋지게 잘 부른 참가자에게 심사위원 박진영씨가 굳은 표정으로 단정적으로 평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술점수 100점, 예술점수 0점" 그리고는 부가적으로 "노래는 기술적으로 나무랄데가 없고 너무 잘 불렀는데, 너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러니까 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동이 없는거지"라고 설명해줍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딱 그런 형국입니다. 앞뒤로 너무나 딱딱 들어맞도록 멋지게 계산된 짜임새 있는 구조와 그 속에 녹아나는 자연스럽고 간결한 문체가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요소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싶을 정도로 치밀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또 잘 읽히고 납득할 만 합니다. 그런데 감동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느낀 이 작품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읽을 때,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 묵직한 여운이 남는 소설, 뭔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소설, 그리고 뭔가 감정의 정화를 느끼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내일]은 아쉽게도 저에게 남는 여운, 생각꺼리, 감정의 정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읽을 만한 코드를 기술적으로 잘 설계 해 두었다는 생각만 듭니다. 읽는 내내 그랬습니다. '아, 이런 식으로 풀어내셨구만?' 하는 생각은 작가는 한없이 뒤로 두고 작품만 생각하는데 상당한 방해를 했습니다.
#3. '타임슬립'이라는 식상한 소재, 설정의 한계...
이 작품이 정말 살아나느냐 아니냐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애초에 등장하는 식상한 '타임슬립'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것인가?' 였습니다. 타임슬립은 영화는 물론 소설에서도 오랫동안 지난하게도 다루어 왔던 이 설정이 시작부터 저에게 신선했을리 만무합니다. 백투더 퓨처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시간여행이나 시공간이 틀어진 상황 설정은 익숙하기도 하면서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오기는 힘든 소재임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설정이었다면 참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모습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아예 기존의 타임슬립과는 차별화되는 설정을 하던지요.
이 작품에서의 타임슬립 설정은 조금은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한 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최근에 방영중인 "별에서 온 그대" 같은 경우처럼 주인공이 외계인이다보니 무슨 설정이 나오든, 어떤 짓을 하던 다 용납됩니다. 왜냐면 "외계인"이니까. 이런거죠. 타임슬립이 되니까 실제로 안되는 상황들이 다 용납되고 연애소설 같던 이야기가 스릴러 비스무리하게 흘러가게도 되는 것이지요.
#4. 스릴러 작가들이 울고 갈 만큼 탁월한 스릴러인건가?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서 든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이 작품이 훌륭한 스릴러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꾸 삐딱선을 타서 미안하지만 이게 시작을 타임슬립으로 하고 심심하고 밋밋한 전개에서 반전과 변화를 고민하다보니 나온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딱히 스릴러나 장르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게 왠지 본격 스릴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생각할 때 훌륭한 스릴러라거나 연애소설과 스릴러의 절묘한 조합이라거나 이런 표현들이 상당히 불편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저 무늬만 스릴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명 잘 읽었습니다. 무난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이거참 재미있게 읽고 쓰는 내용이 족족 나쁜 말이기는 한것 같아 어차피 뭐라고 하든 알지도 못할 뮈소 형님에게 미안하기만 하지만 앞으로 특별히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지 않은 이상 이분 책을 골라서 집어 들 일은 없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