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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1. 기록할 것인가, 구하려 노력할 것인가? 명확한 주제의식
이미 제목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거의 "셀프 스포일러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려 했었나 싶을 정도의 제목입니다. 개인적으로 읽기전에 책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이미 가지고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늘 애정하고 칭송해 마지않는 세이초옹의 작품 중에 베스트에 한번도 거론되지 않는 작품이라는 것이 세이초옹의 컬랙션 중에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대변해주는 듯 합니다.
저야 뭐 말할 것 없이 재미있게 읽었지만 고전이라고 치더라도 미스터리로써 상당한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어찌되었건 이 책에서 던지는 주제의식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대형 사고나 참사의 순간에 그것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할 것인가? 아니면 단 한명이 되더라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입니다. 그리고 어느쪽이 되었건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관용을 배풀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해묵은 문제이기는 합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각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보니 똑 떨어지는 답이 나올 수도 없고, 앞으로도 합의에 이르기는 힘드리라 봅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활용함과 동시에 사회에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책 속에서 대형 교통사고의 현장을 찍은 작품이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 최고상을 수상한 것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심사위원은 이 사진을 최고상에 선정하며 이런 의견을 내놓습니다.
"이 현장감 넘치는 생생한 사진 한 장이, 운전자들의 경계심을 다잡고 교통사고가 감소하는데 일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참혹한 사진이지만 감히 연간 최고상으로 정하여 여기 발표한다." p10
하지만 이런 잔혹한 사진을 선정한데 대한 독자들의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촬영자로서는 인명을 구하는 것보다 '천재일우'의 결정적인 셔텨 찬스에 더 혹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이기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 '공명심'의 배후가 귀사의 연간상이라는 영예와 상금, 지면발표라는 명예를 향한 야심이 작용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p.21
이제 여기에 대한 해명과 투고가 반복되면서 지지와 반대가 엇갈립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상황을 두고 무엇을 더 중요시 하느냐와 개인의 기질과 성향, 가치관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갈리게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다가 반대의견을 가진 한 독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싶을 지경까지 갑니다.
"신문은 수백만 명이 접하는 매체입니다. 매일매일 암울한 뉴스가 보도됩니다. 적어도 사진만으라도 밝은 것을 보고 싶은 건 저만의 바람일까요? 흐뭇한 풍경이나 따뜻한 인간관계를 보여 주는 사진이 실린다면, 석간일 경우 일가족이 단란하게 모인 저녁 식탁에서 밝은 화제가 되어 흐뭇함을 줄 것이고, 조간이라면 세상에 희망을 느끼며 일터로 향할 수 있을 겁니다." p26
당연히 이 독자의 바람은 그만의 바람입니다. 신문뿐 아니라 지금으로 치자면 TV뉴스와 인터넷 뉴스에 밝고 따뜻한 광경이 지속적으로 나온다면 과연 사람들이 흐뭇해 할까요? 굳이 신문방송학 원론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들이나 신문, 방송 계통에 일하는 종사자가 듣는다면 비웃을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뉴스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청률은 바닥을 치다못해 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은 현실이지요.
자, 그러면 불행한 일을 목격했을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옳을까요? 바로 지체없이 구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 문제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선 불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여러 독자들의 지적처럼 과연 바로 한사람이라도 구하겠다고 뛰어드는 것이 가능은 한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 역사 플랫폼에서 실수로 한 사람이 선로로 떨어졌다고 합시다. 저쪽에서 열차가 플랫폼으로 진입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신은 지체없이 선로로 뛰어들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옳다면 말입니다. 머리속으로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가 처한 현실이 되면 이게 생각보다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바로 반응하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처럼 선로밑에 자주 내려가 본 사람이고 거기 구조를 어느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짧은 순간에 판단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승객들이 열차를 타기위해 기다리는 플랫폼 바로 아랫쪽에 사람이 피신할 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구조를 모르고 경험도 없는 이가 사람을 구해야된다는 마음만으로 어설프게 뛰어내려서 끌어올리려 했다가는 둘다 끔찍한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며칠전에 민방위훈련에서 응급구조 강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신이 아무리 돕고 싶어도 다치거나 부상당한 사람에게 도와주도 좋은지 의사를 확인하기 전엔 절대로 도와서는 안된다. 의견을 구하지 않고 도왔다가는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지게된다.'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 사람이 의식을 잃었을 경우엔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마침 그때 이 책을 들고 있었는데 이거 듣다보니 참 기분이 착찹했습니다. 돕는데도 법적인 책임을 먼저 걱정해야하다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가? 하고 말입니다.
불행한 일에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사람을 구하러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잘 훈련된 사람일 따름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과 내가 그 상황에서 행동하는 것은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유포하는 행위는 어떨까요? 사실 SNS가 활성화 되면서 트위터를 통해 사고를 실시간으로 알리고 그 사건소식을 접한 주변사람들이 즉각 도움을 준 미담을 통해 SNS의 유용성이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정보를 유출한다거나 끔찍한 사고를 여과없이 올려 여러사람을 당황케한 경우도 많습니다. 요컨대, 단순이 그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떻게 취급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이초가 그린 이 문제의식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동일한 무게를 지닌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매체의 모양새만 바뀔 따름입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지나칠 정도로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나칠 정도의 선명함 때문에 오히려 주제가 흐려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캐릭터와 서사가 한점 주제로 모아지는 느낌이 아니라 주제는 이미 던저져 내동댕이 쳐지고 그 곁가지만 계속 변죽을 울리는 느낌이 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책을 덮을 때쯤엔 이미 그 주제는 식상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킁..
#2. 오래된 작품에서 만나는 새로움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문기사, 독자투고 활용은 지금에 와서 보아도 매우 반갑습니다. 최근에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잘 적용했다는 나오키상 수상작품 '누구'를 보면 현대인의 SNS 사용을 잘 활용한 표현 방식이 눈에 띕니다(물론 우리나라의 '트위터탐정 설록수'에서 이미 써먹은 거지만 말입니다). 10만분의 1의 우연에서 언급되어 인용되는 기사나 독자투고 등을 보면 지금에 와서 독특하고 신선하다는 트위터 인용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오늘날 개개인이 1인 미디어가 되어 자신의 정치적 견해, 자신 또는 타인에 대한 생각, 먹는 것과 사는 것 등의 일상의 소소한 것들, 각종 정보 등을 노출하며 표현의 욕구를 드러냅니다. 이 가운데 정말 개인적인 것들도 있고 여러사람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1인 미디어가 모여 거대한 빅데이터를 형성합니다. SNS의 발달 이전에는 그저 신문사에 독자투고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정도였겠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고자하는 것은 결국 똑같다고 봅니다.
고전의 경우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설정과 표현들이 옛스러워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우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 처럼 그 당시의 상황에서의 일반적인 표현일 뿐인데도 지금 시대에 너무도 유사하게 맞닿아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합니다. 단순히 주제의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의 이런 면도 다분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아니 세상이 겉모양만 조금씩 바뀔 뿐 본질은 변함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양복만 입던 사람이 힙합복장으로 갈아입기만 한 것과도 같은 거랄까요?
3. 구조적 완결성의 아쉬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구조적인 부분이었습니다. 한 아마추어 작가의 공명심이 불러온 큰 사고와 그 사고 당사자의 애인이 개인적으로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는 시도가 나옵니다. 한편 그 과정에서 사고를 일으킨 아마추어 작가는 그 위기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해 선수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작품의 긴장감은 여기에서 형성됩니다. 과연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이 승리할 것인가? 진실을 덮으려는 사람이 성공적으로 덮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을 주목하면 꽤나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긴장감은 '어떻게?'의 긴장감일뿐 '누가?'의 긴장감은 아닙니다. 파헤치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쯤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상처럼 파헤치려는 자의 집요함이 승리하고 결과적으로 작가는 인과응보를 당합니다. 참으로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여기에 뜬금없이 대마초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지난하게 이어집니다. 마치 논문이나 보고서를 읽는 듯합니다. 그러다가 더욱 뜬금없이 복수의 칼날이 이 작품을 선정한 심사위원에게까지 미칩니다. 이정도 되면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복수를 자행하는 사람은 법적 정당성이 없습니다. 결국 그도 살인자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라도 공감을 얻어야합니다. 하지만 단순 동기유발자까지 없애려는 태도는 살인마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 역시도 좀 지나친 설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는 애인이 사고사했다고 일까지 그만두고 사건을 쫏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고도 지적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처럼 일을 안하면 당장 생계가 어려운 불황의 시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그만큼 사랑했기에 복수할 수도 있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히 삶의 목표가 없다가 생긴 집요한 삶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이 좀더 살려면 진행을 타이트하게 했어야 합니다. 세이초옹 스타일상 그게 아니라면 각 캐릭터의 속사정을 더 공감가도록 짰어야 할 듯 합니다. 설득력이 부족할 만큼 성긴 동기부여에 지나친 복수심은 그동안 세이초옹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그 만의 매력과 비교해 보아도 여러모로 아쉽기만 합니다.
이 작품이 이렇게 완성도가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작품을 단행본으로 쓴 것이 아니라 연재물로 썼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중간 중간에 서사와 무관할 만큼 지나치게 자세히 카메라 이야기며 대마초 이야기가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은 연재물의 분량 채우기 였을거라 여겨집니다. 지금에 와서 세이초옹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없는 우리나라에 이 양반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작품이 더 아쉬움을 크게 갖게 되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