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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개정증보판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마음에 착 달라붙는 제목짓기의 힘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헤르만 헤세라서 궁금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사실 책의 제목 때문에 흥미가 생겼던 책이었습니다. 소설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저는 당연히 몰랐고, 어느분도 이런 제목으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 있었단 사실을 아는 분이 없더군요. 실제로 이 제목은 헤르만 헤세가 붙인 제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이 문장이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처럼 맨 마지막 문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했습니다만 끝까지 책속에 이 문장이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 책 제목에 자꾸 신경이 쓰인 이유는 "밀고"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네이버 책에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그리움"이란 단어를 제목에 사용한 시나 에세이는 무려 6,885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밀고"라는 단어를 제목에 사용한 시나 에세이는 214건 이었습니다. 그만큼 흔하게 책제목에 쓰이는 단어가 아니란 뜻이지요. 그래서인지 희귀성이 주는 매력인지 몰라도 "밀고"라는 단어의 묘한 뉘앙스 때문에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라는 네이밍은 참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고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더욱 잘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사실상 입에 착 감기지는 않는 어색한 문장일 수 있지만 적어도 마음에 착 달라붙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앞으로 더 사랑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 물론 취향에 따라 제목이 마음에 안 들수도 있습니다. 우리 노여사처럼...(개취는 중요하니까 일단 의견이 다를 경우를 생각해서 도망갈 길을 열어두겠습니다)
#2. 100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자연과 세상에 대한 관조로의 초대
헤르만 헤세는 저와 정확히 100년의 나이차가 나는 사람입니다. 100년전의 유럽에 살았던 헤르만 헤세와 100년 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와 무슨 공통점이 있겠습니까만은 이 책에 실려있는 헤세의 자연과 인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나 감성적으로 세세하게 묘사한 글들은 저를 100년전 헤세가 거닐던 푸르른 자연 속으로 초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그의 옆에 딱딱하고 키낮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자연에 대한 감상들, 세상을 바라보는 헤세 특유의 따뜻한 시선들을 잔잔히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감각적이고 섬세하고 너무나 소탈한 표현들이 갖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헤르만 헤세가 살아내었던 100년 전의 세상은 평화를 사랑하는 그가 있기엔 참으로 혹독한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조국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말입니다. 반전주의자 인지 평화주의자인지 정의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자연과 평화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 만약 내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처럼 나라 사이에 경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 이 세상에는 아마 전쟁도 없고 국경 폐쇄도 사라질 것이다. 경계보다도 더 혐오스럽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전쟁터의 장군들, 혹은 대포들과 같다. (중략) 전쟁이 벌어졌던 수년 동안 우리 같은 방랑자들에게 그런 경계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감옥 같은 것이었던가! 그것들은 악마한테나 가 버리기를!" p.61
또 그는 구름과 정원, 숲, 숲속의 작은 길, 나무, 나비, 계절, 고향 등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상을 가지고 있고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표현들을 대하고 있으면 저 스스로 '아, 나는 무슨 나무토막 감성인가?'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래서 제가 시를 안 읽습니다. 정신만 멍해지거든요... 킁.
#3. 수채화를 그린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삽화의 매력
이 책의 책장을 넘겨 가면서 또 한가지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삽화였습니다. 삽화가 너무나도 글과 잘 어울려서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림에 대한 이해는 딱히 없으니 기술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느낌과 분위기가 제 옷을 입은 듯하다고나 할까요? 그러다가 헤르만 헤세가 수채화를 그리는 장면에 대한 묘사를 읽었습니다. '아, 이양반 그림 그리잖아. 것도 수채화!' 그제서야 저의 살얼음처럼 얇은 배경지식을 한탄했습니다. 아놔. 이 책에 삽입된 삽화는 바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었습니다. 아 그르니 자기 글이랑 이렇게 잘 어울리지 원 참! 그렇습니다. 이 삽화로 인해 이 책의 분위기와 감동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4. 그 외에 해야할 말말말...
애초에 잭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제목은 편집자가 직접 지으신 것 같습니다. 아님 말고.. 여튼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하여"라는 부재는 사실 좀 뜬금 없을 수 있는 주 제목이 책 잡힐까봐 살떨리는 마음으로 살포시 붙여준 표현이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렇더라도 부제를 빼고 읽어도 제목은 참 잘 어울립니다.
이 책 자체는 헤르만 헤세가 직접 편집한 하나의 완성된 책이 아닙니다. "나비에 대하여"랄지, 헤르만 헤세 전집 중 일부랄지 뭐 이런저런 글들에서 이 책의 흐름에 맞는 글들을 발췌해서 엮은 글이 하나의 완성된 책이 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전반적인 흐름이 부드럽습니다. 편집자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겠지요.
딱 두군데서 오탈자가 있었던 것이 옥의 티였기는 합니다. 이런 건 책읽는 소소한 재미중 하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