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컵을 위하여
윌리엄 랜데이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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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단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모두가 평범하고 젠틀하며 온화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특히 형편에 여유가 있을 때는 더욱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적당히 베풀며 "좋은 사람"의 옷을 입고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어떤 식으로건 위기나 위협이 닥치면 극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매우 견고하고 단단해 보입니다. 어떤 어려움에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튼튼한 우리와도 같은 안정감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더욱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깨지고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제도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 소설 [제이컵을 위하여]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앤디 바버"는 직업이 검사입니다.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가 보장되는 직업군이라 하겠습니다. 그저 "우리 아빠"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내인 로리는 그야말로 사교성 좋고 착하고 좋은 아내이자 엄마입니다. 그리고 아들 제이컵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외골수적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끔찍히도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묘사되는 면면을 살펴보아도 제이컵은 그리 매력적이거나 훌륭한 아이는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아이로 인해 평범함을 넘어 부러운 이 가정에 평화가 극단적으로 깨집니다. 깨어지고 헝클어지며 침몰하는 배와 같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부부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는 노력은 안타깝게도 힘을 모으는 방향이 아니라 각자 입장과 기질과 형편에 따라 매우 상반된 태도로 일관합니다.

 

   앤디는 살인 피의자로 재판에 회부된 아들을 보며 무너져내리고 있는 아내 로리에게 가쿠타 미츠요의 [공중정원]에서 등장했던 남편, 그리고 할머니가 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숨겨왔던 자기 가족의 내력을 밝혀버립니다. '나는 고백했으니 당신이 받아들이라.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당신 선택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이런 느낌이 되겠죠. 그리고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병적으로 강인하게 가족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반면 사교적이고 상냥하던 아내 로리는 받아들이기는 너무 힘든 상황앞에 스스로 내면이 무너지며 남편에게 원망의 화살을 끊임없이 날립니다. 당사자 제이콥은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매우 차분한 태도를 보입니다. 한 가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한 가족 각 구성원의 반응과 태도가 제각각입니다. 과연 누가 옳은 걸까요? 누가 더 적절한 것일까요?  

 

 

#2. 세상에서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은 우리부모가 아닐까?

 

   놀랍게도 부모는 대부분 자기 자식에 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어디있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건 대부분 초등학교 정도 이전에 한해서만 사실일 거 같습니다. 당신은 혹시 청년으로 자란 어느 시점에 당신의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는 이래저래한 아이야'라는 이야기에 화들짝 놀란 경험이 없으십니까? 저는 대학시절 아버지가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이에게 설명하며 자신만만해 하던 모습이 정말 황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 말고 누구 다른 사람이야기하나?' 싶을 정도로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아주 유년기 시절 나의 단적인 모습으로 나를 단정지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런 것이지요. 이런 성향은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내 아이는 이런 아이였으면, 내 아이는 이렇게 행동했으면..'하는 바램이 투영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 비춰보면 직장일이 바빠 아이를 자주 보지 못하고 놀아 주거나 대화를 깊이 나누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몰 이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앤디는 아들 제이콥이 한없이 착한 아이라고 확신을 넘어 맹종합니다. '내 아이는 이렇다. 이래야 한다'라는 믿음. 앤디는 그저 '내 아들이니까 살인을 했을리 없다'라는 믿음을 끝까지 이어갑니다. 반면 아내 로리는 어린 시절부터 보였던 아이의 성향을 되새기며 점차 '우리 아이 짓일 가능성이 있다'쪽으로 기울어갑니다. 이런 간극이 점점 부부를 갈라놓습니다. 누구의 시각이 맞는 것일까요? 누가 아이 제이컵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여튼 세월이 흘러도 아이를 가장 오해하고 모르는 사람은 부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 우리 일상을 깨며 극적으로 등장하는 삶의 잔인성을 마주하다.

 

   우리 일상이란 것은 늘 평범하고 때로는 구질구질하고 별반 특성이 없는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탓에 일상은 우리에게 적절한 안정감과 평안함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상성을 깨고 우리의 삶의 모양새를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것이 짧고 극적인 불행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좀더 극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질병이 찾아온다거나, 직장을 잃는다거나, 아이가 심하게 아프다거나 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상을 깨는 불행한 일이 닥치면 우리 인생자체에 대한 잔인성, 냉정하고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지인과 주변 인물들의 태도에서 오는 잔인성, 각종 SNS나 미디어를 통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껏 재단하는 익명의 잔인성 등에 마주 대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가족 구성원 간에 서로를 탓하고 공격하는 이기적인 잔인성 또한 만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는 무서우리만큼 잔인합니다. 또한 무언가 약점이 드러난 사람에게 더욱 가열차게 잔인함을 드러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짓는 사람'에서 처럼 사람들은 무언가 불확실하고 간단히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빨리 범인으로 몰아붙이고 공동의 처치를 해버리면 마음의 무거움을 덜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겪고 있던 그렇지 않던 이러한 다양한 삶의 잔인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속에 극적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런 잔인성의 피해자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이런 잔인한 현실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4. 1Q84의 세계로 들어서면 되돌아 갈 길이 없다?

 

   우리의 삶을 뒤흔들었던 잔인한 일들이 해결되면 우리는 그 불행이 오기 전과 동일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그 무거운 짐이 빨리 없어지기만을 바랍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모든 일이 잘 될것만 같은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 물질처럼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각자 구성원의 마음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변해버린 현실의 한계가 강고한 벽처럼 막아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두개의 달이 뜬 세상으로 건너가버린 것처럼 겉보기에 똑같은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불행을 경험하기 전과 그 이후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경계가 되고 맙니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는 일단의 사건이 해결 된 이후 상처를 봉합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심지어 상처를 잊고자 떠난 여행지에서 또 한번 비슷한 불운과 조우하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읽는 이를 멘붕으로 빠뜨립니다. 이 쯤되면 이것이 불운인지 필연인지 어지럽기만 합니다. 이 상황을 대하는 부부의 태도는 다시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역시나 의연하게 아들을 옹호하고 믿으려는 믿음의 태도를 보이는(그가 실제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앤디와 원래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며 더욱 극한 선택을 하게 되는 로리... 저는 누가 맞는지, 누가 옳은건지 아직까지도 결론을 못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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