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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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움직이는 건 질문이지 그게 널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야.”


워쇼스키 형제의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대사다. 가상의 세계에서 지내던 네오가 실제 현실로 나왔을 때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한 말이다. 질문이 없으면 목적지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목적지보다 중요한 건 바른 질문이다.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현대인과 근대인의 구분을 하면서 그 구분의 기준을 '질문함'과 '질문하지 않음'에 두고 있다. 질문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질문하지 않을 때 집단 속에 파묻혀 지낸다고 한다. 대답은 잘하지만 질문하지 못하면 기술은 뛰어나겠지만 장르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질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집단의 이야기 속에 살게 되지만 질문할 때 자기 이야기를 갖고 삶을 주도하게 된다. 질문하며 찾아가야 그 이야기에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랍비 힐렐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존재할까? 만일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가고 있는가? 나는 타인의 이야기 속 인물인가 아니면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은 질문의 책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묻고, 인간도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묻는다. 배철현 교수는 최근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두 권의 책을 냈다. 두 책의 각 장 제목은 모두 성서에 나온 질문들을 정리한 책이다. 목차만 펼쳐 놓고 보니 엄청나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피하고 싶다. 이 질문들과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아직도 내 안에서 이해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내용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들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볼 때마다 우리들 정신의 밭을 뒤엎는 듯하기도 하고 꺼져 있는 등불이 하나씩 켜지는 것 같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 


프롤로그에 나온 이 물음은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이나 작품 속 대상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에게 한 물음이다.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현실과 실존에서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실존은 가상의 상황이 아니다. 내가 지금 숨쉬고 살고 있는 여기가 실존이다. 하비 콕스는 이 시대는 ‘무엇을 믿느냐’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묻고 있으며 기독교는 교리나 도그마가 아니라 영성 시대로 진입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위해 우리들을 그 질문들 앞으로 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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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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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터널 속 시야로 데이터를 무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한정된 시야를 갖고서 겪는 모든 일들을 헤쳐 가야 하는 인생이다.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갈 수 없다. 질문해야만 한다. 어째서 질문해야 할까? 인생은 여행이기 때문이다. 순례자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끊임 없이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문하지 않는 여행자는 방향을 잃을 것이고 여행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것이다. 과학 분야는 쉬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한다. 그러나, 종교계(그리스도교)에서는 의심을 불온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단순한 의문도 드러내기 어렵다. 그것 때문일까? 구원과 자유를 얻었음에도 다시 근본주의의 울타리 안에 갇혀 버렸다.


폴 틸리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무오성의 개념을 확립시키면서 의심을 믿음의 요소에서 배제시켜 버렸다는 것,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복종해야 했고 그 후부터 믿음에 대한 무오한 진술에 의심의 개념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했으며, 결국 믿음이 정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질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나는 이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타성화되고 지적 영적 게으름 때문인지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즈음 배철현의 두 책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을 만났다. 우리는 질문 없이 정답을 얻는 것에 만족하는 경향이 매우 크지 않은가? 이 책들을 통해 지적 영적 칼날을 벼리게 하는 숫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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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발견 -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김찬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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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이야기로 빚어내고 그 의미가 타인에게 공명될 때, 인생은 '살맛'이 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백이 필요하다. 그 바탕화면에 떠오르는 삶의 흔적들을 건져 올려 자아의 빛깔로 아로새길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 <생애의 발견> p8.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말하려고 하면 어렵게 다가온다. 샤르트르는 인생이 B와 D 사이의 C에 의해 정해진다고 했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생은 生과 死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얼마나 경험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살아가는 경험, '살 맛'이다. 이 책에 의하면 살맛나지 않는 것은 자기 삶을 이야기로 말하지 못하고 그 의미가 타인에게 공명되지 않기 때문이다.안개를 뚫고 들리는 거위의 살아 있는 기척을 감각할 여백(박경리)이 없어서이고 길어야 두 시간,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의 간절함을 모르기 때문(신영복)이다. 살아있음을 맛보지 못하고서 무슨 천국을 얘기하겠는가. 


<생애의 발견>은 이 땅에서 사는 한국인들의 생애를 진지하게 성찰한 책이다. 예리한 사회적 통찰과 풍부한 문학적 자료 인용과 심오한(?) 유머가 곳곳에 섞여 지루하지 않게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헤메며 지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이 책을 통해서  ‘아, 우리 인생이 이렇게 지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살아있음을 더 깊이 경험해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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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 정해 소개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정하겠다.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기에 다른 이에게 알려 주고싶다. 참 좋다고 유익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예전에는 자신 있게 소개하고 초대했다. 그런데, 갈수록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내가 회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좋은 곳이라면 친구들에게 같이 와서 살자고 할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좋은 동네라고 자신하지 못해서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동네였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한 동네가 되어 가고 있어서이다. 정지석은 퀘이커리즘, 퀘이커교의 영성을 소개했다. 제목 그대로 초대이다. 어느 날 퀘이커 동네에 들어갔다가 이 동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버렸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 살다가 퀘이커 동네로 이사했다. 퀘이커 동네는 작은 동네이지만 그 사상과 영성의 영역은 광대하다. 그리고, 조용한듯 하나 그곳의 움직임은 세상이란 바다에 큰 물결을 일으킨다. 이 책은 복잡한 설명이 없다. 덤덤하고 소박하게 퀘이커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퀘이커 동네 사람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가.


퀘이커의 대표적 특징은 '침묵의 영성'이다. 그들은 예배로 모일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회의할 때에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내면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침묵 예배를 소개하면서 침묵 예배에 처음 참여할 때의 어색함과 충격을 얘기한다. 도무지 예배 같지 않은 예배라고. 여러 순서를 가진 기성교회의 예전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당연 우습고 허망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의 침묵 예배는 별다른 재료도 없이 양념과 간을 하나도 하지 않은 음식과 같을 것 같다.

이 책은 퀘이커의 영성을 '평화, 공공체, 단순함, 평등, 정직'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평화의 영성 : 퀘이커리즘은 초기부터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신앙을 선언했다. 평화의 영성은 단순히 수동적인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평화이다. 그래서 그들은 화해자가 되고 예언자가 된다. 개인인든 사회든 국가든 제외되는 대상은 없다. 왜 평화인가? 예수가 화해자요 예언자인 평화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영성 : 퀘이커의 공동체 영성은 예배 모임에서 드러난다. 이들의 영적 체험은 홀로 드릴 때보다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더 풍성해진다. 이들은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홀로만 경험하지 않고 함께할 때 더욱 풍성하게 경험한다. 공동체에서 함께 공감해 가면서 영적 충전을 이루고 돌봄의 관계가 된다.

단순 소박함의 영성 : 결혼식의 예로 퀘이커의 단순 소박함을 소개한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다. 별다른 순서가 없다. 저자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소박한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할 때 하나님과 만남이 쉽다는 것을 퀘이커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삶의 영성은 외형적으로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평등의 영성 :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무엇(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 퀘이커 사람들에게 평등의 영성은 당연하다. 펜들힐은 그런 당연이 실제로 실천되는 곳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돕고 노예해방 운동을 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인다.

정직의 영성 : 저자는 퀘이커 사람들을 두고 '앞뒤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정직한 신앙인이라는 얘기다. 퀘이커 정치인들이 나중에 정치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정직성 때문이라고 한다. 정직의 영성을 갖고 있기에 법정 맹세를 거부하고 오늘날 정찰제 가격 표시가 퀘이커 상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투철한 기부정신을 갖추고 있다.


평화, 공동체, 단순 소박, 평등, 정직....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지금의 사회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화롭지 않고 철저히 개별화 파편화되어 버렸으며 과도한 풍요를 추구하고 있다. 노골적인 차별이 행해지고 부정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곳은 둘째치고 대부분 종교단체의 모습이 그렇다. 이 다섯 요소들은 소금이자 빛과 같다. 이것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의 소금이자 빛이 되는 이런 요소들이 빠져 버렸기에 회의가 생긴 것이다. 나부터 그렇다. 자동차 연료가 바닥나면 주유소에 가면 되겠지만 평화, 공동체, 단순함, 평등, 정직, 이런 요소가 바닥나면 어디 가서 채울 수 있을까. 기독교가 공급해 줘야 하는데 채워놓은 게 없다.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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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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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모모>, 그리고 쓰지 신이치의 <슬로라이프> 이후 시간에 대하여 이토록 깊고 섬세하게 쓴 책은 처음이다.  <모모>에서는 시간도둑들이 사람들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시간을 아낀다면서 분주해진다.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을 읽다보면 그 시간도둑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간을 절약하는 사람들의 주된 방식은 속도이다. 사건들의 처리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시간은 절약되지 않는다. 시간은 멈추지도 않고 멈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냥 흐른다. 분주하게 다니다 보면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도둑들은 사람들이 놓친 시간을 먹고 산다.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회색이다. 

속도, 가속, 죽음, 조급함, 활동, 목표..., 이런 단어에 익숙한 사람의 시간에는 향기가 없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p65) 라고 했다. 많은 활동을 하며 목표에 도달하려는 이들은 지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속도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머무르는 일은 사치이자 악이다. 

<시간의 향기>에서는  생각과 마음을 넓히는 단어들이 나온다. 사색, 받침대, 충만함, 의미, 안식, 자유, 향기, 향인, 등등이다. 이 땅의 생명을 가진 개체들은 공간의 제한이 아닌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에 공간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의미를 깨닫고 사색하며 안식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주어진 시간 속에 가능한 오래 머물며 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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