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
바트 어만 지음, 이화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원제 <God’s Problem : How the Bible Fails to Answer Our Most Important Question Why We Suffer >, 나는 이 제목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에서부터 고통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고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고 있기에 그렇다. 제목만 보면 고통의 시작과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와 책임을 신에게 돌려 놓고 시작한다. 그리스도교를 떠난 사람답게 강건너에서 말하는 듯하다. 저자는 고통을 설명할 수 없고 이유와 원인을 모른다고 하는 코헬렛, 전도서 기자의 의견 외에는 성서의 모든 설명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바트 어만은 성경이 고통의 문제에 대답하는데(문제에 대한 해답과 해결에) 실패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이 다이다. 그 다음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바트 어만은 하나님에게 불만이 크다.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누군가를 공격하듯이 몰아 부친다. 이런 식으로 전개하기보다 대신 성경의 저자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 미숙하고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Why We Suffer?’, 이 물음은 ‘고통은 없어야 한다’, 혹은 ‘고통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로 하는 물음처럼 보인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 책임 소재를 확인하려고만 한다. ‘어떻게’에 대한 추구는 보이지 않는다. 인류의 진화는 이 고통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었다. Why We Suffer? 인간이 어째서 고통을 당하냐고? 神이 아니고 유한한 인간이니까. 그렇다고 체념이나 방관할 수는 없다. 그때 그때 부딪히면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해야 할 것이다. 神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고 닥친 현안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신을 찾는다. 알고 깨달으면 더 이상 神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성경은 고통을 겪으면서 각 시대 상황에서 나름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맞다 틀리다’로만 말할 것 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최선이자 한계임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 1장에서 저자는 책의 목적이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도록 돕기 위함이라고 했다(p37). 성서에서 고통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피고 그 안에서 고통의 해답을 찾겠다고 하고, 모순이 되는 것들, 문제가 되는 점을 살피겠다고 했다(p38).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모호하기만 하다. 제목에 ‘해답 answer’이라고 했는데, 적절한 단어 선택이 아니다. Problem이라고 했으니 Answer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전개한다면 열린 이야기가 불가능하고 닫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문제를 풀 수조차 없거나 구한 듯해도 다시 엉켜버릴 수 있고, 해답이라고 해도 그것은 불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보다는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대신 ‘왜?’와 ‘어떻게?’로 접근하고 고통의 의미를 살피고 성서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려고 했는지를 다루었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면 저자가 그쪽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어야 한다고 본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전적 이야기 <한나의 아이>에서 자신의 고통을 헤쳐 나가면서 ‘정답 없는 삶’을 얘기했다. 그렇다고 정답 없는 삶이니 자포자기 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표를 던지고 싶다. 인생의 시작과 과정과 끝, 그리고, 수많은 인생들이 얽혀 있는 삶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 바트 어만은 ‘고통은 진노한 신의 징벌’로 보는 성서의 이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2장). 대표적인 표현은 예언자들의 말이다. 그는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들의 관점을 일반화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어 3장에서는 앞서 지적한 예언서의 관점을 기초로 성서의 다른 부분을 비판하고 있다. 고통은 인간의 죄에 대한 벌로써 하느님이 내린다?(p93) 창세기를 비롯해 모세5경에 나타난 이러한 관점이 못마땅하다. 바트 어만의 논지는 아주 단순하다. 이어지는 장들마다 그는 줄곧 이런 식으로 고통에 대한 성서의 이해와 대응을 나열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한다. 말이 되냐 납득할 수 없다는 식이다. 죄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건너 뛸 수 없지 않은가. 저자는 죄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죄를 다루지 않고 고통에 대한 성서의 표현만을 갖고 말하고 있다. 만일 ‘고통은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성서의 저자와 그 시대 사람들이 왜 그런 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뤄주어야 한다. 또한, 예언서는 주로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접근하는 이해 방식인데 이것을 일반화하여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고통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 生卽苦, 삶은 苦海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이 되기를 기대한다.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오스의 매듭 을 칼로 잘라냄으로 해결했다고 하는데 고통이란 매듭도 그렇게 잘라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고통의 매듭을 잘라낼 칼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나무의 옹이처럼 생의 나이테에 남을 것이고 훗날 잘려지고 나서야 고통의 무늬로 드러날 것이다.


* 고통을 대하는 가장 솔깃한 방법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세상과 자신에게서 고통을 숨기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해 잘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장하는 길이 아니다. 성서 본문의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있지만 프레드릭 비크너는 <어둠속의 비밀>에서 달란트 비유를 갖고 고통을 설명했다.  비크너는 고통을 회피하고 숨기려는 태도를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둔 청지기와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묻혀버린 삶은 그 자체가 어둠이고 울음이고 이를 가는 일이며, 우리를 그리로 내쫓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고. 그 대신 고통의 청지기가 되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깨어 있고, 벌어지는 일의 기쁨뿐 아니라 고통에도 자신을 열고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어 접촉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면 고통이 값진 진주가 된다고. 그리고, 고통에 짓눌려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을 통해 인간미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매플 목사의 설교 한대목이다. 


“… 하지만, 오, 선원 동료 여러분! 모든 고통의 우현에는 확실한 기쁨이 있고, 고통의 밑바닥이 아무리 깊다 한들 기쁨의 꼭대기는 더 높습니다.” 


바트 어만의 <고통~>은 성서가 고통을 대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고통의 현장에서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동장으로 나가 보지 않고 관중석에서만 성서라는 오래된 고통 안내문을 들고 투덜대고 있는 것만 같다. 바트 어만은 고통의 뒷부분을 의식하고 고통의 좌현만 보고 말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고통의 배에 올랐을 때는 어떨까? 고통의 밑바닥에서 기쁨의 꼭대기를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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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자 2021-02-2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의 고통은 어찌보면 필연이지요. 인간의 고통을 배가하는 큰 원인의 하나는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며 특히 분노하고 심판하는 신 이지요. 2500년전에 누가 그러하다 합디다. 많은 현자들의 가르침을 종교라는 이름의 덧씌움으로 인간은 자유의 대부분을 또한 잃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