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라 파파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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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좋아요. 산미도 강하지 않아서 거부감 없이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강배전으로 볶지않아서 만족하고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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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으로의 초대
틸든 에드워즈 지음, 양혜란 옮김 / 한국샬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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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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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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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은 미치는 것이다. 또 읽는 것은 혁명이다. 그렇기에 차마 읽을 수 없다. 미치게 될까 혁명에 끌려 가게될까 해서. 이 책은 읽다가 졸고 있는 나를 깨우는 죽비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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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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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잘 정리된 글과는 달리 논리가 없고 두서가 없으나 그 어떤 글보다 진솔하며 진정성을 가져서 좋다. 소로의 다른 글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의 편지에도 소로의 정신과 사랑과 삶이 같이 녹아져 있다. 읽다 보니 몇몇 편지들이 블레이크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내게 보낸 편지처럼 다가왔다.


산을 인위적인 벽으로 둘러싼 곳보다 더 진정한 신전이라고(p68), 그리고, 교회에 들어설 때 드는 경외감을 산 정상에서 느낀다고 한다(p171). 동의한다. 머리로가 아니라 내가 발로 몸과 마음으로 하는 동의다. 또한 어떤 곳이든 그 장소를 신전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장소에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 안에 신성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동의한다. 소로는 인간이 세운 신전보다 자연이 세운 신전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과 말은 매우 촘촘한 옷감이다(p105). 그 촘촘한 옷감으로 외투를 짓듯이 진실한 마음과 진정한 태도로 글을 썼다. 옷이 낡아 가듯이 몸과 나이가 낡아 가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갈수록 촘촘하게 다져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른 글들은 낡아 사라져 간 것과 달리 그의 글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생각에 옷을 입히고 있다.


여행을 사랑하는 자 소로! 인생은 나그네길, 순례자, 여행자, 여행자는 가볍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툭툭 털고 나아간다. 소로의 말처럼 얼마나 깨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얼마나 빠르냐, 얼마나 멀리 가느냐보다는  어디론가 향해 있음도 중요하다. 소로는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p128).


"... 내가 가진 재산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미소가 지어집니다.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거내 서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p148)

이 말에 조선시대 문인 송순의 시조가 떠오른다.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삼간 지었나니/ 반칸은 청풍이요 반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김화영, <바람을 담은 집> 서문에서) 청풍명월은 너무 커서 집 안에 들여 놓을 수 없다. 그러니 둘러 다니며 볼 수 밖에. 소로의 "소유보다 향유"가 이 시조와 일맥상통한다. 존재는 소유가 아닌 누림과 향유로 더욱 깊어져 간다. 소유 욕망은 인생을 가라앉게 한다. 그러나 존재의 욕망은 여행자요 순례자로 나아가게 한다. 그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인가? 소로의 정신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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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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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종교학자와 신학자, 셋이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많이 어색해 보인다. 같은 나무의 가지들이고 같은 고통을 느끼고 같이 새로운 변화해 가야 하는 분야임에도 마주 선 모습이 낯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분야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쪽은 합리적 사고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관념적이고 신비적인 사고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과학은 절차와 과정을 영역으로 삼고 종교는 가치와 의미를 영역으로 삼는다.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고수하면서도 치열한 다툼을 한다. 그럼에도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같은 땅과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빛을 쪼이며 살아야 하기에 그래야만 한다. 계시록과 아인슈타인과 다윈이 한 위의 말들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한 말들이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같은 자리라는 점은 잊지 않아야 할것이다.


대체로, 나는 신재식의 시각과 설명이 가깝게 다가 온다. 그는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세계와 관계 갖는 역동적인 신’이며, 우주와 역사가 열려 있고 약속이 있다는 ‘종말론적 개방성’(p424)을 주장한다.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문제는 이것들 중단시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명에 대한 설명은 한 가지 수준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진화론적 유신론>을 지향하는 신재식은 두 가지 태도를 갖는다. 하나는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따른다는 것, 또 한 가지는 진화와 창조를 양자택일의 관계로 보지 않고 신학에 유용한 개념으로 본다. 신재식이 언급하듯이 안타까운 점은 신학은 post-modern에 와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pre-modern을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p442). 교회는 늘 뒷북이다. 주류에 있어서 일까. 변화는 변방과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인데 교회의 뒷북은 이런 측면과 연관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과학과 종교, 둘은 구분이나 구별은 되나 분리는 못한다. 거기엔 중첩되어서 복잡하고 모호한 부분들이 많다. 인간에게, 생명계 전체가 모호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이 땅과 세상, 우주와 역사에 시공을 지나면서 그 모든 게 뒤섞여 있다. 서로 겹치고 맞물려 있으며 수천 년 시간의 역사를 거치며 퇴적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는 더 크게 자신을 열어야 하고 과학은 더욱 겸손하고 신중해야 한다. … 무엇보다도 과학이란 틀, 종교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후반에 김윤성이 말하듯이 ‘궁극성에 대한 추구’의 정신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며, 경이와 경외의 경험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신비적, 영성적, 경건한 자연주의자이고 싶다. 과학과 종교를 분리하지 말자. 서로 공명하면서 우주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더듬어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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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4-27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