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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 정해 소개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정하겠다.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기에 다른 이에게 알려 주고싶다. 참 좋다고 유익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예전에는 자신 있게 소개하고 초대했다. 그런데, 갈수록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내가 회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좋은 곳이라면 친구들에게 같이 와서 살자고 할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좋은 동네라고 자신하지 못해서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동네였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한 동네가 되어 가고 있어서이다. 정지석은 퀘이커리즘, 퀘이커교의 영성을 소개했다. 제목 그대로 초대이다. 어느 날 퀘이커 동네에 들어갔다가 이 동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버렸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 살다가 퀘이커 동네로 이사했다. 퀘이커 동네는 작은 동네이지만 그 사상과 영성의 영역은 광대하다. 그리고, 조용한듯 하나 그곳의 움직임은 세상이란 바다에 큰 물결을 일으킨다. 이 책은 복잡한 설명이 없다. 덤덤하고 소박하게 퀘이커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퀘이커 동네 사람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가.


퀘이커의 대표적 특징은 '침묵의 영성'이다. 그들은 예배로 모일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회의할 때에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내면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침묵 예배를 소개하면서 침묵 예배에 처음 참여할 때의 어색함과 충격을 얘기한다. 도무지 예배 같지 않은 예배라고. 여러 순서를 가진 기성교회의 예전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당연 우습고 허망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의 침묵 예배는 별다른 재료도 없이 양념과 간을 하나도 하지 않은 음식과 같을 것 같다.

이 책은 퀘이커의 영성을 '평화, 공공체, 단순함, 평등, 정직'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평화의 영성 : 퀘이커리즘은 초기부터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신앙을 선언했다. 평화의 영성은 단순히 수동적인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평화이다. 그래서 그들은 화해자가 되고 예언자가 된다. 개인인든 사회든 국가든 제외되는 대상은 없다. 왜 평화인가? 예수가 화해자요 예언자인 평화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영성 : 퀘이커의 공동체 영성은 예배 모임에서 드러난다. 이들의 영적 체험은 홀로 드릴 때보다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더 풍성해진다. 이들은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홀로만 경험하지 않고 함께할 때 더욱 풍성하게 경험한다. 공동체에서 함께 공감해 가면서 영적 충전을 이루고 돌봄의 관계가 된다.

단순 소박함의 영성 : 결혼식의 예로 퀘이커의 단순 소박함을 소개한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다. 별다른 순서가 없다. 저자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소박한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할 때 하나님과 만남이 쉽다는 것을 퀘이커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삶의 영성은 외형적으로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평등의 영성 :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무엇(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 퀘이커 사람들에게 평등의 영성은 당연하다. 펜들힐은 그런 당연이 실제로 실천되는 곳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돕고 노예해방 운동을 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인다.

정직의 영성 : 저자는 퀘이커 사람들을 두고 '앞뒤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정직한 신앙인이라는 얘기다. 퀘이커 정치인들이 나중에 정치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정직성 때문이라고 한다. 정직의 영성을 갖고 있기에 법정 맹세를 거부하고 오늘날 정찰제 가격 표시가 퀘이커 상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투철한 기부정신을 갖추고 있다.


평화, 공동체, 단순 소박, 평등, 정직....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지금의 사회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화롭지 않고 철저히 개별화 파편화되어 버렸으며 과도한 풍요를 추구하고 있다. 노골적인 차별이 행해지고 부정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곳은 둘째치고 대부분 종교단체의 모습이 그렇다. 이 다섯 요소들은 소금이자 빛과 같다. 이것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의 소금이자 빛이 되는 이런 요소들이 빠져 버렸기에 회의가 생긴 것이다. 나부터 그렇다. 자동차 연료가 바닥나면 주유소에 가면 되겠지만 평화, 공동체, 단순함, 평등, 정직, 이런 요소가 바닥나면 어디 가서 채울 수 있을까. 기독교가 공급해 줘야 하는데 채워놓은 게 없다.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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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공지영의 르포르타주를 읽으면서 나는 그 현장 속으로 끌려 들어 갔다. 고통스러웠고 수치심과 분노가 목까지 차 올랐다. 모두가 그랬듯이 당시 그 사건을 관전하듯 보고 지나친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펴 들었다. 

의자놀이, 소시적 즐겁게 즐겼던 놀이를 제목으로 달았다. 씁쓸하고 무섭다. 놀이에서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 술래가 되어 단순 벌칙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현실에선 격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한다. 이 현실은 술래들에게 등을 돌려 버린다. 결국 술래들은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만다. 아무런 유서 없이. 그렇게 끈을 놓아 버린 이들이 22 명이나 된다. 자살의 이유는 개인적 이유가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몰아 버렸다는 이유다.  "사회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 사회에서 나가달라고."는 한 노동자의 말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의자놀이에서는 의자 수를 참여자들의 수보다 하나 모자라게 놓는다. 쌍용자동차 사태에서는 2,646 개의 의자를 치워 버렸다. 의자를 찾지 못한 2,464 명 중 1,000여 명의 사람들이 파업에 참가했고 자본과 권력은 그들을 사냥하듯이 진압했다. 인간사냥이다. 그들은 세상의 구조적 폭력에 힘 없이 희생당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소설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급했다. 그는 23번 째 자살자 소식을 듣고싶지 않았다. 그는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써 내려갔다. 

돈! 그 돈이 모이면 자본이 된다. 돈에는 인격이 없다. 자본 앞에서 인격은 무참히 밟히고 생명은 풀처럼 베이고 꽃처럼 떨어져 짓밟힌다. 인생은 부속이 되어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당한다. 자본은 모호하다. 타인의 희생으로 자기 배를 불리는 이들은 그 모호함 속에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그 전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자본의 철저한 배제 전략, 숨 쉴 틈 하나 주지 않는 고립과 낙인, 그리고 무대응, 공동체의 붕괴 땅위에는 관심이 없고 갈등을 피할 핑곗거리는 풍부하다는 것 등이라고 혹자는 말했다. ...... 쌍용자동차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앞으로 우리를 고용하고 월급을 주고 해고하게 될 자본은 대개 쌍용 자동차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해고하는  것도 이런 자본일 것이다.

'인간'은 '사람 사이'를 의미한다. 혼자로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함께 살아야 '인간'이다. 의자놀이는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 더 이상 의자놀이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의 구호는 이거다. 

"함께 살자 함께!" 
즉, 인간답게, 인간처럼 살자는 말이다. 자살의 원인은 고통이 아니라 '절망'이다. 절망에 빠지면 살아도 산게 아니다. 절망하면 삶의 끈을 잡을 힘이 빠져나가 버린다. 르포르타주 끝에서 작가는 절망하지 않는다. 꿈을 꾼다. 해고도 차별도 폭력도 없는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평화를.

혼돈, 지연, 분열. 저자가 카톨릭 피정에서 들은 악의 특징들이다. 그들은 자본과 권력과 법 뒤에서 대낮에 땅 위로 당당히 휘젖고 다닌다. 혼돈과 지연과 분열 속에선 저쪽을 상대할 수 없다. 싸움을 위해선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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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몸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세 가지 물건이 있다. 휴대폰과 테블릿 PC와 책이 그것이다. 이 셋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을 선택할 것이다. 다른 두 개가 없다면 많이 불편하겠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리라. 그러나, 책이 없다면 나는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없이 하루를 떠밀려 지낸 날은 심한 정신적 갈증을 느낀다. 책을 읽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 마치 내 머리 속에 비계살이 들어차는 듯한 느낌이든다.


나는 하는 일의 특성상 책을 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유가 멈춰지면서 게을러지고 정신적 시력 저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용돈의 일정 부분을 책을 구입하는데 고정 지출해야 하고 그렇게 많지도 않은 책 때문에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 센터 사람들 눈치를 보기도 한다. 만약 진로를 정할 때 이쪽 분야가평생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을 알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산모는 잘 먹어야 태아가 건강하듯이 내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야 내가 돌보는 이들이 건강하게 된다. 종종 피곤함과 무력감 때문에 책읽기가 부담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맙기만 하다. 책읽기를 통해 사유의 여정에서 현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읽기는 스스로 게으르지 않게 하고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조절장치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고독을 견딜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면 사고의 지평을 넓게 깊이 확장시키고 있다.


이권우의 <호모부커스>는 상당한 부분에 공감이 갔다. 책좀 읽었다고 잘난척하고 있던 내게 죽비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수 많은 책읽기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읽기는 무엇보다 자기성찰을 위한 거울이 된다. ‘무언가를 넘어서지 않았다는 공자의 불유구를 알게 되었다. 책만 아는 바보 간서치(看書痴) 이덕무를 만났다. <주자어류>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죽비를 얻어 맞았다. 그 죽비 소리는 컸다. ‘마치 칼이 등 뒤 있는 것 같은 자세로 읽어라!’면서 내리쳤다. 그 만큼 긴장을 풀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 읽으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책읽기는 여투기다. 하지만 증권투자가 아닌 저축하기다. 책읽기는 순간 대박을 터트리는 일은 없다. 오래 여투다 보면 어느 수준에 이르러 인생을 든든히 받쳐준다.


저자는 1부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말하면 이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한 칼럼에서 깊은 각성을 한다. 그 칼럼에서는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했다.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세상은 어떤가? 타인에 대해 문을 열지 않는다. 이익이 되는 때에는 기꺼이 열지만 그렇지 않으면 늘 폐쇄시켜 놓는다. 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갖추느냐 못 갖추느냐에 따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회는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느냐 분리된 공동체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이 부분은 내게도 이크!’가 된다.


여기까지는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고 그 다음 2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이다. 저자 이권우는 책읽기라는 여행에 훌륭한 가이드이다. 독자의 머리 속에 그림을 잘 그려준다. 해설과 설명이 아주 적절하다. 책읽기를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가는 마음으로 하라고 한다. 쉼표를 찍고 맑은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성찰해 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천천히 읽는 자에게 복이 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을 인용해 준다.


책읽기는 지식의 향연이 다가 아니다. 거기엔 만남이 있다. 저자와 독자와의 만남이 있고 저자를 만난 그 독자는 다시 다른 사람들과 만난다. 그 만남은 다시 다른 글쓰기와 대화와 토론을 하게 하고 그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가게 한다. 괜찮은 책벌레를 만나 기분이 좋다. 책읽기는 기쁨이다. 읽으려고 기다리는 책이 30여 권이나 된다. 당분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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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징 하나. 비유를 통해 딱딱한 경제 원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사다리를 차 버렸다’, ‘치수가 하나 뿐인 황금 구속복’ 등 매우 적절한 비유를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중요한 개념들과 오류들을 알기 쉽게 지적해 준다.

특징 둘. 방대한 역사 자료와 개인의 체험, 각국의 경제 지표와 현황에 대한 풍부한 근거들이 커다란 설득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금의 사마리아인들이 왜 ‘선한’이 아닌 ‘나쁜’에 해당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정당하고 올바른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경제 원리는 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으로 1980년대 이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중은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이 마냥 최선인 줄 알고 있다. 그냥 흘러 가는대로 흐름을 따를 뿐이다. 저자 장하준은 그 흐름에 과감히 역류를 일으키고 있다.



1.   세계화의 진실 : 보호무역은 과소평가되고 있고, 제국주의적 요소는 축소되면서 개발도상국들은 잘못된 경제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모두에게 치수가 하나 뿐인 황금 구속복을 입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이 황금 구속복을 입은 나라들은 국영 기업의 민영화, 안정된 물가 수준, 정부 조직의 규모 감축, 재정 균형의 달성, 무역의 자유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 해제, 외환 자유와, 등의 치수에 맞춰 체형을 조절해야 한다. 체형에 맞게 옷을 입혀야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그 반대로 옷에 맞게 체형을 바꾸라는 세계화 주장은 정말 억지다.

2.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이력 들추기 : 대표적 나라로 영국과 미국이 도마에 올랐다. 선진국들은 지금까지의 경제 수준이 되기 전에는 자유무역을 하지 않은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 그런 모습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이다. 뒤에 올라오려는 이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당연 경쟁국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계속 비판 일색으로 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긍정적 정책으로 미국의 마셜 플랜을 아주 좋게 평가한다. 마셜 플랜은 이웃을 끌어 주고 함께 가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이력을 들추는 작업에서는 역사적 경제적으로 정확한 자료들을 다룬다. 키케로의 말을 인용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3. 자유무역은 정답이 아니다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이 말은 개도국들이 가능한 빨리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비꼰 말이다. 개발도상국의 산업이 너무 일찍부터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자유 무역주의는 단기간을 위한 이론이지 장기적인 것과 관련된 이론이 아니다. … 부자 나라들은 자국의 생산자들이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만, 그것도 대개는 점진적으로 무역을 자유화했다.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p118~11)9이 부분은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저자는 속도를 늦추자고 한다. 개도국들은 나름의 격리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 조급한 정책은 개도국들의 자유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나쁜 사마리안인들은 관세를 평등하게 제시하자고 한다. 그것은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얼핏 보면 아주 공정한 것 같다. 하지만, 경기장이 평평한 것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외국 자본 : 원조, 부채, 투자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외국 자본에 대해 저자는 외국 자본이 결코 테레사 수녀님이 아니라고, 군사력보다 더 위험하다는 표현을 한다. 더 나아가 외국인의 직접투자는 ‘악마와의 거래’ 일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드넓은 바다와 같은 부자 나라의 자산은 단 한 방울만 잘못 움직여도 개발도상국의 금융 시장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p139). 외국인 투자는 경제 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5. 민간기업과 공기업 : 민영화의 함정을 봐야 하고 공기업의 단점만이 아닌 성공 사례도 봐야 한다. 단기간에 집중하지 말고 길게 보면서 실용적인 태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다는 것.

6. 지적 소유권 : 지적 소유권 철폐가 아니라 지나친 보호로 인해 생기는 악영향을 줄이자는 주장이다. 지적소유권 보호 기간을 단축하고, 독창성 기준을 높이며, 강제 인가와 병행 수입의 조건을 완화하자는 내용이다.

 

바둑에서는 상대의 실력이 낮으면 고수가 4집, 6집, 혹은 9집, 이렇게 몇 집을 잡혀주고 시작한다. 장기를 둘 때에도 고수는 중요한 말을 적당하게 떼어 놓고 경기한다. 볼링 경기에서도 사전에 초보자의 핸디캡을 잡아주고 경기에 임한다.

저마다 고지를 선점하여 어떻게든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수고를 보상 받으려면 당연 선점한 지위를 계속 누려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공정함이 필요하다. 자선 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함께 살고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 장하준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1> 생산 능력의 향상에 투자하지 않으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 개방적 외국인 투자 정책, 자본 시장 개방은 장기적 프로젝트를 흔들어 놓고 해당 국가들의 능력의 범위를 제한하기 때문에 당장은 어려워도 생산 능력을 위한 투자를 하라는 것이다. 간단하면서 강력한 원칙이 있다.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개선하라”

2> 제조업을 잃지 않는다. 천연자원에만 의존하면 위험한다. 생산성이 높은 서비스업의 주요 원천은 제조업이다.

3>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뛰자. 평평한 경기장, 언뜻 보면 정당한 듯 하지만 체급과 실력이 다른 선수들은 같은 조건에서 뛰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 편파적인 심판들이 문제다.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와 같은…, 그리고 FTA와 같은 불공정한 리그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수준이 다른 선수들의 경기는 결국 불공정한 것이 된다고 한다.

 

☆ 생산 능력의 향상 – 개인의 생산 능력, 공동체의 생산 능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시장에 대항하라’는 말이 내게는 ‘세상에 대항하라’는 말로 들렸다. 무엇으로 세상을 상대해야 할까?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생산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조업이다! 그 생산 능력은 제조업에서 나온다. 공동체에서 이 제조업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

갈수록 경기장이 기울어져 간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아래쪽으로 몰리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아래쪽에 치우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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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양]은 너무 불편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얼룩지고 지저분한 몰골로 거울 앞에 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주제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고, 제가 속해 있는 쪽(?)이 고통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불가항력의 문제를 불성실하게(혹은 너무 피상적으로) 대하고 있서서입니다. 영화 [밀양]은 아주 불편하게 했지만 오히려 감사와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쪽이 아닌 다른 쪽에서 이쪽에서 해야 할 물음을 진솔하게 해주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이도 사색을 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성찰도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이 영화가 불편했지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습니다. 믿음, 용서, 고통, 체험, 전도, 인생, 사랑, 이렇게 일곱 가지 부분입니다. 각각의 주제는 신앙에 소중한 요소들입니다. 사실, 이 주제들은 얼마나 많이 오염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고결한 빛깔과 향기를 내지 못하고 변색되고 냄새가 납니다. 지난 해 영화 [밀양]을 깊이 읽은(?) 내게 그 영화를 다룬 이 책은 너무 반가운 내용입니다.

1. 하나님 像을 수정하자

기존의 하나님 모습은 ‘일방적으로 강한 하나님, 드러난 하나님,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 무슨 일이든 단번에 해치우는 하나님, 강력하고 신속한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독선적이며 일방적이고 무례하며 오만하다고 비판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 모습과 달리 저자는 ‘숨어 계시고, 낮은 데로 임하며, 조용히 머물러 있고, 감싸시는, 대면하고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후반부에서도 저자는 불타는 햇볕으로가 아니라 비밀 햇볕으로, 태풍으로가 아니라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P123). 그와 같이 ‘그 사람의 신관이 그 사람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자가 틀리고 후자가 맞다는 이원론적인 구분은 아닐 것입니다. 전자는 부성적 모습이고 후자는 모성적 모습입니다. 문제는 한쪽 모습 만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왠지 이 나라 교회들이 부성적 하나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싫습니다. 개인적인 내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교회들의 부성적 신관은 참 아버지의 느낌이 나지 않고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강하고 빠른 속도에서는 좀처럼 감각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좋습니다.

 

2. 용서 자판기 

영화 [밀양]에서 가장 마뜩잖은 장면, 가장 화가 나는 장면은 신애가 교도소에 있는 박도섭을 찾아 가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러 간 것이고 박도섭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말합니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의 기독교가 용서를 얼마나 값싸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용서에 대한 그와 같은  취급 방식을 ‘용서 자판기’ 라고 했습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내용물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회개’ 라는 동전을 넣으면 덜컥 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건 아닙니다. 김영봉은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용서에 필요한 3R을 확인해 줍니다. 뭐냐면, 회개  Repentance와, 보상 Restitution, 개혁 Reformation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들의 컨텐츠를 잘 포장해 놓았습니다. 복음과 신앙의 삶을 그럴 듯 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강조하면서 기성품처럼 쌓아 놓았다가 전해주듯이 합니다. 값싸게, 값 없이 손쉽게 전해줍니다.

사실 용서에는 얼마나 비싼 값이 치러졌습니까? 예수의 고난과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값을 수 없는 죄값이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그분의 고난과 희생의 값마저도 덤핑처리하듯이 대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고난과 고통 앞에서

고난과 고통 앞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합니다. 나 부터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디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보니 고통과 고난은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끌어 안든지 맞서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양]에서 신애는 연속적으로 닥쳐 온 고통 앞에서 계속 도피하고자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왔고, 아들이 죽자 신앙을 가졌고, 끝내는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냥 보면, 용기 있는 것 같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약한 자신을 위장해 보려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오기일 수도 있고 나름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신애와 같은 우리들을 향해 던지는 저자의 말 가운데 두 가지를 기억해 봅니다.

하나는 고난을 끌어 안으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의 심장에 들어가 그 심장을 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p76 이 말은 얼마나 힘이 있는가요?

또 다른 것은 이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참 인생을 살자고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신애가 자기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입니다. 그녀를 향하던 카메라는 그 다음 그녀가 앉은 자리 옆 지저분한 곳에 내리고 있는 비밀 햇볕을 비추면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 끝까지가 연극 무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신애는 도피적이고 거짓된 무대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봅니다.

고난을 끌어 안으라고, 이제는 도피와 거짓의 무대 위에서 내려와 살라고 하는 저자의 강조는 저의 마음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4. 세밀한 영적 돌봄

"안 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쪼금 마음이 편하고, 그렇데예"

교회를 두고 하는 종찬의 대사입니다. 이 말은 마치 교회에게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저자는 교회가 겉돌고 있다고 하고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구원의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성찰이 담긴 의문을 갖습니다. 이 현실에 별 볼일 없는 기능을 하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수 많은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교회는 구원의 통로를 발견하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연극의 무대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자는 세밀한 영적 돌봄을 역설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영적 돌봄 없이는, 신애 같은 사람들이 생기는 일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p174

맞는 말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공장이 아니라 농장이어야 합니다. 자꾸만 공장化 되어가는 현실이 버겁습니다. 효율과 대량생산과 많은 인원, 획일성과 신속성, 기계적이며 정확한 처리를 강조하는 공장 환경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신속하게 생산량을 늘려야 하기에 세심하게 돌볼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서투른 공장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농장은 공장과 다릅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는 가지, 잎, 꽃, 열매 하나하나에 세밀한 손길을 다합니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직접 돌보아 줍니다. 그래서, 농부는 익은 열매를 손에 얹었을 때 가장 기쁘다고 합니다. 그 농장에는 바람과 햇빛, 비와 해오름과 해내림 속에서 생명들이 돌봄을 받습니다. 그런 생명의 농장에 하나님은 항상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와 주십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런 영화 [밀양]을 통해 제대로 성찰해 낸 이 책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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