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 정해 소개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정하겠다.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기에 다른 이에게 알려 주고싶다. 참 좋다고 유익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예전에는 자신 있게 소개하고 초대했다. 그런데, 갈수록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내가 회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좋은 곳이라면 친구들에게 같이 와서 살자고 할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좋은 동네라고 자신하지 못해서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동네였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한 동네가 되어 가고 있어서이다. 정지석은 퀘이커리즘, 퀘이커교의 영성을 소개했다. 제목 그대로 초대이다. 어느 날 퀘이커 동네에 들어갔다가 이 동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버렸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 살다가 퀘이커 동네로 이사했다. 퀘이커 동네는 작은 동네이지만 그 사상과 영성의 영역은 광대하다. 그리고, 조용한듯 하나 그곳의 움직임은 세상이란 바다에 큰 물결을 일으킨다. 이 책은 복잡한 설명이 없다. 덤덤하고 소박하게 퀘이커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퀘이커 동네 사람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가.


퀘이커의 대표적 특징은 '침묵의 영성'이다. 그들은 예배로 모일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회의할 때에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내면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침묵 예배를 소개하면서 침묵 예배에 처음 참여할 때의 어색함과 충격을 얘기한다. 도무지 예배 같지 않은 예배라고. 여러 순서를 가진 기성교회의 예전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당연 우습고 허망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의 침묵 예배는 별다른 재료도 없이 양념과 간을 하나도 하지 않은 음식과 같을 것 같다.

이 책은 퀘이커의 영성을 '평화, 공공체, 단순함, 평등, 정직'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평화의 영성 : 퀘이커리즘은 초기부터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신앙을 선언했다. 평화의 영성은 단순히 수동적인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평화이다. 그래서 그들은 화해자가 되고 예언자가 된다. 개인인든 사회든 국가든 제외되는 대상은 없다. 왜 평화인가? 예수가 화해자요 예언자인 평화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영성 : 퀘이커의 공동체 영성은 예배 모임에서 드러난다. 이들의 영적 체험은 홀로 드릴 때보다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더 풍성해진다. 이들은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홀로만 경험하지 않고 함께할 때 더욱 풍성하게 경험한다. 공동체에서 함께 공감해 가면서 영적 충전을 이루고 돌봄의 관계가 된다.

단순 소박함의 영성 : 결혼식의 예로 퀘이커의 단순 소박함을 소개한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다. 별다른 순서가 없다. 저자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소박한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할 때 하나님과 만남이 쉽다는 것을 퀘이커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삶의 영성은 외형적으로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평등의 영성 :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무엇(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다고 믿는 퀘이커 사람들에게 평등의 영성은 당연하다. 펜들힐은 그런 당연이 실제로 실천되는 곳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돕고 노예해방 운동을 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인다.

정직의 영성 : 저자는 퀘이커 사람들을 두고 '앞뒤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정직한 신앙인이라는 얘기다. 퀘이커 정치인들이 나중에 정치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정직성 때문이라고 한다. 정직의 영성을 갖고 있기에 법정 맹세를 거부하고 오늘날 정찰제 가격 표시가 퀘이커 상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투철한 기부정신을 갖추고 있다.


평화, 공동체, 단순 소박, 평등, 정직....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지금의 사회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화롭지 않고 철저히 개별화 파편화되어 버렸으며 과도한 풍요를 추구하고 있다. 노골적인 차별이 행해지고 부정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곳은 둘째치고 대부분 종교단체의 모습이 그렇다. 이 다섯 요소들은 소금이자 빛과 같다. 이것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의 소금이자 빛이 되는 이런 요소들이 빠져 버렸기에 회의가 생긴 것이다. 나부터 그렇다. 자동차 연료가 바닥나면 주유소에 가면 되겠지만 평화, 공동체, 단순함, 평등, 정직, 이런 요소가 바닥나면 어디 가서 채울 수 있을까. 기독교가 공급해 줘야 하는데 채워놓은 게 없다.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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