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기행 - 사막과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서 터키까지
박종만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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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부근에 있는 커피 박물관(왈츠 & 닥터 만)에 갔다가 집어 든 책이 <커피기행>이다. 커피기행이라고 해서 세계 최대 커피 주산지인 브라질이나 남미를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박종만 님은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은 커피가 시작한 곳, 커피의 고향, 커피의 전설이 있는 에디오피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단 세 명의 일행들과 탄자니아에서부터 케냐, 에티오피아, 지부티, 예멘, 터키까지 차로 달리며 수백 킬로를 여행했다. 서문에서 박종만 님은 여정을 글로 옮기는 일을 '행장을 꾸리고 다시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는 심정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런 심정으로 쓴 기행문이라 그런지 책을 읽는 내게는 마치 여행팀과 함께 현지를 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책의 곳곳에는 지은이의 마음과 현지인들의 애환이 잘 묻어나 있다. 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을 상상했고 현지인들의 크고 검은 눈망울을 앞에서 보는 듯 했다.
 

  1. 커피에 대한 저자의 열정을 보았다.

지은이는 케냐의 티카 농장의 흙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정신없이 빠지게 한 것은 토양이다. 유구한 세월을 두고 강에서 차곡차곡 쌓인, 눈부시게 찬란한 붉은 색의 충적토다. 붉은 흙을 보는 내 심장이 뛴다. 이 흙을 몇 트럭만 가져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_p30"   
   

  붉은 흙을 보면서 심장이 뛰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정도의 열정이니 아프리카를 그렇게 헤집고 다닌 것이다.


  2. 하지만, 어디 열정만 있으면 다 될까? 20여 년 동안 커피에 매달려 온 열정에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강가 온실에서 탄산가스와 싸우며 새우잠을 자고 있을 나의 커피 나무들이 안쓰럽다. 모든 요소가 자연적인 짐마 커피와 정반대인 북한강가…. _p118"  
   

 
  한 십 이삼 평 남짓 될까? 커피 박물관 옥상에 있는 그의 온실을 가 보았는데 6월인데도 온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세심한 준비를 볼 수 있었다. 그곳 온실 커피 나무에 2~3개의 흰색 커피 꽃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온실이었지만 저자의 꿈은 커 보였다. 그리고, 꿈만큼 현실화 하려는 노력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듯 하다.
 

  3.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에티오피아 짐마에서 받은 커피 세레모니 부분이다. 사진과 함께 그려진 세레모니는 독자를 그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짐마의 커피 세레모니 앞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고백한다.
 

   
  "에티오피아 인의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깃든 이 의식에서, 커피는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귀한 식량인 동시에, 신께 경배 드리는 신성한 예물이다. 즐거움을 노래할 때나 반가운 손님을 환대할 때, 비통에 잠긴 이웃을 위로할 때나 간절한 바람을 기도할 때 이들은 커피를 통해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 _p133"  
   


   세레모니를 시작하는 여인은 시작할 때에 신께 기도를 올리고 끝맺음을 할 때에도 기도를 올린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손님을 위해 준비하는 커피는 거의 경배하는 이의 모습이다. 이 부분이 내게는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네에서는 최소 백 원짜리 동전 하나로, 기껏해야 이삼 천원이면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대하는 우리 모습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곳 사람들은 신께 드리는 경배로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생존을 위한 식량이자 신성한 예물일 수 밖에 없다.
 

  지은이는 커피로드에서 진짜 커피를 만났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그와 함께 농부들의 땀과 삶,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묻어 있는 진짜 커피 맛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 잔의 커피를 홀짝 마셔 버리기엔 그 안에 묻힌 인생들의 수고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읽는이들도 역시 이 책을 가볍게 넘기지 못할 것이다. 좋은 책을 만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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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 그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거친 호흡과 깨달음
김기석 지음 / 청림출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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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가 너무나 인상적이다.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비포장 길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나 있고 그 길 이 사라진 곳 부근에 지평선 저어 끝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사진이다. 구불대는 길이지만 걷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없다. 그래서인지 길이 외로워 보이고 저 멀리 있는 나무가 외로워 보인다. 모르겠다. 누군가 이미 지나간 길일 수도 있겠고 책을 읽는 이들에게 걸어가라고 남겨 둔 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그 길을 한참이나 걸어가고 있었다. 드넓은 들판 언덕길이고 먼지 나는 황량한 길이다. 지나가는 이도 따라 가는 이도 없는 한적한 길을 걸어간다. 몇 장 넘기지 않아 저자가 가고 있는 길은 낯설지 않아 보였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고 누구나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걸음은 달랐다. 외로워 보였는데 누군가와 쉼 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 가만가만 걷는 듯 했으나 거친 호흡을 하며 걷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단정했다. 누군가에게 좋은 이정표가 될 듯 하다. 특히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저자의 대화에서 언어에 담겨지는 의미의 깊이는 무겁고 빠르며 정확하다.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존재의 피부’라고, 그 벗겨진 피부에 비단 옷자락만 스쳐도 아픈 법(p41) 이라고 할 때는 깊은 공감이 갔고 ‘봄볕 한 줌 보태줄 사람(p59)’이라든지, ‘정신의 독립(p127)’이든지, ‘웃으면서 싸울 수 있으려면(p161)이라고 할 땐, 그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리고,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p199)’ 이라고 했을 때는 나의 얼음 같은 정신이 깨어져 나가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레가토(legato)’가 있는 페이지에선 레가토가 없는(실제론 레가토의 개념도 이해 못하는) 초보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동안 저자가 이 길을 지나 오면서 이미 만났던 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고 그들 연락처를 적어 주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알려 준다. 내가 가는 길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자의 대화 내용은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샘물과 같다. 진리에서 시작된 밝은 빛줄기이다. 그의 이야기는 소음 속에서도 잠기지 않고 퍼져가는 맑은 선율이며 흑백의 배경에서 시선을 멈추게 하는 한 점 천연의 색과 같다. 다른 이에게 향하던 시선이 어느덧 내게도 향하였고, 그 음성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 

정신의 크기보다는 교회의 크기가, 인격의 향기보다는 타고 다니는 차의 크기가 그 사람의 존재로 인정되는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암담합니다. ……,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러려면 그러라지요. 저는 제 속도에 따라 살겠습니다. _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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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 - Good Seed 교회와 목회시리즈 4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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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가기가 어려운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겨 갈 때 마다 나의 환상이 깨어졌고 내가 감당해야 할 버거운 책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만의 다시스행 배에서 내리게 하고 열악한 니느웨로 가는 지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진 피터슨에게 지리(Geograhpy) 수업 받은 셈이다. 그는 예수가 간 길을 다시 분명하게 회상시키고 있다. 그 길은 거칠고 험하다. 도로 표시는 보이지 않고 험한 산 길만 있다. 하지만, 그 지리 좌표가 안내하는 곳이야말로 진짜 가야 하는 곳이 아닐까?

그에 비하면 다시스는 어디까지나 신기루일 뿐이다. 다시스는 없다. 거기는 지도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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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명상
고진하 지음 / KMC(기독교대한감리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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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이 책은 종이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이의 여백을 얘기하더니 창조의 여백을 꺼냈다. 마치 연상 게임을 하듯이 주제들이 이어지고 물에 물감이 번져 나가듯이 개념들이 퍼져 간다. 이 책은 여백이 많은 책이다. 읽어 가기에 편하다. 편집에도 여백이 많다. 그런데, 그 넉넉한 여백이 있는데 장을 넘기는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여행 가운데 빨리 달려 가야 함에도 주변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속도를 줄여 아주 천천히 가게 되는 그런 때처럼 속도를 점차 늦추게 되었다. 책은 여백이 많지만 그 여백 속을 돌아다니는 이에겐 뭔가를 가득 채워주는 듯 했다.

나는 산에 오르기를 무척 좋아한다. 함께 오르기 보다는 나 홀로에 더 익숙해 졌다. 홀로 산 오르기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침묵과 고독이 좋기에 그렇다. 나는 그 시간에 내 안에 알게 모르게 담겨진 불필요한 것들을 떨어 버린다. 짐을 가볍게 만들고 거짓 욕망들을 깨뜨려 버린다. 혼자이기에 자연히 침묵한다. 그러면 누군가의 소리를 듣게 된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그런 내게 ‘나무 명상’은 내 가슴을 꼭 붙들어 주는 책이다.


지은이는 나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묵상해냈다. ‘고요의 향기?’, 시인답게 말의 사용이 무척이나 감각적이다. 나 역시 숲 속에서 고요함 가운데 가득한 향기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그리는지를 충분히 안다. 열매 맺음은 사랑의 수고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큰 나무 그늘에서 찾아낸다. 나무를 기다리는 모성으로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모성으로 묵상한다. 그러다가 내 가슴이 콱 붙들린 곳이 있다.

   
  “우리는 말의 어미母인 하나님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숲은 하나님의 침묵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입니다.” _ p81  
   


숲은 침묵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움직인다. 아주 크게. 침묵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해 낸다. 자랑도 없고 불평도 없으며 고통의 소리도 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서 창조와 구원의 일을 이루셨듯이 숲도 침묵 가운데 생명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또, 한 군데 가슴을 멈추게 하는 말이 있다.

   
  “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습니다.” _ p156  
   

어딘가에서 많이도 들었던 말이긴 한데, 새삼 전류가 흐를 때처럼 짜릿함을 갖게 했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한 그늘을 펴고 있는데(되지도 않는 일이지만), 나무의 그늘 지음에 대한 이 말은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책 표지 위에 ‘나무와 깊이 사귀며 존재의 근원이신 그분을 만나다’ 고 적혀 있다. 저자는 나무의 뿌리를 타고 내려가 존재의 근원을 만났고 나무의 줄기를 타고 가다 하늘에 계신 분을 만났다.

멀리 두고 싶지 않은 책이다. 팔 뻗으면 닿을 곳에 다시 꽂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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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 이미 여행 중

'좋든 싫든 우리는 다 여행중이다.'

이 책의 머리말 첫 문장이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을 여정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정의 마지막은 '죽음'이겠지만 기독교 신앙의 여정은 더 복잡하고 멀다. 가벼운 여정이든 무거운 발걸음이든 저자는 이 여정에 생긴 문제점을 분명하게 짚어 주고 있다. 문제 하나는 진주가 돼지 앞에 던져진 상황이다. 주어진 인생 여정과 거기서 경험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신앙 여정의 피상적인 모습을 지적한다. 내용을 이해는 하였으나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정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디론가 가고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목표에 도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행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여정을 준비하면서 맥그래스는 세 가지 지침을 주었다.


하나, 여행에는 영적성장이 있다. 여정 가운데 믿음의 내면화인 영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속에서 믿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물들이고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둘, 잠시 멈추어 생각하라. 준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쉬어 가면서 현재의 그 자리에서 다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은 준비와 계획 다음 시작하지 않는다. 여행은 이미 시작했다. 준비는 이제부터 해가자고 한다.
셋, 묵상하라. '묵상 없이 읽으면 황량하다. 읽지 않고 묵상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다'는 중세 작가의 말처럼, 성경의 이미지와 이야기, 개념이나 주제를 오늘의 자신과 연결하여 깊이 묵상하는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은 놀라운만치 탁월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여행, The Journey'라는 이미지에 네 개의 여정으로 소개하면서 네 개의 탁월한 은유를 사용했다. 그 네 은유들은 히치하이크, 이정표, 광야, 그리고 오아시스이다. 네 가지 모두 여행에서 필수 요소들이 된다.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헤매거나 단조롭게 되며, 피곤에 절게되고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2. 이정표 " 나는 지금 어느 이정표를 발견했는가?"


이정표는 여행의 전체 윤곽을 잡아준다. 현재 통과중인 지점을 이해하고 인생길에 방향을 잡도록 해준다(p54). 네 여정에서의 이정표는 창조, 유배, 구속, 완성 이렇게 네 가지이다.


창조.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마치 전설이나 신화처럼 여길 때가 많다. 이야기로는 흥미진진한 내용들이지만 실제로 자신들 실제 현실에는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신앙여정에 이정표가 되어,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우리의 이식과 삶을 바꿔놓아야 한다…_ p57'


유배. 이 이정표는 인간의 현재 위치가 에덴에서 추방되어 있는 상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고국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망의 표지가 아니라 언젠가 돌아갈 집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가 된다. 추방된 상태이지만 돌아갈 분명한 목표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이다.


구속. 유배의 이정표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그 다음 이정표인 구속을 가리킨다. 유배 이정표가 돌아갈 집이 있음을 보여준다면 구속 이정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표시이다. 설명이 안 된다.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맥그래스는 그냥 '그러나 단순한 사실은,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_ p128' 고 한다. 저자는 구속 이정표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가 구속을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구호나 공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 기독교의 소망은 단순한 꿈이거나 신기루가 아니라 분명한 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계의 지평 너머에 약속된 땅이 있다(_p162). 그래서,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여기서의 여정은 '앞에 놓인 약속의 땅이 도착을 기다리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서 이생을 살아야 한다(_p163).' 인용된 랭브리지의 시 '똑 같은 창살로 내다보는 두 사람 / 하나는 진흙을, 하나는 별을 본다'에서처럼 별을 바라보듯이 완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대하며 땅엣 것이 아닌 위엣 것을 생각할 일이다.


대부분 스포츠에서는 던지든지 차든지 치거나 때리던지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처럼 우리는 창조에서 시작한 이정표를 따라 유배와 구속을 거쳐 완성까지 향하고 마침내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네 이정표를 따라 가면 네 가지 광야를 거치게 되고 그 다음엔 네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다.

 

3. 광야.  "나는 지금 어느 광야를 지나고 있는가?"


광야는 길이 험해져 고갈과 탈진과 낙심을 느끼는 때다. 이곳을 거치려면 격려가 필요하고 거칠 때마다 강해진다. 창조에는 회의의 광야가 있고 유배 에는 실패의 광야가, 구속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두려움의 광야가 기다리고 있으며, 완성 표시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의 광야가 엄습해 온다.


모든 여행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다 좋은 것일까? 가장 의미 있고 기억에 남을 만 한 여행은 여정 중에 실수나 힘든 일들이 있을 때였다. 광야는 탈진케 하고 낙심케 하지만 여정을 더욱 값지게 한다. 그래서 광야 코스를 위한 최고의 준비물은 인내가 아닐까? 맥그래스도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교훈은 인내' 라고 한다. _p105 광야는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그 다음에 오아시스가 있기에 그렇다. 

4. 오아시스


지친 영혼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오아시스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구든지 여기서 새 힘과 소생을 맛볼 수 있다. 여기서 쉼과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오아시스1 소생. 소생 오아시스에서는 물과 떡이 공급된다. 그냥 물이 아니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며, 그냥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요6:51)이다. 물과 떡을 공급 받은 이들은 소생과 치유와 위로를 얻은 모습(찬양과 예배)으로 나온다. _p81


오아시스2 안식.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 참 안식이 없어서가 아닐까? 인간은 열심히 일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잘 쉬는 방법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십계명에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계명이 제시되었을까? 맥그래스는 그래서, '우리는 휴식과 소생의 공간을 내야 한다. 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_ p119' 고 강조했다.


오아시스3 교제. 구속 이정표를 따라 두려움의 광야를 지났다면 교제함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교제는 정상적 성장 수단이요 고독은 부차적 성장 수단이다(_p148). 독창은 합창과 함께할 때 돋보이듯이 두려움의 광야에서 고독하게 보냈다면 교제의 오아시스에서 영적 긴장을 풀어주어야 하겠다. 사자는 함께 무리지어 있을 때에는 공격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떨어진(홀로 있는) 놈을 공격한다. 죄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분리시킨다. 분리된 정도가 심할수록 그 사람의 삶을 죄에 더 장악당한다.


오아시스4 잔치. 잔치 오아시스는 여정의 피날레다. 긴 여정에 대한 평가와 격려가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였다(눅4:15~24). 잔치에는 넉넉한 먹거리가 있고 초청 받아야 참석할 수 있으며 축제와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잔치는 "먹-마-즐(먹고 마시고 즐기고)" 만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이다(계19:7~9). 

5. 히치 하이크 hitchhike


지나가는 자동차에 무료로 편승하는 여행을 히치하이크라고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정을 제한된 시간 동안 지나가려면 길을 잘 아는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좋다. 히치하이킹을 통해 위대한 길동무들과 사귀며 각각의 여정을 지나고 있다. 아주 지혜로운 접근이다. 각 코스마다 유능한 운전수들이 대기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열두 명의 히치하이크 길동무를 소개했다.


첫째 여정에는 조나단 에드워즈, 마르틴 루터, J. I. 패커, 둘때 여정에는 켄터베리의 안셀름, 알렉산더 맥클래런, 수산나 웨슬리, 셋째 여정에는 아이작 왓츠와 존 번연, 그리고, 디트리히 본회퍼, 마지막 넷째 여정에는 존 스토트와 호레이셔스 보나, 그리고, 마지막 잔치 오아시스에서는 C. S. 루이스 이렇게 열 둘이다.

 

인생 여정에는 기복이 있다. 분명히 이정표를 확인했어도 그 다음 광야에서는 그 이정표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할 때가 많다. 마지막 잔치 오아시스는 꿈이나 신기루처럼 막연하게만 여겨진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말로만 듣던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했는데, 그 때 모세는 믿고 있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아, 그래, 여기구나!' 했을 것이다.


한동안 광야를 지나온 듯 하다.  요즘처럼 나의 여정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그러나, 마지막 오아시스에서의 잔치는 꼭 참여하고 싶다. 그래서, 나도 모세와 같은 그런 감탄을 하게 될 때를 기다리며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웃고 싶다. 또 그곳에서 마르틴 루터와 수산나 웨슬리, 디트리히 본회퍼와 C. S. 루이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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