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 이미 여행 중

'좋든 싫든 우리는 다 여행중이다.'

이 책의 머리말 첫 문장이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을 여정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정의 마지막은 '죽음'이겠지만 기독교 신앙의 여정은 더 복잡하고 멀다. 가벼운 여정이든 무거운 발걸음이든 저자는 이 여정에 생긴 문제점을 분명하게 짚어 주고 있다. 문제 하나는 진주가 돼지 앞에 던져진 상황이다. 주어진 인생 여정과 거기서 경험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신앙 여정의 피상적인 모습을 지적한다. 내용을 이해는 하였으나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정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디론가 가고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목표에 도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행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여정을 준비하면서 맥그래스는 세 가지 지침을 주었다.


하나, 여행에는 영적성장이 있다. 여정 가운데 믿음의 내면화인 영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속에서 믿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물들이고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둘, 잠시 멈추어 생각하라. 준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쉬어 가면서 현재의 그 자리에서 다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은 준비와 계획 다음 시작하지 않는다. 여행은 이미 시작했다. 준비는 이제부터 해가자고 한다.
셋, 묵상하라. '묵상 없이 읽으면 황량하다. 읽지 않고 묵상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다'는 중세 작가의 말처럼, 성경의 이미지와 이야기, 개념이나 주제를 오늘의 자신과 연결하여 깊이 묵상하는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은 놀라운만치 탁월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여행, The Journey'라는 이미지에 네 개의 여정으로 소개하면서 네 개의 탁월한 은유를 사용했다. 그 네 은유들은 히치하이크, 이정표, 광야, 그리고 오아시스이다. 네 가지 모두 여행에서 필수 요소들이 된다.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헤매거나 단조롭게 되며, 피곤에 절게되고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2. 이정표 " 나는 지금 어느 이정표를 발견했는가?"


이정표는 여행의 전체 윤곽을 잡아준다. 현재 통과중인 지점을 이해하고 인생길에 방향을 잡도록 해준다(p54). 네 여정에서의 이정표는 창조, 유배, 구속, 완성 이렇게 네 가지이다.


창조.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마치 전설이나 신화처럼 여길 때가 많다. 이야기로는 흥미진진한 내용들이지만 실제로 자신들 실제 현실에는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신앙여정에 이정표가 되어,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우리의 이식과 삶을 바꿔놓아야 한다…_ p57'


유배. 이 이정표는 인간의 현재 위치가 에덴에서 추방되어 있는 상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고국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망의 표지가 아니라 언젠가 돌아갈 집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가 된다. 추방된 상태이지만 돌아갈 분명한 목표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이다.


구속. 유배의 이정표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그 다음 이정표인 구속을 가리킨다. 유배 이정표가 돌아갈 집이 있음을 보여준다면 구속 이정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표시이다. 설명이 안 된다.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맥그래스는 그냥 '그러나 단순한 사실은,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_ p128' 고 한다. 저자는 구속 이정표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가 구속을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구호나 공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 기독교의 소망은 단순한 꿈이거나 신기루가 아니라 분명한 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계의 지평 너머에 약속된 땅이 있다(_p162). 그래서,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여기서의 여정은 '앞에 놓인 약속의 땅이 도착을 기다리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서 이생을 살아야 한다(_p163).' 인용된 랭브리지의 시 '똑 같은 창살로 내다보는 두 사람 / 하나는 진흙을, 하나는 별을 본다'에서처럼 별을 바라보듯이 완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대하며 땅엣 것이 아닌 위엣 것을 생각할 일이다.


대부분 스포츠에서는 던지든지 차든지 치거나 때리던지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처럼 우리는 창조에서 시작한 이정표를 따라 유배와 구속을 거쳐 완성까지 향하고 마침내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네 이정표를 따라 가면 네 가지 광야를 거치게 되고 그 다음엔 네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다.

 

3. 광야.  "나는 지금 어느 광야를 지나고 있는가?"


광야는 길이 험해져 고갈과 탈진과 낙심을 느끼는 때다. 이곳을 거치려면 격려가 필요하고 거칠 때마다 강해진다. 창조에는 회의의 광야가 있고 유배 에는 실패의 광야가, 구속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두려움의 광야가 기다리고 있으며, 완성 표시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의 광야가 엄습해 온다.


모든 여행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다 좋은 것일까? 가장 의미 있고 기억에 남을 만 한 여행은 여정 중에 실수나 힘든 일들이 있을 때였다. 광야는 탈진케 하고 낙심케 하지만 여정을 더욱 값지게 한다. 그래서 광야 코스를 위한 최고의 준비물은 인내가 아닐까? 맥그래스도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교훈은 인내' 라고 한다. _p105 광야는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그 다음에 오아시스가 있기에 그렇다. 

4. 오아시스


지친 영혼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오아시스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구든지 여기서 새 힘과 소생을 맛볼 수 있다. 여기서 쉼과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오아시스1 소생. 소생 오아시스에서는 물과 떡이 공급된다. 그냥 물이 아니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며, 그냥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요6:51)이다. 물과 떡을 공급 받은 이들은 소생과 치유와 위로를 얻은 모습(찬양과 예배)으로 나온다. _p81


오아시스2 안식.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 참 안식이 없어서가 아닐까? 인간은 열심히 일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잘 쉬는 방법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십계명에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계명이 제시되었을까? 맥그래스는 그래서, '우리는 휴식과 소생의 공간을 내야 한다. 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_ p119' 고 강조했다.


오아시스3 교제. 구속 이정표를 따라 두려움의 광야를 지났다면 교제함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교제는 정상적 성장 수단이요 고독은 부차적 성장 수단이다(_p148). 독창은 합창과 함께할 때 돋보이듯이 두려움의 광야에서 고독하게 보냈다면 교제의 오아시스에서 영적 긴장을 풀어주어야 하겠다. 사자는 함께 무리지어 있을 때에는 공격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떨어진(홀로 있는) 놈을 공격한다. 죄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분리시킨다. 분리된 정도가 심할수록 그 사람의 삶을 죄에 더 장악당한다.


오아시스4 잔치. 잔치 오아시스는 여정의 피날레다. 긴 여정에 대한 평가와 격려가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였다(눅4:15~24). 잔치에는 넉넉한 먹거리가 있고 초청 받아야 참석할 수 있으며 축제와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잔치는 "먹-마-즐(먹고 마시고 즐기고)" 만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이다(계19:7~9). 

5. 히치 하이크 hitchhike


지나가는 자동차에 무료로 편승하는 여행을 히치하이크라고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정을 제한된 시간 동안 지나가려면 길을 잘 아는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좋다. 히치하이킹을 통해 위대한 길동무들과 사귀며 각각의 여정을 지나고 있다. 아주 지혜로운 접근이다. 각 코스마다 유능한 운전수들이 대기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열두 명의 히치하이크 길동무를 소개했다.


첫째 여정에는 조나단 에드워즈, 마르틴 루터, J. I. 패커, 둘때 여정에는 켄터베리의 안셀름, 알렉산더 맥클래런, 수산나 웨슬리, 셋째 여정에는 아이작 왓츠와 존 번연, 그리고, 디트리히 본회퍼, 마지막 넷째 여정에는 존 스토트와 호레이셔스 보나, 그리고, 마지막 잔치 오아시스에서는 C. S. 루이스 이렇게 열 둘이다.

 

인생 여정에는 기복이 있다. 분명히 이정표를 확인했어도 그 다음 광야에서는 그 이정표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할 때가 많다. 마지막 잔치 오아시스는 꿈이나 신기루처럼 막연하게만 여겨진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말로만 듣던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했는데, 그 때 모세는 믿고 있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아, 그래, 여기구나!' 했을 것이다.


한동안 광야를 지나온 듯 하다.  요즘처럼 나의 여정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그러나, 마지막 오아시스에서의 잔치는 꼭 참여하고 싶다. 그래서, 나도 모세와 같은 그런 감탄을 하게 될 때를 기다리며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웃고 싶다. 또 그곳에서 마르틴 루터와 수산나 웨슬리, 디트리히 본회퍼와 C. S. 루이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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