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정생, 이 분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으로만 들었던 분? ‘강아지똥을 읽고는 감탄과 감동에 젖으면서 도대체 작가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시각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지 한참 상상해 보았던 적이 있다.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 그 자리에까지 내려갔다는 얘기다. 치열하고도 순수한 권정생의 공감 능력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으리라. 그토록 보잘 것 없는 배설물을 읽는 이들 앞에 가져다 놓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작가의 심성은 그의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생쥐들이 아랫목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단다. 놀라고 귀찮기도 했지만 그것들과 정이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 먹을 것도 준비해 주었단다. 그리고는 그의 말이 이렇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_p21

! 그렇다. 그는 같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마시는 모든 생명을 공감하는 이다. 그래서나의하느님이 아니라우리들의 하느님이라고 한 듯하다. 권정생의 눈은 그토록 작은 생명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그 마음은 성 프란체스코와 다르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사람으로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갔다. 식민지 생활과 6.25 동란 속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내려 갔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고통 속에서 찡그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엔 민들레가 보이고 강아지똥이 보인다. 권정생의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다. 끝까지 낮은 그 땅에 발을 딛고 살았다. 그러나, 딛고 살던 곳은 낮은 자리였지만 그의 사상은 바다였고 정신은 고산 준령이었다. 그 앞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에는 생명과 평화가 기초와 기둥과 지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승용차를 파병과 동일한 수준으로 보고 칼을 들게 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며, 일등이 되려는 경쟁 심리가 모두를 타락하게 한다고 얘기한다.

두 번째 글우리들의 하나님는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가 함량 미달이요 변질된 그리스도인처럼 느끼게 한다. 신제품으로 나온 과자에는 아주 좋은 맛을 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때부터는 그 맛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지금의 기독교가 그렇게 변질되고 함량 미달의 상태가 된 듯하다. 아니, 미달되었고 변질되었다. 다니엘서에 나왔듯이 저울에 달아보면 분명 부족함이 보이지 않을까. 근본과 본질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권정생이 얘기하듯이 인간다움이 아닌 도리어 교회가 인간상실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고다움을 잃은 이들이 스스로 계신 분, 자연 그대로이신 하느님을 변형시켜 가고 있다. 그렇게 변형된 하느님을 품는 기독교는 우상 앞에서 무력하다.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란 우상 앞에서 교회가 무력하게 쪼그라들고 있는 듯하다.

 

권정생, 이 분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장가는 못 가봤지만 뭇 생명들과 수 없는 연애를 하신 분. 몸의 고통을 떼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가시처럼 지고 살았던 분.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금덩이를 발견하고 오던 중 자기 안에 욕심이 불꽃처럼 일어나자 그것을 강물로 던져 버린 나무꾼 형제들처럼 욕심이 없는 분. 강아지똥처럼 지지리도 못난 궁색한 삶인 듯 했지만 민들레 품에 스며들어 생명의 씨앗으로 날아 오른 분. 무엇보다 세상 종교가 땅을 놓아두고 공중에 떠 있는 하늘만을 가르치려고 할 때 권정생은 이 땅을 맨발로 걸어 사랑하고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로 전해 준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순례자
김기석 지음 / 뜰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글은 샘이 깊은 물과 같다. 정말 깊은 우물이다. 샘만 깊은 게 아니다. 풍성하여 찾아 온 이들을 한껏 적셔 준다. 산문을 모아 놓은 글이지만 하나 하나가 묵직하다. 그의 우물은 고전과 문학, 신학과 인문학에 잇닿아 있다. 때론 시원하고 때론 달콤하며 때론 약처럼 쓰다. 마음의 물통에 가득 담아 왔다.

일상

「일상순례자」를 읽다 보니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생각난다. 연금술사는 반복되는 꿈을 통해 피라미드에 있는 보물을 찾아 나선 산티아고 라는 젊은 목동이 그 여정에서 겪는 이야기인데 정작 보물은 자기가 양을 치던 지역 한 교회의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코엘료가 그 작품을 통해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보물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는 일상에 있음을 얘기하려 했다는 것이 「일상순례자」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김기석은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을 회상케 해 준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라고. 그렇기에 자기가 처한 일상의 하루하루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향기>를 소개하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다지고 있다. 

희망과 격려

이 책에는 희망이란 새소리가 들린다. 생명이 소멸해 가는 현실 앞에서 불멸을 노래한다. ‘땅을 찾아 뒤채다가 그만 밖으로 튀어나온 노근을 보면 흙 한 줌 덮어 주고 싶어진다.’고 하였고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나 씨앗이 남게 마련이다.’면서 말이다. <저 서늘한 그늘처럼>에서는 ‘세상에는 에셀나무 그늘처럼 나그네에게 조용히 곁을 내주는 이들이 있다’고 말해 준다. 그리고는 ‘염천의 세월이든 북풍의 세월이든 오지게 견뎌내며 하늘의 뜻을 장히 품는 사람들’이 그늘이자 기댈 언덕이 되겠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이 땅에는 여전히 넉넉히 있다고 알려 준다. 레가토의 사람들이 많아 희망새의 노래가 끊어지지 않는다.

부끄러움

“아녀자가 기른 난에도 향기가 없고 대장부가 기른 죽에도 기품이 없다. 세상 온 구석에 뼈를 찔러 넣는 한기마저 없다.”고 하는 조정권 시인의 탄식을 인용했을 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삽화로 넣은 그림들은 산뜻하지만 그의 글들은 죽비같고 메스같다. 마음놓고 있는 이를 부끄럽게 하여 풀어진 마음 경계를 바짝 조이게 한다. 얽매이지 않는 들사람을 찾는다(p44)고 할 땐 쭈뼛거렸고. 무르 익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p56) 할 땐 빈약한 자신을 가리게 되었다. <떨고 있는 문풍지처럼>의 기도문은 소리내어 읽어 보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떨고 있는 문풍지처럼 피울음으로 이 가을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애절하고 절실한 기도이다. ‘십자가의 길은, 고백 속에만 있을 뿐 그 고단한 길을 걷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멈춰 버린 발걸음을 부끄럽게 한다. 순례의 여정에는 싸울 일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혈 환자’라며 각성케 한다(p76). 그러니 죄와 불의에 어떻게 맞서 싸우겠냐고 걱정스런 마음을 보인다. 

북소리

세상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으려면 다른 북소리를 따르라고 한다. 다른 북소리를 들어야 한다. 순례의 길을 가고자 하면서 세상의 북소리를 따라 가니 괴롭기만 하다. <내 혼의 문신>에는 진솔한 자기 성찰이 나온다. 하늘의 소리를 신음하며 듣고 있고 꺼버려도 다시 들려 오는 소리에 괴로워 한다. 목자는 하나님의 실존을 일상에서 드러내는 자임을 가르쳐 주고 세이렌의 노래소리와 같은 욕망의 소리에 귀를 틀어 막으라고 한다. 갈수록 황무지로 변하는 세상에 울더라도 참 사람됨의 씨앗을 뿌리라고 간청하듯 하고 촛불 한자루 들어 천 년의 어둠을 물리치자고 한다.

자극과 도전이 되었는가? 순례자의 외침에 아무런 자극도 도전도 받지 못한다면 틀림 없다. 아마도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온 ‘기러기’처럼, 자카리아 타메르의 작품에 나온 ‘호랑이’처럼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님처럼 - 개정판
맥스 루케이도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은 그릇이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거나 담아서는 안 된다

마음은 계란이다. 너무 쉽게 깨어진다. 하지만, 마음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 될 수 있다.  

마음은 독이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렇게 변질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어야 한다.  

마음은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나기 때문이다(4:23). 그래서, 어떤 다른 것들 보다 더욱 지켜주어야 한다.  

마음은 집이다. 무엇이든 그곳에 들어와 살 수 있다. 비워 놓으면 아무거나 들어 온다. 좋은 입주자를 받아들이라.  

사람 마음결만큼 불규칙하고 제멋대로인 것이 또 있을까? 더러운 것이 담기고 쉬이 깨어지며 독이 되고 아무거나 맞아 들인다. 그러니 한결같을 수 없다.

한결같지 않은 마음을 위해 이 책 [예수님처럼]은 우리 마음을 위한 좋은 입주자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의 마음이다. 그의 마음은 목표가 분명하고 하늘님처럼 변함 없이 한결같다. 그 예수의 마음 내용이 열 한가지로 나뉘어 소개되었다. 이 책의 담을꺼리는 이렇다.

용서함, 긍휼히 여김, 들음, 하나님께 취함, 예배에 주림, 분명한 초점, 정직함, 순결함, 희망에 참, 기뻐함, 인내함…. 귀가 닳도록 들었던 것들이라 뭐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겠지만 한 페이지씩 펼쳐 보라. 우리 마음 그릇에 담지 않고는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차곡차곡 마음에 채울수록 계란 같은 마음이 성()처럼 견고해 질 것이다. 그 마음을 품으면 품을수록 마음의 독이 해독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점차 생명다운 모습으로 회복되어 갈 것이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의미 전달이 모호하지 않다. 복선이 없고 겹쳐진 내용이 별로 없다. 은유와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 일상에서 경험했던 친숙한 비유와 은유로 풀어내었다. 머리글에서 하나님을 실내장식에 비유한 것은 매우 마음에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부르는 숲]은 북미 애팔래치아 산맥 3천 360Km를 종주한 이야기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크게 두 가지 마음이 든다. 하나는 정상에 올랐을 때 가슴으로 밀려드는 뿌듯함과 경외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몇 날 며칠씩 그곳에 머물고 그 숲의 정취를 한껏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더욱 진하게 물들게 할 만한 책이다.


산과 숲은 그 속에 머물면 머물수록 인간을 숲이 되게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탐욕스런 자신의 길을 잃고 순리와 질서의 자아를 찾는다. 저자 빌 브라이슨은 이를 두고 ‘숲은 여느 공간과는 다르다. … 당신을 왜소하고 혼란스럽고 취약하게 해놓은 다음, 마치 낯선 사람들의 무수한 다리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p75)고 한다. 난 이 말에 넉넉한 공감을 가질 수 있다. 빌의 말대로 실제로 산은 간 만큼 계속 후퇴하는 것 처럼 보이고(p62) 고독을 한 없이 공급해 주는 곳이다(p84). 산을 다녀 본 이들이라면 이런 그의 고백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발로 세계를 재다

6장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발로 세계를 재면….’ 나는 산을 다니며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 날 코스의 거리가 몇 킬로미터인지 확인하고 경사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따름이다. 발로 잰다고? 진정 나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말이다. 멀든지 가깝든지 정해진 거리는 결국 발이 가야 한다. 그의 이런 표현은 아주 정직하다

발로 세계를 재면 거리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1킬로미터는 머나먼 길이고, 2킬로미터는 상당한 길이며, 10킬로미터는 엄청나며, 50킬로미터는 더 이상 실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117). 그렇기 때문에 걷기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3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발로 그 거리를 한 발 한 발 재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빌 브라이슨은 그 속에서 시간의 의미는 멈추었다고, 삶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우리는 그저 주어진 날들을 걸어가면 될 뿐이다.   

 

2. 오줌을 갈기다

저자와 친구 카츠는 겨우 50만 걸음을 걷고 아직 450만 걸음을 남겨 두고서 잠시 쉬기 위해 도시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거기서 도시 환경에 아주 낯이 선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종주를 시작하기 전 날, 숲에 대하여 한 없이 어색하고 두려워 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1/10을 지났을 뿐인데 오히려 도시를 이방 환경으로 경험한다. 예전에 익숙한 환경이 낯선 환경으로 바뀌고 낯선 환경이 오히려 그들에게 온전한 우주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라는 낯선 환경에 영역 표시를 한다. 밀림 속 인디언들이 브라질 상 파울루에 왔을 때 그 낯선 환경에 일제히 오줌을 갈긴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두 사람도 그렇게 영역 표시를 하였다

본래 숲은 인간의 고향이다. 인간은 그 숲의 일부였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숲과 분리되어 진화하려고 한다. 수 십 년을 도시에 살던 두 사람이 단 몇 주 만에 숲을 고향으로 인식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해 준다.   

 3. find ones feet, 내 다리를 다시 찾다?

빌은 트레일 도중에 정신적 저기압 상태에 빠졌다. 동기와 목적 의식을 잃었고 친구 카츠, 그리고, 트레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축적된 트레일 경험도 소용 없었다. 빌은 자신의 발을 어느 곳에 내 딛어야 할 지를 몰랐던 것이다. 펜실베니아 지역을 종주하기 위해 빌은 차로 560km나 달려와 겨우 17.6km를 걷다가 그치고 만다. 자신감을 잃은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인생에서 그렇게 저기압 상태에 이를 때가 있다. 동기와 목적을 상실하고 이전의 쌓아 왔던 경험들도 소용이 없게 될 때이다. 그럴 때마다 밀려오는 허무감은 파도처럼 높고 무거운지 모른다. 간혹 숲 속을 걷다 보면 내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서성댈 때가 종종 있다. 어떻게 하면 다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find one's feet, '자신감을 찾다'는 의미지만 역자는 의도적으로 그대로 번역해 놓았다.) 어떻게 하긴, 잠깐 쉬었다 하면 된다. 그건 너무 빠르게 달려 와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목적만 바라보면 다리가 따라오지 못한다. 아니, 영혼이 따라오지 못한다. 내 경험에 영혼의 속도는 훨씬 더 느리다   

4. 숲의 일부가 되다

빌 브라이슨이 가진 애팔래치아 트레일 마지막 코스 메인주의 마운트 캐터딘에서의 경험이 인상적이다. 해 지는 저녁 친구 카츠가 텐트를 치는 동안 빌은 물을 길러 물가에 갔다가 거기서 커다란 <말코손바닥사슴>을 만났다. 완전히 성장한 암컷 사슴이 빌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가깝게 있었던지 사슴의 머리 주위로 윙윙대는 벌레 떼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의는 하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고. 빌과 사슴,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고 열심히 도망치던 이가 종주를 마칠 즈음에는 숲과 일부가 되어버렸다. 숲의 동물들과 다름 없이 빌도 물가에 나와 물을 마셨다  

이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숲과 분리되어 살아 왔던 한 사람이 수 개월의 트레일을 거치면서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그 숲의 일부로 동화되었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은 없으리라.

[나를 부르는 숲]은 발로 재면 500만 걸음이나 되는 한 없는 종주 이야기이다. 깊이 있는 깨달음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어느 새 자연과 동화되고 일체감을 갖게 되는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 읽는 동안 읽는 이 역시 자기도 모르게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함께 걷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특징 하나. 비유를 통해 딱딱한 경제 원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사다리를 차 버렸다’, ‘치수가 하나 뿐인 황금 구속복’ 등 매우 적절한 비유를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중요한 개념들과 오류들을 알기 쉽게 지적해 준다.

특징 둘. 방대한 역사 자료와 개인의 체험, 각국의 경제 지표와 현황에 대한 풍부한 근거들이 커다란 설득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금의 사마리아인들이 왜 ‘선한’이 아닌 ‘나쁜’에 해당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정당하고 올바른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경제 원리는 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으로 1980년대 이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중은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이 마냥 최선인 줄 알고 있다. 그냥 흘러 가는대로 흐름을 따를 뿐이다. 저자 장하준은 그 흐름에 과감히 역류를 일으키고 있다.



1.   세계화의 진실 : 보호무역은 과소평가되고 있고, 제국주의적 요소는 축소되면서 개발도상국들은 잘못된 경제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모두에게 치수가 하나 뿐인 황금 구속복을 입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이 황금 구속복을 입은 나라들은 국영 기업의 민영화, 안정된 물가 수준, 정부 조직의 규모 감축, 재정 균형의 달성, 무역의 자유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 해제, 외환 자유와, 등의 치수에 맞춰 체형을 조절해야 한다. 체형에 맞게 옷을 입혀야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그 반대로 옷에 맞게 체형을 바꾸라는 세계화 주장은 정말 억지다.

2.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이력 들추기 : 대표적 나라로 영국과 미국이 도마에 올랐다. 선진국들은 지금까지의 경제 수준이 되기 전에는 자유무역을 하지 않은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 그런 모습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이다. 뒤에 올라오려는 이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당연 경쟁국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계속 비판 일색으로 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긍정적 정책으로 미국의 마셜 플랜을 아주 좋게 평가한다. 마셜 플랜은 이웃을 끌어 주고 함께 가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이력을 들추는 작업에서는 역사적 경제적으로 정확한 자료들을 다룬다. 키케로의 말을 인용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3. 자유무역은 정답이 아니다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이 말은 개도국들이 가능한 빨리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비꼰 말이다. 개발도상국의 산업이 너무 일찍부터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자유 무역주의는 단기간을 위한 이론이지 장기적인 것과 관련된 이론이 아니다. … 부자 나라들은 자국의 생산자들이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만, 그것도 대개는 점진적으로 무역을 자유화했다.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p118~11)9이 부분은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저자는 속도를 늦추자고 한다. 개도국들은 나름의 격리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 조급한 정책은 개도국들의 자유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나쁜 사마리안인들은 관세를 평등하게 제시하자고 한다. 그것은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얼핏 보면 아주 공정한 것 같다. 하지만, 경기장이 평평한 것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외국 자본 : 원조, 부채, 투자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외국 자본에 대해 저자는 외국 자본이 결코 테레사 수녀님이 아니라고, 군사력보다 더 위험하다는 표현을 한다. 더 나아가 외국인의 직접투자는 ‘악마와의 거래’ 일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드넓은 바다와 같은 부자 나라의 자산은 단 한 방울만 잘못 움직여도 개발도상국의 금융 시장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p139). 외국인 투자는 경제 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5. 민간기업과 공기업 : 민영화의 함정을 봐야 하고 공기업의 단점만이 아닌 성공 사례도 봐야 한다. 단기간에 집중하지 말고 길게 보면서 실용적인 태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다는 것.

6. 지적 소유권 : 지적 소유권 철폐가 아니라 지나친 보호로 인해 생기는 악영향을 줄이자는 주장이다. 지적소유권 보호 기간을 단축하고, 독창성 기준을 높이며, 강제 인가와 병행 수입의 조건을 완화하자는 내용이다.

 

바둑에서는 상대의 실력이 낮으면 고수가 4집, 6집, 혹은 9집, 이렇게 몇 집을 잡혀주고 시작한다. 장기를 둘 때에도 고수는 중요한 말을 적당하게 떼어 놓고 경기한다. 볼링 경기에서도 사전에 초보자의 핸디캡을 잡아주고 경기에 임한다.

저마다 고지를 선점하여 어떻게든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수고를 보상 받으려면 당연 선점한 지위를 계속 누려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공정함이 필요하다. 자선 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함께 살고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 장하준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1> 생산 능력의 향상에 투자하지 않으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 개방적 외국인 투자 정책, 자본 시장 개방은 장기적 프로젝트를 흔들어 놓고 해당 국가들의 능력의 범위를 제한하기 때문에 당장은 어려워도 생산 능력을 위한 투자를 하라는 것이다. 간단하면서 강력한 원칙이 있다.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개선하라”

2> 제조업을 잃지 않는다. 천연자원에만 의존하면 위험한다. 생산성이 높은 서비스업의 주요 원천은 제조업이다.

3>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뛰자. 평평한 경기장, 언뜻 보면 정당한 듯 하지만 체급과 실력이 다른 선수들은 같은 조건에서 뛰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 편파적인 심판들이 문제다.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와 같은…, 그리고 FTA와 같은 불공정한 리그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수준이 다른 선수들의 경기는 결국 불공정한 것이 된다고 한다.

 

☆ 생산 능력의 향상 – 개인의 생산 능력, 공동체의 생산 능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시장에 대항하라’는 말이 내게는 ‘세상에 대항하라’는 말로 들렸다. 무엇으로 세상을 상대해야 할까?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생산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조업이다! 그 생산 능력은 제조업에서 나온다. 공동체에서 이 제조업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

갈수록 경기장이 기울어져 간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아래쪽으로 몰리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아래쪽에 치우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