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부르는 숲]은 북미 애팔래치아 산맥 3천 360Km를 종주한 이야기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크게 두 가지 마음이 든다. 하나는 정상에 올랐을 때 가슴으로 밀려드는 뿌듯함과 경외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몇 날 며칠씩 그곳에 머물고 그 숲의 정취를 한껏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더욱 진하게 물들게 할 만한 책이다.


산과 숲은 그 속에 머물면 머물수록 인간을 숲이 되게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탐욕스런 자신의 길을 잃고 순리와 질서의 자아를 찾는다. 저자 빌 브라이슨은 이를 두고 ‘숲은 여느 공간과는 다르다. … 당신을 왜소하고 혼란스럽고 취약하게 해놓은 다음, 마치 낯선 사람들의 무수한 다리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p75)고 한다. 난 이 말에 넉넉한 공감을 가질 수 있다. 빌의 말대로 실제로 산은 간 만큼 계속 후퇴하는 것 처럼 보이고(p62) 고독을 한 없이 공급해 주는 곳이다(p84). 산을 다녀 본 이들이라면 이런 그의 고백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발로 세계를 재다

6장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발로 세계를 재면….’ 나는 산을 다니며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 날 코스의 거리가 몇 킬로미터인지 확인하고 경사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따름이다. 발로 잰다고? 진정 나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말이다. 멀든지 가깝든지 정해진 거리는 결국 발이 가야 한다. 그의 이런 표현은 아주 정직하다

발로 세계를 재면 거리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1킬로미터는 머나먼 길이고, 2킬로미터는 상당한 길이며, 10킬로미터는 엄청나며, 50킬로미터는 더 이상 실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117). 그렇기 때문에 걷기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3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발로 그 거리를 한 발 한 발 재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빌 브라이슨은 그 속에서 시간의 의미는 멈추었다고, 삶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우리는 그저 주어진 날들을 걸어가면 될 뿐이다.   

 

2. 오줌을 갈기다

저자와 친구 카츠는 겨우 50만 걸음을 걷고 아직 450만 걸음을 남겨 두고서 잠시 쉬기 위해 도시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거기서 도시 환경에 아주 낯이 선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종주를 시작하기 전 날, 숲에 대하여 한 없이 어색하고 두려워 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1/10을 지났을 뿐인데 오히려 도시를 이방 환경으로 경험한다. 예전에 익숙한 환경이 낯선 환경으로 바뀌고 낯선 환경이 오히려 그들에게 온전한 우주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라는 낯선 환경에 영역 표시를 한다. 밀림 속 인디언들이 브라질 상 파울루에 왔을 때 그 낯선 환경에 일제히 오줌을 갈긴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두 사람도 그렇게 영역 표시를 하였다

본래 숲은 인간의 고향이다. 인간은 그 숲의 일부였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숲과 분리되어 진화하려고 한다. 수 십 년을 도시에 살던 두 사람이 단 몇 주 만에 숲을 고향으로 인식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해 준다.   

 3. find ones feet, 내 다리를 다시 찾다?

빌은 트레일 도중에 정신적 저기압 상태에 빠졌다. 동기와 목적 의식을 잃었고 친구 카츠, 그리고, 트레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축적된 트레일 경험도 소용 없었다. 빌은 자신의 발을 어느 곳에 내 딛어야 할 지를 몰랐던 것이다. 펜실베니아 지역을 종주하기 위해 빌은 차로 560km나 달려와 겨우 17.6km를 걷다가 그치고 만다. 자신감을 잃은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인생에서 그렇게 저기압 상태에 이를 때가 있다. 동기와 목적을 상실하고 이전의 쌓아 왔던 경험들도 소용이 없게 될 때이다. 그럴 때마다 밀려오는 허무감은 파도처럼 높고 무거운지 모른다. 간혹 숲 속을 걷다 보면 내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서성댈 때가 종종 있다. 어떻게 하면 다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find one's feet, '자신감을 찾다'는 의미지만 역자는 의도적으로 그대로 번역해 놓았다.) 어떻게 하긴, 잠깐 쉬었다 하면 된다. 그건 너무 빠르게 달려 와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목적만 바라보면 다리가 따라오지 못한다. 아니, 영혼이 따라오지 못한다. 내 경험에 영혼의 속도는 훨씬 더 느리다   

4. 숲의 일부가 되다

빌 브라이슨이 가진 애팔래치아 트레일 마지막 코스 메인주의 마운트 캐터딘에서의 경험이 인상적이다. 해 지는 저녁 친구 카츠가 텐트를 치는 동안 빌은 물을 길러 물가에 갔다가 거기서 커다란 <말코손바닥사슴>을 만났다. 완전히 성장한 암컷 사슴이 빌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가깝게 있었던지 사슴의 머리 주위로 윙윙대는 벌레 떼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의는 하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고. 빌과 사슴,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고 열심히 도망치던 이가 종주를 마칠 즈음에는 숲과 일부가 되어버렸다. 숲의 동물들과 다름 없이 빌도 물가에 나와 물을 마셨다  

이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숲과 분리되어 살아 왔던 한 사람이 수 개월의 트레일을 거치면서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그 숲의 일부로 동화되었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은 없으리라.

[나를 부르는 숲]은 발로 재면 500만 걸음이나 되는 한 없는 종주 이야기이다. 깊이 있는 깨달음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어느 새 자연과 동화되고 일체감을 갖게 되는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 읽는 동안 읽는 이 역시 자기도 모르게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함께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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