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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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이 분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으로만 들었던 분? ‘강아지똥을 읽고는 감탄과 감동에 젖으면서 도대체 작가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시각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지 한참 상상해 보았던 적이 있다.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 그 자리에까지 내려갔다는 얘기다. 치열하고도 순수한 권정생의 공감 능력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으리라. 그토록 보잘 것 없는 배설물을 읽는 이들 앞에 가져다 놓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작가의 심성은 그의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생쥐들이 아랫목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단다. 놀라고 귀찮기도 했지만 그것들과 정이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 먹을 것도 준비해 주었단다. 그리고는 그의 말이 이렇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_p21

! 그렇다. 그는 같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마시는 모든 생명을 공감하는 이다. 그래서나의하느님이 아니라우리들의 하느님이라고 한 듯하다. 권정생의 눈은 그토록 작은 생명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그 마음은 성 프란체스코와 다르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사람으로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갔다. 식민지 생활과 6.25 동란 속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내려 갔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고통 속에서 찡그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엔 민들레가 보이고 강아지똥이 보인다. 권정생의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다. 끝까지 낮은 그 땅에 발을 딛고 살았다. 그러나, 딛고 살던 곳은 낮은 자리였지만 그의 사상은 바다였고 정신은 고산 준령이었다. 그 앞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에는 생명과 평화가 기초와 기둥과 지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승용차를 파병과 동일한 수준으로 보고 칼을 들게 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며, 일등이 되려는 경쟁 심리가 모두를 타락하게 한다고 얘기한다.

두 번째 글우리들의 하나님는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가 함량 미달이요 변질된 그리스도인처럼 느끼게 한다. 신제품으로 나온 과자에는 아주 좋은 맛을 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때부터는 그 맛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지금의 기독교가 그렇게 변질되고 함량 미달의 상태가 된 듯하다. 아니, 미달되었고 변질되었다. 다니엘서에 나왔듯이 저울에 달아보면 분명 부족함이 보이지 않을까. 근본과 본질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권정생이 얘기하듯이 인간다움이 아닌 도리어 교회가 인간상실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고다움을 잃은 이들이 스스로 계신 분, 자연 그대로이신 하느님을 변형시켜 가고 있다. 그렇게 변형된 하느님을 품는 기독교는 우상 앞에서 무력하다.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란 우상 앞에서 교회가 무력하게 쪼그라들고 있는 듯하다.

 

권정생, 이 분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장가는 못 가봤지만 뭇 생명들과 수 없는 연애를 하신 분. 몸의 고통을 떼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가시처럼 지고 살았던 분.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금덩이를 발견하고 오던 중 자기 안에 욕심이 불꽃처럼 일어나자 그것을 강물로 던져 버린 나무꾼 형제들처럼 욕심이 없는 분. 강아지똥처럼 지지리도 못난 궁색한 삶인 듯 했지만 민들레 품에 스며들어 생명의 씨앗으로 날아 오른 분. 무엇보다 세상 종교가 땅을 놓아두고 공중에 떠 있는 하늘만을 가르치려고 할 때 권정생은 이 땅을 맨발로 걸어 사랑하고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로 전해 준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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