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은 너무 불편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얼룩지고 지저분한 몰골로 거울 앞에 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주제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고, 제가 속해 있는 쪽(?)이 고통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불가항력의 문제를 불성실하게(혹은 너무 피상적으로) 대하고 있서서입니다. 영화 [밀양]은 아주 불편하게 했지만 오히려 감사와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쪽이 아닌 다른 쪽에서 이쪽에서 해야 할 물음을 진솔하게 해주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이도 사색을 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성찰도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이 영화가 불편했지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습니다. 믿음, 용서, 고통, 체험, 전도, 인생, 사랑, 이렇게 일곱 가지 부분입니다. 각각의 주제는 신앙에 소중한 요소들입니다. 사실, 이 주제들은 얼마나 많이 오염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고결한 빛깔과 향기를 내지 못하고 변색되고 냄새가 납니다. 지난 해 영화 [밀양]을 깊이 읽은(?) 내게 그 영화를 다룬 이 책은 너무 반가운 내용입니다.

1. 하나님 像을 수정하자

기존의 하나님 모습은 ‘일방적으로 강한 하나님, 드러난 하나님,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 무슨 일이든 단번에 해치우는 하나님, 강력하고 신속한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독선적이며 일방적이고 무례하며 오만하다고 비판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 모습과 달리 저자는 ‘숨어 계시고, 낮은 데로 임하며, 조용히 머물러 있고, 감싸시는, 대면하고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후반부에서도 저자는 불타는 햇볕으로가 아니라 비밀 햇볕으로, 태풍으로가 아니라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P123). 그와 같이 ‘그 사람의 신관이 그 사람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자가 틀리고 후자가 맞다는 이원론적인 구분은 아닐 것입니다. 전자는 부성적 모습이고 후자는 모성적 모습입니다. 문제는 한쪽 모습 만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왠지 이 나라 교회들이 부성적 하나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싫습니다. 개인적인 내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교회들의 부성적 신관은 참 아버지의 느낌이 나지 않고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강하고 빠른 속도에서는 좀처럼 감각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좋습니다.

 

2. 용서 자판기 

영화 [밀양]에서 가장 마뜩잖은 장면, 가장 화가 나는 장면은 신애가 교도소에 있는 박도섭을 찾아 가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러 간 것이고 박도섭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말합니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의 기독교가 용서를 얼마나 값싸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용서에 대한 그와 같은  취급 방식을 ‘용서 자판기’ 라고 했습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내용물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회개’ 라는 동전을 넣으면 덜컥 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건 아닙니다. 김영봉은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용서에 필요한 3R을 확인해 줍니다. 뭐냐면, 회개  Repentance와, 보상 Restitution, 개혁 Reformation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들의 컨텐츠를 잘 포장해 놓았습니다. 복음과 신앙의 삶을 그럴 듯 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강조하면서 기성품처럼 쌓아 놓았다가 전해주듯이 합니다. 값싸게, 값 없이 손쉽게 전해줍니다.

사실 용서에는 얼마나 비싼 값이 치러졌습니까? 예수의 고난과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값을 수 없는 죄값이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그분의 고난과 희생의 값마저도 덤핑처리하듯이 대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고난과 고통 앞에서

고난과 고통 앞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합니다. 나 부터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디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보니 고통과 고난은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끌어 안든지 맞서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양]에서 신애는 연속적으로 닥쳐 온 고통 앞에서 계속 도피하고자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왔고, 아들이 죽자 신앙을 가졌고, 끝내는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냥 보면, 용기 있는 것 같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약한 자신을 위장해 보려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오기일 수도 있고 나름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신애와 같은 우리들을 향해 던지는 저자의 말 가운데 두 가지를 기억해 봅니다.

하나는 고난을 끌어 안으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의 심장에 들어가 그 심장을 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p76 이 말은 얼마나 힘이 있는가요?

또 다른 것은 이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참 인생을 살자고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신애가 자기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입니다. 그녀를 향하던 카메라는 그 다음 그녀가 앉은 자리 옆 지저분한 곳에 내리고 있는 비밀 햇볕을 비추면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 끝까지가 연극 무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신애는 도피적이고 거짓된 무대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봅니다.

고난을 끌어 안으라고, 이제는 도피와 거짓의 무대 위에서 내려와 살라고 하는 저자의 강조는 저의 마음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4. 세밀한 영적 돌봄

"안 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쪼금 마음이 편하고, 그렇데예"

교회를 두고 하는 종찬의 대사입니다. 이 말은 마치 교회에게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저자는 교회가 겉돌고 있다고 하고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구원의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성찰이 담긴 의문을 갖습니다. 이 현실에 별 볼일 없는 기능을 하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수 많은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교회는 구원의 통로를 발견하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연극의 무대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자는 세밀한 영적 돌봄을 역설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영적 돌봄 없이는, 신애 같은 사람들이 생기는 일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p174

맞는 말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공장이 아니라 농장이어야 합니다. 자꾸만 공장化 되어가는 현실이 버겁습니다. 효율과 대량생산과 많은 인원, 획일성과 신속성, 기계적이며 정확한 처리를 강조하는 공장 환경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신속하게 생산량을 늘려야 하기에 세심하게 돌볼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서투른 공장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농장은 공장과 다릅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는 가지, 잎, 꽃, 열매 하나하나에 세밀한 손길을 다합니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직접 돌보아 줍니다. 그래서, 농부는 익은 열매를 손에 얹었을 때 가장 기쁘다고 합니다. 그 농장에는 바람과 햇빛, 비와 해오름과 해내림 속에서 생명들이 돌봄을 받습니다. 그런 생명의 농장에 하나님은 항상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와 주십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런 영화 [밀양]을 통해 제대로 성찰해 낸 이 책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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