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공지영의 르포르타주를 읽으면서 나는 그 현장 속으로 끌려 들어 갔다. 고통스러웠고 수치심과 분노가 목까지 차 올랐다. 모두가 그랬듯이 당시 그 사건을 관전하듯 보고 지나친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펴 들었다. 

의자놀이, 소시적 즐겁게 즐겼던 놀이를 제목으로 달았다. 씁쓸하고 무섭다. 놀이에서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 술래가 되어 단순 벌칙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현실에선 격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한다. 이 현실은 술래들에게 등을 돌려 버린다. 결국 술래들은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만다. 아무런 유서 없이. 그렇게 끈을 놓아 버린 이들이 22 명이나 된다. 자살의 이유는 개인적 이유가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몰아 버렸다는 이유다.  "사회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 사회에서 나가달라고."는 한 노동자의 말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의자놀이에서는 의자 수를 참여자들의 수보다 하나 모자라게 놓는다. 쌍용자동차 사태에서는 2,646 개의 의자를 치워 버렸다. 의자를 찾지 못한 2,464 명 중 1,000여 명의 사람들이 파업에 참가했고 자본과 권력은 그들을 사냥하듯이 진압했다. 인간사냥이다. 그들은 세상의 구조적 폭력에 힘 없이 희생당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소설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급했다. 그는 23번 째 자살자 소식을 듣고싶지 않았다. 그는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써 내려갔다. 

돈! 그 돈이 모이면 자본이 된다. 돈에는 인격이 없다. 자본 앞에서 인격은 무참히 밟히고 생명은 풀처럼 베이고 꽃처럼 떨어져 짓밟힌다. 인생은 부속이 되어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당한다. 자본은 모호하다. 타인의 희생으로 자기 배를 불리는 이들은 그 모호함 속에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그 전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자본의 철저한 배제 전략, 숨 쉴 틈 하나 주지 않는 고립과 낙인, 그리고 무대응, 공동체의 붕괴 땅위에는 관심이 없고 갈등을 피할 핑곗거리는 풍부하다는 것 등이라고 혹자는 말했다. ...... 쌍용자동차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앞으로 우리를 고용하고 월급을 주고 해고하게 될 자본은 대개 쌍용 자동차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해고하는  것도 이런 자본일 것이다.

'인간'은 '사람 사이'를 의미한다. 혼자로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함께 살아야 '인간'이다. 의자놀이는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 더 이상 의자놀이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의 구호는 이거다. 

"함께 살자 함께!" 
즉, 인간답게, 인간처럼 살자는 말이다. 자살의 원인은 고통이 아니라 '절망'이다. 절망에 빠지면 살아도 산게 아니다. 절망하면 삶의 끈을 잡을 힘이 빠져나가 버린다. 르포르타주 끝에서 작가는 절망하지 않는다. 꿈을 꾼다. 해고도 차별도 폭력도 없는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평화를.

혼돈, 지연, 분열. 저자가 카톨릭 피정에서 들은 악의 특징들이다. 그들은 자본과 권력과 법 뒤에서 대낮에 땅 위로 당당히 휘젖고 다닌다. 혼돈과 지연과 분열 속에선 저쪽을 상대할 수 없다. 싸움을 위해선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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