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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글의 제목을 통해 떠올리게 되는 시가 있다. 정지용의 '향수' 어렴풋한 고향의 이미지는 늘 우리를 충분히 감상적으로 만들며 내가 돌아가야만 하는 회귀의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그곳에서라면,,,,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체코가 공산주의화 된 후 망명길에 올랐던 이레나와 조제프가 고향 보헤미아에 향수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슬픔과 고통,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하는 막막함.... 그러나 그들은 각각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정착했으며 그곳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공산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지만 결국 남겨진 것은 고향에 대한 환상. 결코 공유될 수 없는 20년간의 시간적 공백만을 느낀다.
저자가 소설의 서두에서 언급한 율리시스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모티브가 된다. 율리시스가 그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를 사랑하여 그를 볼모로 잡은 칼립소와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페넬로페..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과 고향에서 짧은 삶과 타향에서의 길었던 삶(혹은 실제적인 삶) 다시 귀향했을 때 20년의 공백이 가져다주는 참혹한 괴리감 등...
고향, 귀향, 추억, 옛 사랑...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이 단어들이 주는 아련한 감성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모든 감정은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자 할 뿐 실제하는 감정이 아닌듯 하다. 내가 떠난 고향, 떠난 그 이후의 변화는 낯설고 생경하다. 그래서 귀향에서 느끼는 감정은 서운함. 고향은 그저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고향에서의 추억, 아니 과거의 모든 추억들... 단편적인 이미지들일 뿐인 추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흔히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며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노후를 대비하여 일기를 쓰고, 나의 흔적들을 남기며 살아갔다. 그런데, 책 속의 조제프는 20년 전 자신의 일기를 읽은 후 일기장을 잘게잘게 찢어버렸던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던 조무래기와 자신이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에 분개한다.
똑같은 필체를 가지고 시간적 차이를 두고 존재하는 하나이지만 유사성이 없는 두 존재.
세상에.... 난 일기를 통해 나의 모습을 더욱 깊이 느끼고 보존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작가의 이러한 서술에 충격을 받았다. 난 결국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나의 편린들만을 소중한 보물인양 보관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또다른 그의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ps. 이전에 그의 책 '정체성'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때에는 역시 진지함을 가지고 읽었으나 모든 기억은 강물에 실려 떠내려가듯 깨끗히 지워져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