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식민지, 한미 FTA
이해영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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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는 새로운 식민주의를 예고합니다

-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낯선 식민지, 한미FTA]

현시기의 한국사회는 그 사회경제적 성격과 발전단계에 있어 ‘종속적국가독점자본주의’(이하 종속적국독자)로 규정될 수 있다. 이때 종속적국독자 일반은 (1) 독점자본의 운동이 경제 전체의 운동에 대해 지배적인 규정력을 행사하며, (2)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보장하는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기능인, 국가에 의한 사법체계의 강권적 보장에 의해 보호되는 가운데 독점자본 운동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적 자본주의의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과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을 보완하는)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자본축적을 위한 ‘단일의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 융합(강조-인용자)되어 있으며, (3) 세계자본주의적 연관에서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운동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자국에서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항상적으로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로 유출되는 구조를 지닌 자본주의체제라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때 (1)과 (2)는 국독자 일반에 해당되는 규정이라면, (3)은 종속적국독자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종속적)국가독점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김세균, 콜로키움 발표논문집 중, 1999.

 

 

 

오래된 사회구성체이론을 되짚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미FTA와 초국적 자본의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를 달리 규정할 수가 없어서 김세균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이전에 우석훈 박사의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를 읽고 한미FTA 저지투쟁은 현재 철학적 논쟁의 단계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협정내용을 공개한다고 정부가 천명한 이상 우리의 반대투쟁은 과학적 논쟁의 단계를 노정하겠지요. 물론, 결국 전선은 과격한 신자유주의 운동권집단 및 그에  준동할 수구집단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진보정치세력간의 철학의 차이로 그어지겠지만 말입니다.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과 한미FTA저지범국본 정책기획연구단장을 지낸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책 [낯선 식민지, 한미FTA]는 우석훈 박사의 책보다 먼저 출간되었으며, 우석훈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이해영 교수의 본 저서를 통해 각 분야별 쟁점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낯선 식민지, 한미FTA]는 각종 구체적 경제수치들을 인용하면서 한미FTA가 왜 우리 민중에게 이익을 줄 수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개 예정인 한미FTA 협정결과와 그를 뒷받침하는 각종 현란한 경제적 수치들과 비교하면서 확인하기에 알맞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경제학적 지식이 일천한 저와 같은 평범한 노동자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더군요. 아무튼,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들춰보면서 각종 경제수치와 관련 데이터들을 확인할 필요는 있을 듯 하더군요. 

예를 들면, 한국 총수출액의 48%, 대미수출총액의 66%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 현대차, LG, SK 등 4대 재벌기업은 이미 초국적 자본이 되어 있는 상황이며, 사실상 대미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 한국계 초국적 기업의 입장에서는 비록 FTA를 통해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또 경쟁력이 갑자기 강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별 손해볼 일 없는, 그래서 지금까지 해왔던 다른 수단에 의한 비즈니스의 연장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를 보면, 자동차와 전자, 섬유 등의 일부 주력산업의 이익을 위해 한미FTA를 성사해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이해도 오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한미FTA 협정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캐나다, EU 등과 FTA 협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역시 목표는 대다수의 민중의 이익이 아니라, 그것도 못된다면 국익도 아니라, IMF와 같은 외부충격에 의한 구조조정과 그로 인한 국내 초국적 재벌자본의 이익이었던 것이지요. 공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서의 국가와 사적 자본주의의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서의 국내 재벌의 비즈니스의 연장이 완벽하게 단일화된 모습입니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엥겔스가 규정한 국가의 모습 그대로 완벽한 부르주아지의 위원회가 되었습니다

이해영 교수 역시 한미FTA를 단순한 경제통합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우리 사회가 미국화되는 포괄적 재식민화로 규정합니다. 또한 모두가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하는 한미FTA에는 자본과 돈의 자유만이 있을 뿐, 노동의 자유는 없으며, 결국 자유무역주의는 강자의 보호주의라고 말합니다. 즉, 비교우위에 있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시장의 개방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개방하면 경쟁력이 강화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업자의 최대 소원은 최대 이윤이 가능한 독점이므로 종속을 좋아할 리 없는 바, 종속을 본질로 하는 한미FTA는 노무현 정권이 공언하듯이 경제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성장엔진도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인 국가와 사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인 자본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지금의 한국 사회는 원래부터 종속적국독자였습니다만, 한미FTA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현재의 국면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새로운 식민주의인 초국적 식민주의라고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계기는 바로 지식이라고 하는데, 지식은 생전에는 서비스산업을 추동하고 투자를 촉진하며, 사후에는 지적재산권이라는 형태로 신식민지에 대한 지속적 약탈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적재산권 관련해서는 약190억달러의 특허권 대여 순수익을 거두는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약150억달러의 적자를 보고 있다는 데이터를 제시함으로써, 한미FTA 이후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대미종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한미FTA 저지의 대안으로 이른바 통상절차법이라고 하는 국제통상조약 체결절차에 관한 법률의 제정(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발의)을 통해 국회의 사후비준이 아닌 국제통상조약의 체결 전과정에서 국회의 감시와 실질적 비준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수 국민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조약의 체결에서 국민의 대표로서 국회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또한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비단 한미FTA 뿐만 아니라 향후 국가의 조약체결 관련하여 의미있는 사항이라 생각됩니다. 


***


1. [낯선 식민지, 한미FTA], 이해영 지음, <메이데이>, 2006.
: 통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통계는 각각의 철학적 관점에 따라 충분히 조작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시경제지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이 책은 협정내용 공개 후 남발될 각종 수치싸움에서 두고두고 확인할 만한 경제적 수치들을 한미FTA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 독자에게 책을 전달하기는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한 권을 더 구입할 생각입니다. 저자가 대안으로 조심스레 제시한 통상절차법 제정은 민주노동당과 우석훈 박사의 국민투표전술과 함께 찬찬히 고민해 볼만한 사항이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2. [현장과 이론 콜로키움 발표논문집1],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지음, <현장에서 미래를>, 1999.
: 1995년도에 발족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소장인 김세균 서울대교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관련 논문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콜로키움은 연구소에서 1998년부터 명명한 이론연구 세미나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김세균 교수의 논문을 비롯하여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일반이론으로 다룬 세 편의 논문과 국내 및 국외의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다룬 여러 편의 논문은 어렵기는 하지만 관심있게 읽어볼 만할 것 같아 추가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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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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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문제는 다시 철학입니다

- 우석훈 국제경제학 박사의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를 읽은 후 든 생각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일반의 기본적인 특성들이 발전함과 동시에 그대로 유지됨으로써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그 발전의 매우 높은 특정단계에서만, 자본주의의 몇몇 기본적인 특성들이 그것과 상반되는 것으로 전화되기 시작했을 때에만,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로부터 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조직으로 이행되는 시기의 특징들이 형성되어 나타날 때에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되었다.”

-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레닌,
제7장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로서> 중


한미FTA로 인해 자유경쟁, 무역 따위의 단어들이 난무합니다. 경쟁에서 불공정의 반대개념으로서 자유, 자원이 부족하여 대외무역을 중심으로 경제적 이익을 볼 수 밖에 없는 남한의 지역적 현실에서 무역의 중요함 등의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신봉하는 시장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경쟁만 하면 보이지 않는 손가격의 법칙에 따라 알아서 다 해결해주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시장은 분명,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절히 통제되어야 하는 객체에 불과합니다.

 

 

제국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로부터 시작한 정치체제로서의 제국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지칭합니다. 20세기 초반에 칼 카우츠키라는 독일의 사회주의 정치가는 이 제국주의가 자본가 정권의 정책적 선택이므로 다시금 자유경쟁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은 이미 자유와는 다른 방향의 독점으로 귀결되고 있었고, 이러한 독점은 한 국가경제 단위에서는 무한이익창출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다른 국가를 수탈하는 방식으로 갈 수 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참한 전쟁과 식민지 분할통치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 독점자본의 제국주의는 필연적이라는 제국주의론으로 카우츠키의 논거를 격파합니다.

 

제국주의. 현재 국제정치적으로는 미국, 경제적으로는 초국적 자본의 모습입니다. 한미FTA를 바라보는 시각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초국적 자본을 제국주의로 바라보느냐 아니냐의 시각으로 구분됩니다. 시장을 적절히 통제해야 하는 실체냐 아니면 무한한 기회의 장으로 규정하느냐의 시각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경제추제인 사회구성원 대다수의 안정된 삶이냐 소수 구성원의 무한한 이익이냐의 시각으로 구분됩니다.

국제경제학을 전공하고 국무조정실 등에서 근무했다는 우석훈 박사의 책,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는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 체결을 국가적 목표로 선언한 작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무한한 시장에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는 경제학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경제학적인 복잡한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2 ~ 8%선에서 각국의 일반관세율을 인정하는 WTO체제 하에서 평균관세율이 2%인 미국과 8%인 한국이 관세를 모두 철폐하자는 한미FTA를 체결하면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4배의 직접이익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다자간협정인 유럽연합과 미국주도의 양자간투자협정(BIT)인 FTA를 비교하며 비대칭성을 본질로 하는 무역협정에서는 힘있는 국가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본다는 경제학자답지 못한 주장을 합니다. FTA 이후로 국가경제가 붕괴되었지만 유럽연합처럼 노동시장까지 통합되지 않았기에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이 급증한 멕시코를 예로 들고, FTA 협상 중에도 유전자조작식품을 막기 위한 국민투표를 통해 협상을 중단시켰던 스위스를 예로 듭니다. 그리고는 핵심은 경제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국제경제학 박사이지만,  작금의 한미FTA에는 경제학자답게 이것 저것 실익을 따져볼 여지도 없다고 합니다.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앵무새처럼 이야기하는 노무현 정권과 그 협상기능인들은 아무런 경제학적 근거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열린 구조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려는 국정철학이 없으므로 한미FTA는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FTA 체결 이후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각종 수치와 핑크빛 전망들을 전해들은 주변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경제적으로, 수치적으로 너무 무지한 나 자신을 책망하였습니다. 굳이 FTA를 하지 않아도 우리 경제는 이미 조금씩 개방되고 있으며, 이런 개방이 국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불가피하므로 이에 대해 우리 경제 내부시스템을 우선 정비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면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당위론은, 근거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수치들에 묻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도 지식인도 아닌 나와 같은 노동자 입장에서, 선별적으로 개방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본투자를 앞세워 특별히 명시하지 않은 항목 외에는 포괄적으로 모든 것을 개방하자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한미FTA를 추진하면 공공요금, 의료비 등이 자본의 경제적 이익에 맞게 폭등하고 외국자본에 의해 잠식된 직장의 무한한 구조조정으로 일터를 잃을 가능성이 높은 나와 같은 평범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핵심은 철학이었습니다.

 

 

근거없는 수치들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한미FTA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이 정권이 진정 노동자, 농민 등의 대다수 구성원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정권인지, 아니면 거시경제적 수치를 높이기 위해 소수의 산업에만 집중하여 그 외 대다수 민중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정권인지, 초국적 자본에 의해 주물러지는 시장이라는 괴물을 방치하여 대다수를 죽일 것인지, 아니면 운좋은 소수만 살아남게 할 것인지에 대한 시각의 차이입니다. 물론 살아남은 소수는 시장’이라는 괴물의 등에 올라타고 온갖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겠지요. 그들에게 분명 한미FTA는 무한한 기회입니다.

아무튼, 이 시각의 차이를 나는 세계관의 차이라고, 철학의 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보편적이지 않은 사회구성의 극히 일부만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시각을 철학의 빈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빈곤한 철학으로 민중들을 도박장으로 몰고가려는 소수 자본가들의 위원회에 불과한 노무현 정권을 반대합니다.

 

 

한미FTA, 결국 문제는 다시 철학입니다.

 

 

 

 

 

***

 

 

1.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녹색평론사>, 2006.

: 저자의 시각이 어떠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유시민이 평론가 시절에 주장하던 케인즈주의 약간 왼쪽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냄새만 맡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국제경제학 박사인 저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FTA를 즉각 중단하라고. 그리고 그가 풀어내는 다자간 관세동맹인 GATT와 그 규제기구로서 WTO, FTA 이야기, 다자간협상에서 이익을 볼 수 없게 된 미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비대칭적인 양자협상이라는 맞다이를 통해 결국 일방적으로 이익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 경제학자 입장에서 실익분석에 필요한 기본 자료들을 노무현 정권은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나 우리나라 경제현실 조차도 분석, 이해하지 못한 정부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국가정책을 대충 추진하려고 하는 정부는 결코 대충 살아갈 수 없는 국민 모두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의사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현재 민주노동당이 주장하고 있는 국민투표 전술과 닮아 있습니다. 물론 87년체제 이후 개정된 헌법 72조에서 국민투표를 부의할 수 있는 자는 대통령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쓰여진 1년 전이나 현재나 국민투표의 현실성은 없습니다만, 철학이 없는 정부는 힘없는 대다수 민중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레닌 지음, 박상철 번역, <돌베개>, 1992.
: 자본주의 최초단계에서는 자유로운 경쟁을 이야기하지만, 대다수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 생산이 집중-맑스의 [자본]에서는 생산수단이 소수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이 현상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합니다-되면서 필연적으로 독점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융자본이 산업자본과 분리되면서 자본의 이동은 더 활발해지고 결국 국가, 민족 등의 경제단위를 허물면서 약소국과의 불균등성을 본질로 이익창출을 위한 자본의 자가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약소국 또는 식민지 민중을 이중으로 수탈하는 자본주의 최고단계인 제국주의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참고로, 제국주의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레닌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독점을 낳을 만큼의 생산 및 자본의 집중
      금융자본(은행자본+산업자본)에 의한 금융과두제
      자본수출의 중요성
      독점자본가들의 국제적 동맹
      독점자본 및 그 대변인인 국가에 의한 세계분할과 재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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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전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18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 지식산업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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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희망, 성군(聖君)도 되지 못한 주원장(朱元璋)

 

지주계급의 농민에 대한 잔혹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박은, 농민들을 여러 차례 봉기하도록 하여 지주계급의 통치에 반항하도록 만들었다. 진나라의 진승, 오광, 항우, 유방으로부터 한나라의 신시, 평림, 적미, 동마, 황건, 수나라의 이밀과 두건덕, 당나라의 왕선지와 황소, 송나라의 송강과 방랍, 원나라의 주원장, 명나라의 이자성을 거쳐 청나라의 태평천국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백 번의 봉기는 모두 농민의 반항운동으로서 농민 혁명전쟁이었다… 중국봉건사회에서 오직 이러한 농민의 계급투쟁, 농민봉기, 농민전쟁만이 역사발전의 진정한 동력이었다. 매번 비교적 큰 농민봉기와 농민전쟁의 결과로 그 무렵의 봉건통치에 타격을 가하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어느 정도 밀고 나아갔다.

- [모택동선집], <중국혁명화중국공산당>, [주원장전] 제6장 주석 발췌.

 

중국 역사에서 기층 농민 또는 무산계급 출신의 황제는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기원전의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고, 또 하나는 14세기에 명(明)나라를 건국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었다.

한족(漢族) 중심의 전통적인 중화(中華)사상으로 보면, 유방의 초한전쟁은 중국 최초 통일 국가였던 진(秦)나라의 분열 후 재통일을 위한 내전이었던 반면, 주원장의 반원(反元) 전쟁은 외세에 대항한 민족해방전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아시아 역사 장악을 위한 중국의 각 공정을 토대로 보면, 주원장의 투쟁도 그냥 단순한 권력교체 단계에 불과하겠다. 

아무튼, 찢어지게 가난하여 굶어죽지 않기 위해 행각승(行脚僧)도 되었다가 도적떼의 행동대장으로 반란 투쟁을 시작한 주원장은 당시의 기본계급인 농민 출신으로서 한 국가를 건국했고, 중국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가혹한 독재정치를 실시한 군주로 기억된다. 영웅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세출의 영웅이요, 반란과 혁명으로 점철된 중국 역사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元)나라 말기, 농민반란군인 홍건군(紅巾軍)의 창설자 팽형옥(彭瑩玉)은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彌勒佛下生) 세상을 구원한다는 교리로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이 종교집단은 백련교도와 같이 미륵불(彌勒佛) 또는 명왕(明王)을 믿는데, 바로 명교(明敎)로서, 이는 당나라 시기 페르시아인 마니가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불교를 혼합하여 창시한 마니교를 그 연원으로 하며. 결국 명왕에 의해 세상이 구원된다는 점에서 미륵불 신앙과 비슷하다.

명왕은 밝음과 어둠으로 나뉜 세상에서 어둠을 대표하는 암왕(暗王)을 타도하고 밝은 세상을 여는 자로서, 이 농민반란군 세력을 기본토대로 하여 국가를 세운 주원장이 국호를 대명(大明) 또는 명(明)으로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부패한 원나라의 암왕을 타도하고 밝은(明) 세상을 열었다는 것이다. 

저자 오함은 반원 투쟁의 출발점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이 명교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명교의 주요 교리는 이종삼제(二宗三際)이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명과 암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나아가 오함은 명교적 반란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명교도가 주장하는 최후의 목표는 명암이 각기 제자리로 돌아가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인데, 암흑의 세력은 투쟁을 거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농민에 대한 착취, 압박, 사역의 제도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도사상도 절충, 타협적이고 중도에 포기하는 식이었을 뿐 아니라, 기껏 피 흘리며 희생한 결과가 여전히 지주의 농민에 대한 통치,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압박이었다. 따라서 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해 철저하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 역사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모든 봉기는 한결같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원장은 호주(濠州)의 곽자흥이라는 반란군의 휘하로 들어가서 후에 명태조의 황후가 되는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의 혼인을 통해 그의 사위이자 신임받는 부하가 되는데, 곽자흥의 사후 그 세력을 장악하고 남경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오(吳)국공이 되었다가 서수휘, 장사성, 진우량 등의 각지 반란군 우두머리들을 무찌르면서 반원세력의 우두머리, 오왕이 된다.

주원장의 반원 투쟁은 두 단계의 국면이 있는데, 전반기는 홍건군 계열의 반란조직을 통합하는 과정이며, 후반기는 비홍건군 계열인 중소상인, 지주계급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다. 전반기는 농민계층을 기반으로 한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한 반면, 후반기는 유기(劉基), 송렴(宋濂) 등의 유교적 한족주의자 등의 적극적 기용을 통한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이 강했던 단계이다.

결과론적으로 주원장은 원나라 몽골 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중국을 되찾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선택했던 전략은 역사를 전진시켰던 기본 농민혁명 계급을 배반하고 지주들의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세력을 포장하여 반원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오함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주원장은 농민봉기로 기반을 세웠다. 바로 이 농민 혁명투쟁의 위대한 힘이 그를 승리로 이끌어 주었는데, (지주계급을 적극 기용한 이후) 천명론(天命論)으로 꾸미면서 이와 같은 위대한 힘은 단번에 말살되고 말았다. 인민 군중의 힘과 함께 사회의 전진을 추동하는 혁명투쟁의 힘은 잘려 나가버리고, 혁명이 성공한 원인은 오직 주원장이 천명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군 봉기는 선명한 계급투쟁으로서 몽한(몽골족,한족)지주계급의 연합통치를 뒤엎고자 하였고, 낡은 봉건질서를 깨뜨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을 선전하는) 격문에는 정반대로 기강을 세워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기강은 봉건질서의 기강으로서 곧 세상을 다스리는 규율이다. 격문에는 봉건지주계급의 기강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였으며, 얼마 전 장사성을 토벌하는 격문에서 소극적으로 홍군을 견책하고 홍군을 배반하였던 데서 또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 주원장이 권력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기본계급을 배반하고 지주계급의 이익과 그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이자 홍무제(洪武帝)로 불리는 주원장은 지주, 관료계급으로부터 왕권을 지켜내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중국사에서 유래없는 혹독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명나라 대부분 관료들은 임기가 짧았으며, 봉급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동시에 명나라 주씨 황제가 나타난 이래 10년에 9년은 흉년이었다는 등 민중의 생활도 피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독재군주 주원장은 왕위세습 조차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권력쟁투를 촉발시켰으며, 명나라는 그 쟁투에서 승리한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성조인 3대 영락제 시기 이후 후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물론, 당시는 봉건적 사회발전 단계였으므로 계급타파를 통한 농민권력을 기획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회적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당파성을 배반한 결과 또한 명확한 것이다.

주원장은 기본계급을 배반함으로써 민중의 희망도 될 수 없었지만, 지주계급의 사상을 옹호했음에도 끝내 '성군(聖君)'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참고서적] 

1. [주원장전;朱元璋傳],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저자 오함은 중국 역사학자이며, 문화혁명 시기에 옥사 후 10년 뒤에 복권된 인물로서,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인물전을 썼다. 즉, 위대한 인물 중심이 아닌 역사와 사회구조를 주요 배경으로 한 서술이며, 사회구조를 민중 중심의 계급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

2. [제국의 아침], 진순신 외 엮음, 윤소영 옮김, <솔출판사>, 2002.
저자는 소설가이자 경제학자인 난죠 노리오

3. [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돌베개>,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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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 / 창비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계략(計略) 또한 변증법(辨證法)이다

-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1)
: 변증법적(辨證法的) 세계관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계책(計策)들의 기묘한 관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병법(兵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누구나 익히 들어 잘 아는 위 문구는 중국고대의 유명한 병법서, <손자(孫子)> 13편 중 제 3편 모공(謨攻)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知彼知己 白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나, 상대는 모른 채 나 자신만 알면 이길 확률은 반반이며, 나도 상대방도 모두 모르면서 싸움에 임하면 매번 위태롭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태롭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에 대한 바른 인식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양자(兩者)간의 관계는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나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동시에, 나 자신을 어느 정도 알아야 상대의 힘을 측정해 볼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으나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일 터, 결국 위태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관건은 바로 상대를 정확히 아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간 투쟁에서의 기본전제이다.

후한 말기(後漢 末期), 황건(黃巾) 농민반란이 일어난 184년 경부터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정립시기를 거쳐 사마염(司馬炎)의 진(晉;西晉)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280년 경까지 약 100여년간의 기록은 <삼국지(三國志)>라 하여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 장대한 이야기는 정사(正史)로 보면 진(晉)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를 기초로 하여 이후 남북조(南北祖) 시대의 송(宋)-5대10국(五代十國) 이후 후주(後周)의 절도사였던 조광윤(趙匡胤)이 중국을 통일하여 건국한 송(宋)나라가 아닌-의 문제(文帝)가 중서시랑(中書侍郞) 배송지(裵松之)에게 명하여 편찬한 방대한 <주석(註釋)>을 거치면서 각종 야사(野史)가 덧붙여져 더욱 풍부해졌고,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대중화되면서 지금의 이야기로 정착되었다. 나관중의 <연의>는 오랜 기간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한참 후 명나라 중기인 1522년에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는 제목으로 처음 간행되었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총 120회의 이야기로 정리된 판본은 그보다도 더 이후인 청(淸)나라 때 모종강(毛宗岡)이라는 사람이 정리한 모종강본(本)이다.

왕조의 교체, 혹은 권력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온갖 전쟁과 전투, 인간들 사이의 각종 책략 등, 세상만사의 이치가 한데 녹아있다는 찬사를 받는 동양의 고전(古典)으로서의 <삼국지>는 국경(國境)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들을 준다고 하는데, 이처럼 <삼국지>는 서로 먹고 먹히며, 믿음이 배신으로 변하나 그 배반 또한 또 다른 신의의 원천이 되는 순환론(循環論)적이면서도 무척 풍부한 동양철학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도 하다. 세상만사는, 나뉘어진 지 오래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되면 나뉘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면서 시작되는 <연의>의 첫 문장은, 후한 말기 삼국으로의 분열과 다시금 진나라로의 통일이라는 또 한 번의 순환을 예고하며 이러한 사상을 단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각각의 인물, 상황을 깊게 통찰하는 수많은 고시(古詩)들이 담겨져 있으며, 특히 총 120개에 이르는 각 회들은 짧은 시로써 다음 회를 예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다양하고도 현란한 계책들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짧은 구절로 압축하고 있는 바, <연의>의 71회와 72회를 이어주는 싯구(詩句)를 한 편 소개한다. 

魏人妄意宗韓信,
(魏;나라 위 / 人;사람 인 / 妄;망령될 망 / 意;뜻 의 / 宗;따를 종;從 / 韓信;한신),
위나라 사람이 망령되어 한신을 따라 본받지만,

蜀相那知是子房
(蜀;나라 촉 / 相; 재상 상 / 那;어찌 나 / 知;알 지 / 是;곧 시 / 子房;장자방;장량)
촉나라 재상이 바로 장자방(장량)임을 어찌 몰랐는가

여기서 위인(魏人)은 조조(曺操;孟德)의 장수 서황(徐晃)을 이르고, 촉상(蜀相)은 유비(劉備;玄德)의 책사(策士)이자 촉의 재상인 제갈량(諸葛亮;孔明)을 지칭한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71회와 72회의 무대는 유비가 관중(關中)을 지나 파촉(巴蜀) 땅에 근거를 마련한 후, 유비를 쫓아 한중(漢中)을 평정한 위나라 승상 조조가 장수 하후연과 장합을 앞세워 대치하고 있을 때이다.

하후연은 용맹하기는 하나 경솔하고 지략이 없는 장수였다. 반면 촉의 황충(黃忠)은 고령이었으나 용맹과 지략을 모두 겸비한 장수였는데, 군사의 사기를 독려하고 조금씩 전진하여 영채를 세우면서 성미급한 하우연에게 싸움을 걸어 결국 그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어 전략적 요지인 정탐산을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황충에게 촉의 책략가 법정(法井)이 건의한 이 계책 또한 반객위주지계(反客爲主之計)로서, 민간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서른 번째 계책이다. 즉, 처음에는 객(客)이었지만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정확히 분석, 공략하여 조금씩 발을 들이밀면서 점차로 상대방의 심장부에서 주(主)가 되는 계책인 것이다.

한편, 위의 맹장 하후연의 죽음을 전해들은 조조는 결국 건안23년(218년) 7월에 40만 대군을 일으키고 몸소 한중으로 나선다. 이 때 서황은 오래 전 한나라 대장군 한신이 그러했듯이 물을 등에 지고 싸우는 배수진(背水陣)을 앞뒤 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본받아 한수를 건너 진을 세웠고 이를 말리던 왕평은 어리석은 서황이 전투에서 지고 달아나는 동안 촉에 투항하게 된다. 당시 촉은 황충과 조자룡의 활약으로 승세를 타면서도 신중하게 방어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위는 군사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패배에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황이라 촉상 제갈량의 손바닥 위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배수진은 적합치 못한 병법이었다 할 수 있다. 위 시는 이런 상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배수진(背水陣)의 유래를 잠깐 살펴볼 만 하다. 이는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 유방 휘하에 있던 한나라 대장군 한신(韓信)의 기책(奇策)이었다.  기원전 203년이자 한고조(漢高祖) 원년(元年), 항우가 의제(義帝)를 죽이자 각 제후들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56만의 대군을 규합한 한왕(漢王) 유방이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彭城)을 도모하였다가 항우의 3만 정예부대에게 어이없이 대패하고 한중(漢中)으로 퇴각하던 중 대장군 한신으로 하여금 3만의 군사로 조(趙)나라 땅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나라의 승상은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였는데, 자신의 20만 대군만 믿고 자만스럽게도 한 판의 싸움으로 대장군 한신을 꺾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진여에게는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佐擧)라는 책사가 있었는데, 그는 진여의 이 거만한 태도에 누차 경계를 주었지만 들어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여가 죽고 조나라 땅이 평정된 후 한신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3만의 군사를 지휘하던 한신은 2천의 정예병을 뽑아 진여의 진채 부근에 매복시켰고, 1만의 군사는 저수의 물가쪽으로 보내 먼저 진채를 세우라고 명한 후, 나머지 본진을 몰고 조군을 도발하여 저수가로 유인했는데, 자만한 진여는 자신의 본영에 정병을 두지 않고 모든 군을 들어 한신을 뒤쫓았다. 역시 이좌거는 정병을 진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진여는 대장군만 잡으면 나머지 군사들은 자연스레 진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수가로 한군을 쫓아갔다. 이 또한 금적선금왕지계(擒賊先擒王之計)로서 삼십육계의 열 여덟 번째 계책이긴 하였으나 전투의 형세를 보았을 때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저수를 등에 지고 진채를 세운 1만의 군사와 조군을 유인한 2만여의 한군은 처음에는 당황하였으나 10월 겨울에 접어든 시퍼런 저수의 강물을 보니 뒤돌아 더 이상 달아날 방도가 없고, 또한 얼마 전 팽성에서 많은 군사의 수(數)만 믿고 경솔하게 대응하다가 항우의 군대에 의해 10여만이 넘는 군사의 시체가 수수라는 강물의 흐름을 막았던 뼈저린 기억이 생생했던 지라, 함께 뭉쳐 목숨을 걸고 조나라 본군과 필사의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제 쉽게 제압되지 않는 한군을 보고 문득 자신의 본영이 생각난 진여는 군사를 물려 자신의 진채로 돌아왔지만 정병을 남겨두지 않았던 조나라 진영은 이미 한신이 미리 떼어놓은 2천의 정에병에 의해 이미 점령된 상태였다. 결국 한신에게 사로잡힌 진여는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한신이 조나라 땅을 온전히 평정할 수 있었던 이 전투에서 빛나는 계책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었다. 물론 당시 병법(兵法)을 안다 하는 장수들은 모두 강물을 등지고 싸움에 임하는 것을 흉(凶)한 전술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한신은 지난 팽성전투의 생생한 기억과 정예병을 이용하여 적의 앞뒤를 공략한 복배협격(腹背夾擊), 즉 대군을 믿고 자만에 빠진 진여로 하여금 2천의 소수군보다는 대장군기를 보위하는 나머지 본군을 쫓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듦으로써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서황이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실패했던 배수진은 얼마 후 촉이 위의 대군을 물리친 계책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승세를 잡은 촉상 제갈량이 유비에게 직접 한수를 건너 물을 등에 지고 진채를 세우라는 계책을 알려주었고 이에 조조는 다른 숨은 계책이 또 있을까 하여 진채를 버리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서 제대로 촉에 대응하지 못한 채 한중으로부터 아예 퇴각하려는 조조의 결정은 또한 계륵(鷄肋)의 고사를 낳았다,

한중에서 군세가 밀리는 것으로 판단한 조조는 어느 날 저녁상으로 나온 닭고기탕의 닭갈비를 보고 퇴각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는 닭갈비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으로서 한중에 머문 위나라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자니 이기지 못할 것이고 물러서자니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터이지만 더 머물러 있어봐야 이익이 없으니 차라리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데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조조는 계륵을 통해 자신의 번민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고 위나라 군중에는 양수(陽修)라는 행군주부(行軍註簿) 외에는 그의 뜻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양수는 재능이 뛰어나고 총명하나 조조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너무 과시하여 조조로부터 미움을 계속 사고 있던 바, 마침 계륵의 의미를 군중 내에 떠벌린 양수에게 군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씌워 참수(斬首)함으로써 간신히 위신을 세우기는 했지만, 조조는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한중을 넘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계책이라 해도 그것은 상황의 추이에 따라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한신의 배수진복배협격의 계책과 어우러져 진여의 금적선금왕지계를 제압하였고, 반객위주지계를 비롯하여 복잡다단했던 제갈량의 전략을 꿰둟어보지 못한 서황의 배수진은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그럼에도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제갈량의 전술은 다른 계책도 아니고 서황이 실패했던 바로 그 배수진이었다.

하나의 책략(策略)은 그 하나만으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나 자신만의 틀에서만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나의 기량을 정확히 가늠한 후에야 진정한 계책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신 또는 즉자(卽者)와 상대 또는 대자(對者)의 복잡한 운동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도출된 정확한 정세판단을 세상만사의 기본으로 삼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세계관의 진수(眞髓)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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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사마천 지음, 김진연 옮김 / 서해문집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說者同而得失異者)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10)
: ‘항우본기(項羽本記)’, ‘고조본기(高祖本記)’를 통해 본 초한전쟁(楚漢戰爭) - 2

 

사학법(私學法) 개정을 반대하며 수구세력(守舊勢力)이 국회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권에서 연회(宴會)를 열었다. 연회의 시작은 단연 여당인 열린우리당이었다. 2006년 1월의 내각인사 이후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새로 선출한답시고 한창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신임 여당 원내대표와 역시 새로 뽑힌 야당의 원내대표가 설날 다음날에 북한산에 오르면서 정치적 연회의 절정을 이루었다. 북한산 정상에서의 양당 원내대표의 합의. 사학재단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지키고 국가정체성(國家政體性)수호(守護)하고자 국회문을 박차고 나갔던 수구야당은 다시 국회 등원을 선택했고, 여당에서는 사학법의 재개정을 전제로 한 합의가 아니었다고 손을 내젓는다.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제도를 통해 자신의 사유재산을 더욱더 불리고 교육(敎育)이라는 허울을 빌어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한 온갖 비리를 일삼던 사학재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애초의 취지는 사학법의 재개정의 가능성과 더불어 이미 민중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일점일획(一占一劃)도 고치지 않겠다는 여당 지도부의 수사(修辭)에도 이 땅 민중들은 별로 수긍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정치(政治)는 결국 타협(妥協)의 예술(藝術)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6년,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항우(項羽)보다 먼저 점령한 유방(劉邦)은 뒤따라오는 항우의 세력에 겁을 먹고 일단 근처 패상(覇上)이라는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고, 뒤늦게 함양에 도달한 항우는 홍문(鴻門)이라는 곳에 40만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10만에 불과한 유방의 군사를 치려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은 오래전 유방의 책사(策士) 장량(張亮;張子房)으로부터 신세를 진 바 있어 다음날의 참사를 미리 알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돕고자 유방의 진채로 찾아든다. 하지만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며, 항우에게 항복할 것을 유방에게 권유하였고, 유방은 항백을 맞아 자신은 원래부터 함양을 들어 항우에게 바칠 의사였노라고 말한다. 이에 항백은 유방에게 그 다음날 직접 항우를 찾아가서 그 뜻을 전하라고 권하지만, 천하를 차지하려는 유방의 큰 뜻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항우의 책사 범증(笵增)은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는다.

다음날, 항우를 찾아간 유방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사죄하는 한편, 범증은 항우의 사촌동생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검무(劍舞)를 추게 하여 유방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검무의 짝을 맞추면서 이를 교묘하게 제지한 항백과 당시에는 항우를 위해 일했으나 후에 유방의 또 다른 책사로 활약한 진평(陳平)의 도움으로 유방은 술에 취한 척 하며 자리를 떠남으로써 항우를 속이고 무사히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유방이 슬그머니 도망갔음을 알아챈 범증은 유방이 헌상한 옥두(玉斗;옥으로 만든 국자)를 칼로 내리치며 분개했지만 이미 항우의 마음은 풀어졌으며 유방은 40리나 떨어진 패상으로 도주하고 난 후였다. 

홍문연회(鴻門宴會)는 유방의 언사에 속아 넘어간 항우가 헛되이 베푼 잔치인 동시에 유방을 유인하여 모살(謀殺)하려는 범증의 살육제(殺戮祭)였으며, 궁지에 몰린 유방이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처절한 정치적 타협의 장이었다.

 

鴻門宴會 (鴻門:홍문, 지역이름 / 宴:잔치 연 / 會:모이다 회)

 

홍문의 연회,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의 계략(計略)이 화려한 검무로 위장되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에 자신의 속내를 감춘 유방이 항우를 회유하여 속이는 한편, 강한 상대 앞에서 비굴한 모습도 불사하면서 술에 취한 척 도주함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후일을 꾀할 수 있게 한 잔치였으며, 고대로부터 타협의 극치인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5년, 스스로 옹립한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죽이고 항우는 패왕(覇王)이 되었고 이에 항우의 토벌(討伐)을 선언한 한왕(漢王) 유방은 각 지역의 제후(諸侯)들을 모아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공격하였으나 항우의 3만 군사에게 56만의 대군을 잃고 퇴각하던 중 형양(滎陽)에 머물게 되는데, 형양을 기점으로 하여 동서로 땅을 나눠 갖고 휴전을 하자는 제의도 거절당한 채 고단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의 측근 중에는 역생(易生) 또는 역이기(易餌其)라고 불리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한왕 유방에게 오래 전 은(殷)나라 시조(始祖)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暴君) 걸왕(桀王)을 끌어내린 후 그 후손에게 기(杞)나라의 봉지(封地)를 하사한 일, 주(周)나라를 일으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나서 그 후손에게 역시 송(宋)나라의 봉지를 나누어 준 일을 상기시키면서 진(秦)나라 이전 육국(六國)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봉건제를 다시 세우며 한왕의 관인(官印)을 내리면 모두가 한왕 유방을 우러르면서 마침내 초나라의 항우도 한왕 유방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방책(方策)을 제시한다. 이는 진나라의 폭정에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陳涉)과 오광(吳廣)에게 각 영지의 제후들과 그 측근들이 헌책(獻策)했던 내용으로서 극악한 진나라 황실에 대한 반란을 전국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끔 하였던 계책이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육국의 관인을 제조하라고 지시한 유방은 그의 책사 장량(張亮;張子房)에게 그 헌책의 장중함을 자랑하게 되는데, 장량은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정세분석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하여 유방의 밥상에 있던 젓가락 여섯 개를 가지고 조목조목 설파한다. 

첫째,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이 걸왕이나 주왕의 후손을 왕으로 봉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상대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였는 바, 유방은 지금 항우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물음.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장량은 천하를 힘으로 장악(掌握)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는 첫번 째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둘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면서 태행산(太行山)에 은거(隱居)하던 현인(賢人) 상용(商容)이 살던 마을 어귀에서 그의 밝고 어짐을 칭송하였고, 주왕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주었으며, 역시 주왕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키워주었는데, 지금 유방은 성인의 무덤을 돌보거나 현자를 널리 칭송할 만한 상황인가.

아직 그럴 겨를이 없다고 대답하는 유방.

, 아직 천하 만민의 마음을 두루 어루만지지 못한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두번 째 젓가락이 밥상 위에 올려진다.

셋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의 창고를 열고 재물을 흩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천하의 지지기반을 닦았는데, 과연 지금 유방은 천하 모든 창고의 돈과 곡식을 꺼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도 아직 천하의 창고를 모두 얻지 못한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 천하의 모든 재물과 곡식을 풀어 가난한 민중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세번 째 젓가락이 소리를 내었다.

넷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끌어내린 후 전투수레를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타는 수레로 바꾸고 창칼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거꾸로 매달았으며, 전투에 쓰였던 우마(牛馬)를 풀어주면서 다시는 전쟁에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천하에 선언하였는데, 과연 지금 유방도 무력(武力)을 포기하고 문교(文敎)를 우선시할 수 있는가라는 네번 째 젓가락 소리에도 역시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싸움을 다 끝내지 못한 유방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다섯째, 현재 한왕 유방을 따라 천하를 떠도는 수많은 호걸들에게는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에 봉지를 받아 제후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터, 육국의 후손들을 왕으로 봉하게 되면 유방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한 호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땅이 없음을 알고는 유방의 곁을 떠날 것이니 그들이 없이는 유방이 천하를 얻을 수 없기에 지금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는 다섯번 째 이유가 그것이다.

여섯째로, 한나라와 초나라의 형세가 저울질되는 판에 만약에 유방이 뜻한 바와 다르게 초나라가 강성해지게 되면 육국의 후손들을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니 한왕으로서는 지금 그 제후들을 왕으로 봉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여섯번 째 젓가락이 유방의 밥상 위에서 소리를 내었다. 

장량의 정세판단에 유방은 육국의 관인을 즉시 녹여 없애라 명하였으며, 역이기는 한참 동안 그의 거처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장량은 역이기와 다른 정세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한왕 유방이 항우와 자웅(雌雄)을 겨루던 당시는 수백 년에 걸친 봉건제(封建制)의 모순(矛盾)이 극에 달한 후에 진나라에 의해서 초석이 세워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장량의 명석한 정세판단 능력을 보여준다. 객관적으로 같은 조건에도 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이후 북송(北宋) 시대의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편년체의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헌책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고 한다. 

說者同而得失異者
(說;이야기 설/者;접미사 자/同;같을 동/而;부정접속 이/得;얻을 득/失;잃을 실/異;다를 이/者)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즉, 객관적 정세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서, 역시 객관적 인식이 모든 판단의 우선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자치통감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고 한다(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에서 인용).

“일찍이 장이와 진여가 진승을 찾아가 육국을 되일으켜 한편으로 삼으라고 한 것과 역이기가 한왕을 찾아가 헌책을 한 것은 그 말한 것은 같지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說者同而得失異者). 진승이 일어날 때는 천하가 모두 진나라가 망하기를 바랐으나, 초나라와 한나라가 나뉘어 형세가 정해지지 않은 당시에는 천하가 반드시 항씨(項氏;項羽)가 망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승에게는 육국을 되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자기편을 늘리고 진나라의 적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진승은 아직 천하의 땅을 오로지 얻지 못했으니 제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주어 속빈 은혜로 알찬 복을 얻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한왕에게 육국을 되세우게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 적에게 보태주는 꼴이요, 헛된 이름을 내세워 실제의 화를 얻는 길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야 하는 단계에서, 이전 시대 역사발전의 질곡(桎梏)이었던 봉건제의 부활을 통해 현재의 얽킨 실타래를 풀려고 했던 선비 역이기는 북송시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의 개혁적 당파에 대립하여 보수적인 구법당(舊法黨)의 영수(領袖)의 위치에 있던  사마광이 보기에도 현실을 타개(打開)하는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유재산’과 ‘국가정체성’ ‘수호’라는 명목 하에 언제까지 사학재단의 비리와 구태가 반복될 수는 없다. 수구세력은 ‘타협의 정치’를 통해 사학재단의 재산을 굳게 지킬 방법을 모색할 것이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연회를 마련한 중도개혁세력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적당한 선에서 재개정을 의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보자. 교육을 빙자한 소수의 ‘사유재산’ 지키기에 손을 들어줄 사람이 많을 것인가, 아니면 대다수 민중을 위해 보다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한 제도 속에서 아이들이 교육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인가.

같은 말이라 해도 객관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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