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쉬의 비밀 1 - 쾌락의 정원
페터 뎀프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Natura Mutatur, Veritas Extinguit."
- [보쉬의 비밀], 페터 뎀프, 1999.


"<쾌락의 정원>은 가톨릭교회의 종말을, 남성지배의 종말을 선포하는 그림이라는 사실이오."
- [보쉬의 비밀], <세번째 책>, 페터 뎀프, 1999.


여기 그림 '세폭'이 있다. 
한폭한폭, 또 한폭이 모여 성스런 제단에 바쳐진 그림, '세폭 제단화(triptych)'다.
17세기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이나 <십자가에서 내려짐>, 그 이전 세기의 <메로드 제단화> 등은 교회의 의뢰를 받아 그려져 미사의 배경화면이 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대형교회는 이 세폭 제단화의 주요 화면인 중앙 패널을 중심으로 신자들에게 성스러움 또는 공포와 회개를 유발했을 것이다. 기본이념은 기독교였으되 세부내용은 의뢰자인 해당 교회나 종파의 사상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15~16세기 북유럽 네덜란드 화가 히로니뮈스 보쉬(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1450~1516)가 그린 세폭 제단화가 있다. 제목도 없이 미술사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20세기 초 살바도르 달리 등의 초현실주의 화풍에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로 <쾌락의 정원>이라 불리게 된 그림이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은 이른바 '아담파'로 불렸던 '자유정신형제회'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작품으로 그들의 비밀예배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성화 같지 않고 매우 난잡해 보이는 이 그림은 전혀 가톨릭교회의 미사에 사용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20세기 중반 독일 미술사학자 빌헬름 프룅거가 제기한 위와 같은 가설에 의하면 남녀 교인들이 태초의 낙원과 같이 나체로 혼교를 하며 미사를 드리는 '아담파'라는 이단교의 수장인 야코프 반 알마엔힌의 의뢰를 받아서 그린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보쉬는 '아담파'였고 '이단'이었다.
'성당기사단'이나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이나 '시온수도회' 등 정통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받기 시작하면 온갖 음모와 미스터리가 가득해진다. 한편으로 이러한 '이단'적 환상과 상상의 결과는 '정통'의 교리에 가하는 균열이다.
기존 체제를 뒤집어 엎는 '혁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독일의 작가 페터 뎀프(Peter Dempf)는 미술사학자 빌헬름 프룅거의 이 가설을 중심으로 보쉬의 작품 <쾌락의 정원>을 해석한다. 20세기 말인 1999년에 발표된 [보쉬의 비밀]은 21세기 초에 발표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매튜 펄의 [단테 클럽]과 같은 영화적 활극이나 자극적 살인 등은 나오지 않는다. 1998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보쉬의 <쾌락의 정원>에 염산을 뿌린 '정통파' 신부 바에를러를 조사하면서 그가 들려주는 16세기 보쉬와 '아담파'(자유정신형제회) 이야기가 액자형식으로 병행하여 전개되지만 중세의 활극은 그저 옛날 이야기만 같고 사실 바에를러 신부의 최면과 같은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저 15~16세기 북유럽 네덜란드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종교재판관이었던 동명의 바에를러 신부의 현신 시늉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중세말의 '정통파' 종교재판관 바에를러 신부와 현재의 '정통' 수호자 바에를러 신부(사실 가명이다)의 변하지 않는 사명은 '이단'을 처단하는 것 뿐이다. 중세에는 마녀사냥과 고문과 화형의 방식이었고 현대는 '이단'의 아이콘인 미술작품의 파괴의 방식이라는 차이는 있다.

어릴적 우연히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본 후 18년 간 연구를 거쳐 관련 소설을 쓴 페터 뎀프는 바에를러 신부 못지 않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사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생애 자체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어 그저 추측과 상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소설 속 액자형 이야기의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 오리스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추천을 받아 보쉬의 직인까지 되었고 '아담파' 수장인 알마엔힌의 초상화까지 그릴 수 있었던 화가로 등장하나 미술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고향이 아우크스부르크란 점에서 같은 지역 출신인 저자 페터 뎀프의 상상속 현신일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 속 현재의 주인공인 미하엘 카이에 박사의 전생일 수도 있겠다. 훼손된 <쾌락의 정원>을 복원하는 미술사 전문가인 카이에와 '아담파'의 후예로 의심받는 여주인공 그리트 반데르베르프는 중세의 페트로니우스와 그의 여인 지타의 현신과도 같이 겹친다.


"16세기는 종교에서 새로운 경향들이 생겨나던 시대였소. 루터는 그 중 목소리가 가장 컸던 사람일 뿐이지. 교회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적으로 울려퍼지고 있었어요... 완전과 명상과 자유라는 세 원칙... 자유정신형제회는 완전의 원칙에서 정신적인 인간의 불과오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고, 명상에서는 신과의 유사성을, 자유에서는 자유로운 사랑의 개념을 만들어냈소. 천상적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낙원을 넓히겠다는 의미에서 말이오. 그것은 혁명적인 생각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극악무도한 것이었지요."
- [보쉬의 비밀], <첫번째 책>, 페터 뎀프, 1999.


'혁명'은 '이단'이고, '이단'은 '혁명'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미하엘 카이에와 함께 보쉬의 <쾌락의 정원>이 숨기고 있을 비밀을 파헤치려는 미술사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염산에 녹은 부분에서 발견된 비너스 상징기호나 불멸성(Posse non mori : 사람은 죽을 수 없다) 등을 표현한 이니셜(PSSNNMR) 등을 기초로 '정통' 가톨릭 교리에 균열을 내고 도전하던 '이단'의 '혁명성'을 읽어내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해석이 근거가 박약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암시와 함께 모조리 의문에 다시금 휩싸이며 소설은 끝나고 만다. 중세 유대교의 신비술인 카발라의 수비술과 수리 해석 등의 중세시대 당시의 '과학'이 동원되고 별자리 시대구분까지 갖다붙이고 있지만 결국 지적유희 또는 말장난과도 같다. 
<쾌락의 정원> 속에 숨겨진 '보쉬의 비밀(신비 : Das Geheimnis)'을 캐기 위해 에둘러 돌고 돌았던 지적유희의 결과는 허망하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단'의 환상 속에서 진리의 라틴어 명제 하나가 또렷이 남는다.


"Natura Mutatur(나투라 무타투르),
Veritas Extinguit(베리타스 엑스팅구이트)"


즉, "자연은 변화하고, 진실(진리)은 소멸한다"는 명제다. 미술사가 네브리하가 발견한 이 테제 속에 <쾌락의 정원>이 숨긴 메시지 일반이 담겨있다. 세계의 만물은 변화하고 '진리'였던 것은 소멸하며 새로운 '진리(진실)'가 나타난다. 가부장제로 버텨온 예수 이래 가톨릭 세계는 2천년 이상 '사자자리'의 시대였으나 예수를 상징하는 '물고기자리'를 거쳐 여성이 다시금 주체성을 회복하는 '물병자리'의 앞으로 2천년을 예고한다. <쾌락의 정원> 중앙 패널 상단에서 100명의 나체 남성들이 원무를 추는 장면과 그 가운데 연못에서 33명의 나체 여성들이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그 은유다. 카발라의 수비술에 의하면 '100'은 무수히 많은 수를 의미하며 직선적 진보의 사고를 대표하던 가부장적 남성들이 순환을 의미하는 여성적 원무를 추면서 다음 시대를 예고한다. 역시 '3'은 동양과 같이 '완전한 순환'을 의미하는 기초단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33년을 살았던 것처럼 완전한 숫자인 33인의 여성이 다음 세대로서 태어나는 중이다. 중앙 패널 하단을 채운 나체의 남녀 군상들은 딸기와 자두 등 성욕을 상징하는 열매를 따먹고는 있지만 직접적 성행위는 하지 않는다. 소설 속 '아담파'는 그 '이단'의 혐의에도 불구하고 비밀예배에서 혼교나 난교 등 집단성행위를 하지 않을 뿐더러 그 우두머리인 학자 야코프 반 알마엔힌은 아주 결정적 '비밀'을 숨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고로 '이단'적이었던 비밀이다. 의문의 화가 히로니뮈스 보쉬는 이 모든 '이단'적 '비밀'을 안고 1516년경 화형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미처 밝히지 못한 '비밀'들은 <쾌락의 정원>이라는 '아담파'의 세폭 제단화에 아직까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앞으로 영영 그 '비밀'들은 미궁 속에 있겠지만, 그림을 둘러싼 '이단'적 상상은 이미 "모든 것은 변하며 진리는 영원할 수 없다(Natura Mutatur, Veritas Extinguit)"는 비밀 아닌 '비밀'을 나체와도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측 패널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첫 만남을 갖는 '낙원'의 첫번째 에피소드인데,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이브의 태도가 엿보인다. 이 모든 것은 가운데 분홍색 구조물 속 올빼미가 지켜보고 있다. 올빼미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에서는 지혜의 상징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악마의 새로도 알려져 있다. 이미 '낙원'에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선과 악이 공존했다는 암시다.

우측 패널은 결국 모두가 불타는 지옥에서 <쾌락의 정원>을 뛰놀던 나체의 남녀 군상들이 향락의 상징인 악기에 묶이거나 얼음물에 잠기거나 새부리 괴물여인에게 잡아먹히는 등 암울한 결말의 세번째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 '지옥도'의 가운데 중심에서 섬찟한 표정의 인물이 몸통이 잘려 빈 속을 보이는 나무거인의 뒤에서 우리를 쳐다보는데, 보쉬 자신의 자회상이라는 설도 있고 또는 의뢰인인 알마엔힌의 초상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히 보면, 여성의 얼굴 같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에서 '아담파'의 수장 야코프 반 알마엔힌의 위험한 '비밀'이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마엔힌 또한 1547년 즈음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세폭 제단화' <쾌락의 정원>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 채 덮으면 세계 창조의 첫 장면이 나타나는데, 창조주인 신이 가운데가 아닌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신'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이단'적 '혁명'이 이미 <쾌락의 정원> 곳곳에서 암시된다.

***

1. [보쉬의 비밀(Das Geheimnis des Hieronymus Bosch)](1999), Peter Dempf, 정지인 옮김, <생각의 나무>, 2006.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3. [연표로 보는 서양미술사], 김영숙, <현암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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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쉬의 비밀 2 - 최후의 심판
페터 뎀프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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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a Mutatur, Veritas Extinguit."
- [보쉬의 비밀], 페터 뎀프, 1999.


"<쾌락의 정원>은 가톨릭교회의 종말을, 남성지배의 종말을 선포하는 그림이라는 사실이오."
- [보쉬의 비밀], <세번째 책>, 페터 뎀프, 1999.


여기 그림 '세폭'이 있다. 
한폭한폭, 또 한폭이 모여 성스런 제단에 바쳐진 그림, '세폭 제단화(triptych)'다.
17세기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이나 <십자가에서 내려짐>, 그 이전 세기의 <메로드 제단화> 등은 교회의 의뢰를 받아 그려져 미사의 배경화면이 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대형교회는 이 세폭 제단화의 주요 화면인 중앙 패널을 중심으로 신자들에게 성스러움 또는 공포와 회개를 유발했을 것이다. 기본이념은 기독교였으되 세부내용은 의뢰자인 해당 교회나 종파의 사상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15~16세기 북유럽 네덜란드 화가 히로니뮈스 보쉬(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1450~1516)가 그린 세폭 제단화가 있다. 제목도 없이 미술사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20세기 초 살바도르 달리 등의 초현실주의 화풍에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로 <쾌락의 정원>이라 불리게 된 그림이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은 이른바 '아담파'로 불렸던 '자유정신형제회'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작품으로 그들의 비밀예배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성화 같지 않고 매우 난잡해 보이는 이 그림은 전혀 가톨릭교회의 미사에 사용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20세기 중반 독일 미술사학자 빌헬름 프룅거가 제기한 위와 같은 가설에 의하면 남녀 교인들이 태초의 낙원과 같이 나체로 혼교를 하며 미사를 드리는 '아담파'라는 이단교의 수장인 야코프 반 알마엔힌의 의뢰를 받아서 그린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보쉬는 '아담파'였고 '이단'이었다.
'성당기사단'이나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이나 '시온수도회' 등 정통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받기 시작하면 온갖 음모와 미스터리가 가득해진다. 한편으로 이러한 '이단'적 환상과 상상의 결과는 '정통'의 교리에 가하는 균열이다.
기존 체제를 뒤집어 엎는 '혁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독일의 작가 페터 뎀프(Peter Dempf)는 미술사학자 빌헬름 프룅거의 이 가설을 중심으로 보쉬의 작품 <쾌락의 정원>을 해석한다. 20세기 말인 1999년에 발표된 [보쉬의 비밀]은 21세기 초에 발표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매튜 펄의 [단테 클럽]과 같은 영화적 활극이나 자극적 살인 등은 나오지 않는다. 1998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보쉬의 <쾌락의 정원>에 염산을 뿌린 '정통파' 신부 바에를러를 조사하면서 그가 들려주는 16세기 보쉬와 '아담파'(자유정신형제회) 이야기가 액자형식으로 병행하여 전개되지만 중세의 활극은 그저 옛날 이야기만 같고 사실 바에를러 신부의 최면과 같은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저 15~16세기 북유럽 네덜란드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종교재판관이었던 동명의 바에를러 신부의 현신 시늉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중세말의 '정통파' 종교재판관 바에를러 신부와 현재의 '정통' 수호자 바에를러 신부(사실 가명이다)의 변하지 않는 사명은 '이단'을 처단하는 것 뿐이다. 중세에는 마녀사냥과 고문과 화형의 방식이었고 현대는 '이단'의 아이콘인 미술작품의 파괴의 방식이라는 차이는 있다.

어릴적 우연히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본 후 18년 간 연구를 거쳐 관련 소설을 쓴 페터 뎀프는 바에를러 신부 못지 않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사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생애 자체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어 그저 추측과 상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소설 속 액자형 이야기의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 오리스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추천을 받아 보쉬의 직인까지 되었고 '아담파' 수장인 알마엔힌의 초상화까지 그릴 수 있었던 화가로 등장하나 미술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고향이 아우크스부르크란 점에서 같은 지역 출신인 저자 페터 뎀프의 상상속 현신일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 속 현재의 주인공인 미하엘 카이에 박사의 전생일 수도 있겠다. 훼손된 <쾌락의 정원>을 복원하는 미술사 전문가인 카이에와 '아담파'의 후예로 의심받는 여주인공 그리트 반데르베르프는 중세의 페트로니우스와 그의 여인 지타의 현신과도 같이 겹친다.


"16세기는 종교에서 새로운 경향들이 생겨나던 시대였소. 루터는 그 중 목소리가 가장 컸던 사람일 뿐이지. 교회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적으로 울려퍼지고 있었어요... 완전과 명상과 자유라는 세 원칙... 자유정신형제회는 완전의 원칙에서 정신적인 인간의 불과오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고, 명상에서는 신과의 유사성을, 자유에서는 자유로운 사랑의 개념을 만들어냈소. 천상적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낙원을 넓히겠다는 의미에서 말이오. 그것은 혁명적인 생각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극악무도한 것이었지요."
- [보쉬의 비밀], <첫번째 책>, 페터 뎀프, 1999.


'혁명'은 '이단'이고, '이단'은 '혁명'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미하엘 카이에와 함께 보쉬의 <쾌락의 정원>이 숨기고 있을 비밀을 파헤치려는 미술사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염산에 녹은 부분에서 발견된 비너스 상징기호나 불멸성(Posse non mori : 사람은 죽을 수 없다) 등을 표현한 이니셜(PSSNNMR) 등을 기초로 '정통' 가톨릭 교리에 균열을 내고 도전하던 '이단'의 '혁명성'을 읽어내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해석이 근거가 박약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암시와 함께 모조리 의문에 다시금 휩싸이며 소설은 끝나고 만다. 중세 유대교의 신비술인 카발라의 수비술과 수리 해석 등의 중세시대 당시의 '과학'이 동원되고 별자리 시대구분까지 갖다붙이고 있지만 결국 지적유희 또는 말장난과도 같다. 
<쾌락의 정원> 속에 숨겨진 '보쉬의 비밀(신비 : Das Geheimnis)'을 캐기 위해 에둘러 돌고 돌았던 지적유희의 결과는 허망하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단'의 환상 속에서 진리의 라틴어 명제 하나가 또렷이 남는다.


"Natura Mutatur(나투라 무타투르),
Veritas Extinguit(베리타스 엑스팅구이트)"


즉, "자연은 변화하고, 진실(진리)은 소멸한다"는 명제다. 미술사가 네브리하가 발견한 이 테제 속에 <쾌락의 정원>이 숨긴 메시지 일반이 담겨있다. 세계의 만물은 변화하고 '진리'였던 것은 소멸하며 새로운 '진리(진실)'가 나타난다. 가부장제로 버텨온 예수 이래 가톨릭 세계는 2천년 이상 '사자자리'의 시대였으나 예수를 상징하는 '물고기자리'를 거쳐 여성이 다시금 주체성을 회복하는 '물병자리'의 앞으로 2천년을 예고한다. <쾌락의 정원> 중앙 패널 상단에서 100명의 나체 남성들이 원무를 추는 장면과 그 가운데 연못에서 33명의 나체 여성들이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그 은유다. 카발라의 수비술에 의하면 '100'은 무수히 많은 수를 의미하며 직선적 진보의 사고를 대표하던 가부장적 남성들이 순환을 의미하는 여성적 원무를 추면서 다음 시대를 예고한다. 역시 '3'은 동양과 같이 '완전한 순환'을 의미하는 기초단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33년을 살았던 것처럼 완전한 숫자인 33인의 여성이 다음 세대로서 태어나는 중이다. 중앙 패널 하단을 채운 나체의 남녀 군상들은 딸기와 자두 등 성욕을 상징하는 열매를 따먹고는 있지만 직접적 성행위는 하지 않는다. 소설 속 '아담파'는 그 '이단'의 혐의에도 불구하고 비밀예배에서 혼교나 난교 등 집단성행위를 하지 않을 뿐더러 그 우두머리인 학자 야코프 반 알마엔힌은 아주 결정적 '비밀'을 숨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고로 '이단'적이었던 비밀이다. 의문의 화가 히로니뮈스 보쉬는 이 모든 '이단'적 '비밀'을 안고 1516년경 화형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미처 밝히지 못한 '비밀'들은 <쾌락의 정원>이라는 '아담파'의 세폭 제단화에 아직까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앞으로 영영 그 '비밀'들은 미궁 속에 있겠지만, 그림을 둘러싼 '이단'적 상상은 이미 "모든 것은 변하며 진리는 영원할 수 없다(Natura Mutatur, Veritas Extinguit)"는 비밀 아닌 '비밀'을 나체와도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측 패널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첫 만남을 갖는 '낙원'의 첫번째 에피소드인데,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이브의 태도가 엿보인다. 이 모든 것은 가운데 분홍색 구조물 속 올빼미가 지켜보고 있다. 올빼미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에서는 지혜의 상징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악마의 새로도 알려져 있다. 이미 '낙원'에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선과 악이 공존했다는 암시다.

우측 패널은 결국 모두가 불타는 지옥에서 <쾌락의 정원>을 뛰놀던 나체의 남녀 군상들이 향락의 상징인 악기에 묶이거나 얼음물에 잠기거나 새부리 괴물여인에게 잡아먹히는 등 암울한 결말의 세번째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 '지옥도'의 가운데 중심에서 섬찟한 표정의 인물이 몸통이 잘려 빈 속을 보이는 나무거인의 뒤에서 우리를 쳐다보는데, 보쉬 자신의 자회상이라는 설도 있고 또는 의뢰인인 알마엔힌의 초상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히 보면, 여성의 얼굴 같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에서 '아담파'의 수장 야코프 반 알마엔힌의 위험한 '비밀'이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마엔힌 또한 1547년 즈음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히로니뮈스 보쉬의 '세폭 제단화' <쾌락의 정원>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 채 덮으면 세계 창조의 첫 장면이 나타나는데, 창조주인 신이 가운데가 아닌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신'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이단'적 '혁명'이 이미 <쾌락의 정원> 곳곳에서 암시된다.

***

1. [보쉬의 비밀(Das Geheimnis des Hieronymus Bosch)](1999), Peter Dempf, 정지인 옮김, <생각의 나무>, 2006.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3. [연표로 보는 서양미술사], 김영숙, <현암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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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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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 Ludo(세리아 루도)!"
- [벌거벗은 미술관], 양정무, <창비>, 2021.


"고전(古典)은 영어 classic의 번역어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Classicus로 '최상의 클래스', 즉 최상의 계급에 속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중세... 이 시기 '클래식'이라는 용어는 주로 라틴어로 쓰인 중요한 문헌을 의미했습니다. '클래식'을 한자로 옮기면서 '고전(古典)', 즉 '옛날책'이라고 풀이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전미술'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 즉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에서 서기 5세기(서로마 멸망)까지의 서양미술을 가리킵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1장. 고전은 없다>, 양정무, 2021.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실패한 '혁명 정신'을 팔며 전 유럽을 침략한 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같은 고대 로마의 고전미술들은 이 절대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모인 고전미술 작품들은 제국주의 팽창의 필수품이었는데 한 세기 이상 지난 20세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던 미술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수십만 점의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집착한 이유 또한 나폴레옹이나 영국여왕과 다르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독재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본인들이 유럽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한 '정통성'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벌거벗은 미술사], <3장. 반전의 박물관>).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를 최대한 이상화시켜서 표현했다. 인체의 비례에 집착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을 그린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 다른 점이었다. 이는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양이 교류되는 헬레니즘 미술로 발전했고 이후 로마 시대에는 더욱 이상화된 그리스 미술은 수없이 모방되고 양식화되었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유럽인들의 문화적 근원이라 칭해지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미술'의 탄생이다. 이후 유럽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이 찾는 유럽의 '정통성'의 상징은 바로 이 '고전미술'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후 파리의 루브르 궁은 '공공 미술관'이 된다. 12세기 바이킹을 방어하는 요새로 지어졌던 루브르는 16세기부터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궁전을 옮기면서 왕가의 미술품 수장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혁명 후 혁명의회는 이 미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최초의 '공공 미술관'을 열었다. 혁명 공화국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을 복고시킨 나폴레옹이 이 '공공 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을 약탈한 고전미술품들로 채운 것은 또 하나의 혁명의 '반전'이었다. 혁명적 공화국이 내세웠던 '자유'의 기치는 반동적 제국의 약탈로 '반전'되었고, 그에 따라 인류의 자유의지를 표현했던 '고전미술'은 제국주의 전리품이 되었다. 소수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확대된 '공공 미술관'의 역사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라는 '반전'을 담고 있다.


미술이론가 양정무 교수의 [벌거벗은 미술관](2021)은 이른바 '고전미술'에 관한 에세이다. '인문성(humanity)'을 담아내고자 했던 '고전미술'을 주제로 그 뜻과 표정, 반전의 역사와 팬데믹 시대 속 의미 등을 여러 미술작품들을 함께 소개하면서 풀어낸다. 
'고전'이란 고대에는 '최상위 계급'(라틴어 Classicus)'의 전유물이었고 중세까지도 기독교 사제와 왕족이나 귀족 등이 배타적으로 소유하였으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대혁명 후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형태로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아온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고전미술은 대부분이 로마에서 모방한 대리석 작품들이었다. 20세기 들어 고도화된 미술사학의 발전으로 원래 고대 그리스 조각은 채색된 형태였는데 거의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나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군상' 등의 정교한 흰색 조각품들은 18세기 미술고고학의 시조인 신고전주의 미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각국의 요구로 미술품들을 다시 반환해야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해당 미술품들을 다시 똑같이 복제하는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이런 석고 조각들에 대한 '소묘', '드로잉(drawing)', '데생(dessin)'이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근대 미술교육의 핵심이 되었고 이러한 방식이 일본을 통해 아시아까지 들어온 결과 '미대입시'의 기본실기가 '석고 데생'이 된 것이라고 한다.

'미술', 더 나아가 '고전미술'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는 "고전미술로 집약되는 절대적인 '미'의 세계가 있다는 신념 하에 그 세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미술의 전통"(같은책, <1장>)이라면서 '인문성(humanity)'을 담고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전은 없다'. 다만,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고난과 어려움을 딛고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는 '완벽한 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인문성'이 남는다. '고전'의 '신비성'과 허상을 벗어냄으로 인해 결국 '고전미술이란 없다'.


"서양 근대문화의 시작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은 '휴머니즘'... '미술'은 '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어로, 그 어원을 따지자면 라틴어 'Ars'로 거슬러 갑니다. 여기서 라틴어 'Ars'는 그리스어로는 'Techne'로 즉, '기술' 또는 '좋은 기술'이 '미술'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술'의 의미는 '미' 보다는 '좋은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에필로그>, 양정무, 2021,


'고전미술'의 '신비성'을 벗기고, 미술사의 '반전'을 돌아보며 중세 흑사병과 현대 스페인독감의 팬데믹을 그린 미술의 역사를 통해 미술 자체의 옷을 벗긴 저자는 그 속에서 '인문성(humanity)'을 찾아낸다. 19~20세기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말한 '3F', 즉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은 저자에 의하면 "Form Follows Humanity(형태는 인문성을 따른다)"로 정정된다. 팬데믹을 이겨내고자 했던 인류는 그 의지를 미술로 표현했고 이 미술 작품들은 더 많은 다수의 호응과 지지를 기반으로 인간의 실패도 표현했지만 희망 또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지금의 인류 역사로까지 진화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기제였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0일야화)'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보다 더 효과적인 미술은 '인문성'을 담아내는 주요한 형식이다.


문화콘텐츠 기획자였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진병관은 [기묘한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미술작품들의 여러 뒷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속 디드로 백과사전을 통해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을 받은 '백과전서파'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 결국 왕정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은 그 파격성으로 인해 결국 제단화로서의 본래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사의 혼돈을 품고는 후세로 하여금 현재까지 미스터리의 반복적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미술관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중화된 '공공 미술관'의 미술사 이야기는 더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다. 18세기 영국의 '여흥클럽'인 'Society of Dilettanti(소사이어트 오브 딜레탕티)'는 이탈리아 문예여행자들의 '금수저 클럽'이었는데,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며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돌려보는 한량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수집품들이 오늘날의 고전미술 컬렉션에 기여하기도 했단다. 이들의 젠 체하는 건배사 중 "Seria Ludo(세리아 루도)!"는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였다. 심각한 인간사를 진지하지 않게 놀면서 풀기에 '미술' 만한 좋은 '기술(Art / Ars / Techne)'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다수 대중이 공유하고 통제하는 진정한 '공공 미술관'에서는 더욱 더 "Seria Ludo"가 현실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 또한 현대의 '공유재'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고전미술'이나 '명작'들이 모여 만든 역사가 아니다. 미술사는 인류의 실패와 미완성으로 점철된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며, 그럼에도 이겨내고 버텨내게 되는, 끝도 없고, 완벽한 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진지한 문제도 놀면서 풀 수 있는(Seria Ludo)' 인류의 생생한 이야기다.

***

1.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에세이], 양정무, <창비>, 2021.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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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미술관 - 아름답고 서늘한 명화 속 미스터리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지음 / 빅피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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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 Ludo(세리아 루도)!"
- [벌거벗은 미술관], 양정무, <창비>, 2021.
-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고전(古典)은 영어 classic의 번역어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Classicus로 '최상의 클래스', 즉 최상의 계급에 속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중세... 이 시기 '클래식'이라는 용어는 주로 라틴어로 쓰인 중요한 문헌을 의미했습니다. '클래식'을 한자로 옮기면서 '고전(古典)', 즉 '옛날책'이라고 풀이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전미술'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 즉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에서 서기 5세기(서로마 멸망)까지의 서양미술을 가리킵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1장. 고전은 없다>, 양정무, 2021.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실패한 '혁명 정신'을 팔며 전 유럽을 침략한 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같은 고대 로마의 고전미술들은 이 절대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모인 고전미술 작품들은 제국주의 팽창의 필수품이었는데 한 세기 이상 지난 20세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던 미술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수십만 점의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집착한 이유 또한 나폴레옹이나 영국여왕과 다르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독재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본인들이 유럽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한 '정통성'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벌거벗은 미술사], <3장. 반전의 박물관>).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를 최대한 이상화시켜서 표현했다. 인체의 비례에 집착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을 그린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 다른 점이었다. 이는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양이 교류되는 헬레니즘 미술로 발전했고 이후 로마 시대에는 더욱 이상화된 그리스 미술은 수없이 모방되고 양식화되었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유럽인들의 문화적 근원이라 칭해지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미술'의 탄생이다. 이후 유럽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이 찾는 유럽의 '정통성'의 상징은 바로 이 '고전미술'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후 파리의 루브르 궁은 '공공 미술관'이 된다. 12세기 바이킹을 방어하는 요새로 지어졌던 루브르는 16세기부터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궁전을 옮기면서 왕가의 미술품 수장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혁명 후 혁명의회는 이 미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최초의 '공공 미술관'을 열었다. 혁명 공화국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을 복고시킨 나폴레옹이 이 '공공 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을 약탈한 고전미술품들로 채운 것은 또 하나의 혁명의 '반전'이었다. 혁명적 공화국이 내세웠던 '자유'의 기치는 반동적 제국의 약탈로 '반전'되었고, 그에 따라 인류의 자유의지를 표현했던 '고전미술'은 제국주의 전리품이 되었다. 소수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확대된 '공공 미술관'의 역사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라는 '반전'을 담고 있다.


미술이론가 양정무 교수의 [벌거벗은 미술관](2021)은 이른바 '고전미술'에 관한 에세이다. '인문성(humanity)'을 담아내고자 했던 '고전미술'을 주제로 그 뜻과 표정, 반전의 역사와 팬데믹 시대 속 의미 등을 여러 미술작품들을 함께 소개하면서 풀어낸다. 
'고전'이란 고대에는 '최상위 계급'(라틴어 Classicus)'의 전유물이었고 중세까지도 기독교 사제와 왕족이나 귀족 등이 배타적으로 소유하였으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대혁명 후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형태로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아온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고전미술은 대부분이 로마에서 모방한 대리석 작품들이었다. 20세기 들어 고도화된 미술사학의 발전으로 원래 고대 그리스 조각은 채색된 형태였는데 거의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나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군상' 등의 정교한 흰색 조각품들은 18세기 미술고고학의 시조인 신고전주의 미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각국의 요구로 미술품들을 다시 반환해야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해당 미술품들을 다시 똑같이 복제하는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이런 석고 조각들에 대한 '소묘', '드로잉(drawing)', '데생(dessin)'이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근대 미술교육의 핵심이 되었고 이러한 방식이 일본을 통해 아시아까지 들어온 결과 '미대입시'의 기본실기가 '석고 데생'이 된 것이라고 한다.

'미술', 더 나아가 '고전미술'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는 "고전미술로 집약되는 절대적인 '미'의 세계가 있다는 신념 하에 그 세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미술의 전통"(같은책, <1장>)이라면서 '인문성(humanity)'을 담고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전은 없다'. 다만,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고난과 어려움을 딛고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는 '완벽한 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인문성'이 남는다. '고전'의 '신비성'과 허상을 벗어냄으로 인해 결국 '고전미술이란 없다'.


"서양 근대문화의 시작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은 '휴머니즘'... '미술'은 '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어로, 그 어원을 따지자면 라틴어 'Ars'로 거슬러 갑니다. 여기서 라틴어 'Ars'는 그리스어로는 'Techne'로 즉, '기술' 또는 '좋은 기술'이 '미술'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술'의 의미는 '미' 보다는 '좋은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에필로그>, 양정무, 2021,


'고전미술'의 '신비성'을 벗기고, 미술사의 '반전'을 돌아보며 중세 흑사병과 현대 스페인독감의 팬데믹을 그린 미술의 역사를 통해 미술 자체의 옷을 벗긴 저자는 그 속에서 '인문성(humanity)'을 찾아낸다. 19~20세기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말한 '3F', 즉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은 저자에 의하면 "Form Follows Humanity(형태는 인문성을 따른다)"로 정정된다. 팬데믹을 이겨내고자 했던 인류는 그 의지를 미술로 표현했고 이 미술 작품들은 더 많은 다수의 호응과 지지를 기반으로 인간의 실패도 표현했지만 희망 또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지금의 인류 역사로까지 진화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기제였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0일야화)'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보다 더 효과적인 미술은 '인문성'을 담아내는 주요한 형식이다.


문화콘텐츠 기획자였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진병관은 [기묘한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미술작품들의 여러 뒷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속 디드로 백과사전을 통해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을 받은 '백과전서파'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 결국 왕정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은 그 파격성으로 인해 결국 제단화로서의 본래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사의 혼돈을 품고는 후세로 하여금 현재까지 미스터리의 반복적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미술관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중화된 '공공 미술관'의 미술사 이야기는 더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다. 18세기 영국의 '여흥클럽'인 'Society of Dilettanti(소사이어트 오브 딜레탕티)'는 이탈리아 문예여행자들의 '금수저 클럽'이었는데,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며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돌려보는 한량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수집품들이 오늘날의 고전미술 컬렉션에 기여하기도 했단다. 이들의 젠 체하는 건배사 중 "Seria Ludo(세리아 루도)!"는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였다. 심각한 인간사를 진지하지 않게 놀면서 풀기에 '미술' 만한 좋은 '기술(Art / Ars / Techne)'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다수 대중이 공유하고 통제하는 진정한 '공공 미술관'에서는 더욱 더 "Seria Ludo"가 현실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 또한 현대의 '공유재'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고전미술'이나 '명작'들이 모여 만든 역사가 아니다. 미술사는 인류의 실패와 미완성으로 점철된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며, 그럼에도 이겨내고 버텨내게 되는, 끝도 없고, 완벽한 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진지한 문제도 놀면서 풀 수 있는(Seria Ludo)' 인류의 생생한 이야기다.

***

1.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에세이], 양정무, <창비>, 2021.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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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 극단적 불평등 시대에 급진적 정치를 위한 옹호론
바스카 선카라 지음, 미래를소유한사람들 편집부 옮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새로울 것 없는 '사회주의 선언'의 새로움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2019), 바스카 선카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미래에만 눈을 두는 이상주의자들로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사회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역사학의 학도들이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이 전통을 따라야 한다.
...
우리의 긴급한 사명은 분명하다. 우리는 착취, 기후적인 대재앙, 악선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류를 위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1장. 사회주의 시민의 어떤 하루>, 바스카 선카라, 2019.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유럽 혁명을 앞두고 '사회주의' 정치강령을 담은 팜플렛을 쓴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정에서 소외된 노동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구제를 앞세운 '공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계급으로 각성하여 주체적으로 해방을 쟁취한다는 '과학적 사회주의' 강령의 고전이 된 이 저작이 바로 [공산당 선언] 또는 [공산주의자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공산당 선언], <1장>)인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생산의 사회화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며,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이 최고조에 이르면 인류 역사에서 계급투쟁을 영원히 끝내는 역사적 사명을 절대다수 노동계급이 지게 된다는 이 혁명강령에서, 노동계급의 친구이며 동지인 '과학적 사회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어야"([공산당 선언], <4장>) 하는 임무를 맡는다.

'공산주의자' 또는 그보다 폭넓게 '사회주의자'는 그래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 이상적인 다음 체제를 꿈꾸는 자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의 급진주의 잡지 <자코뱅>의 창립자이자 편집자인 바스카 선카라(Bhaska Sunkara)에 의하면 이는 '오해'이며, 사회주의자는 원래부터 '역사학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평등'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교훈과 분석, 실천(행동)의 준거로 삼을 '전통'이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그 역사로부터 배워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바스카 선카라가 2019년에 지구상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사회주의 선언(The Socialist Manifesto)]이라는 책을 냈을 때, 그 부제는 <극단적 불평등 시대에 급진적 정치를 위한 옹호론(The Case for Radical Politics in an Era of Extreme Inequality)>으로 삼았다. 토마 피케티의 주제인 '불평등'이 역시 문제였고, 21세기 신자유주의적 세계 금융자본주의 체제는 극단적 '불평등'으로 무너지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1980년대말 자본주의 승리로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18년에 본인의 헛소리를 인정했다는데, '불평등'을 먹고자란 자본주의는 이미 예전처럼 고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30년대의 케인즈주의나 이후 1970년대까지의 사회민주주의를 다시 불러온들 회생불가의 체제가 되었다. 이대로 가면 1%와 99%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바스카 선카라는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전한 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분석한 마르크스주의 분석틀을 다시금 소환하며 2019년의 미국에서 [사회주의 선언]을 출간했는데, 2021년 우리 국역은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이 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정치강령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1848년) 세계혁명 직전에 쓰여진 짧은 문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발전시키고 노동계급을 '미래'의 전환을 가져올 핵심에 있는 행위자로 기술한 것이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노동조합주의'가 확산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이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보았다... 그에게 이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를 비극에서 구원할 수 있는 투쟁의 필요조건으로 보았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2장. 무덤을 파는 사람들>, 바스카 선카라, 2019.


'역사학도'인 사회주의자답게 바스카 선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시작하여 사회주의 역사를 <1부>에 싣고 있다. 역사의 필연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계급은 생산수단의 독점과 잉여가치 창출의 과정인 '착취'를 통해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양산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파고 명부의 문을 연다"([공산당 선언]). 선카라의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1부>의 <2장. 무덤을 파는 사람들>에서는 노동계급의 주체적 운동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를 다룬다. <3장. 우리가 상실한 미래>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기 혁명적 역사에서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정된 자본주의 체제 내 개량의 역사를, <4장. 소수의 승리>에서는 독일 사민당의 개량화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그 실패를 다룬다. <5장. 실패한 신>에서는 자본주의 체제 내 복지국가의 길을 갔으나 "원칙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주의적 지평을 공유"하며 "잠정적 유토피아"를 자처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를 돌아본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다룬 <6장. 제3세계 혁명>을 거쳐 <7장. 사회주의와 미국>에서는 저자 본인이 살고 있는 세계 최강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독일 사회주의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질문이었던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나?"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근대 노예노동을 해체하고 산업 노동력을 대거 확보한 북군의 임무는 급진적 사회주의 봉기를 막는 것이 되었고, 19세기말 미국 철도노동자 유진 뎁스로 대표되던 미국 사회주의당의 투쟁은 결국 공화-민주 양당 체제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는데, 선카라에 의하면 그 이유는 유럽이나 러시아 등과는 다르게 미국의 사회주의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성이 없이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느슨하게 연결된 일종의 "폭넓은 정치동맹"(같은책, <7장>)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듯 하다. 한편으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대중적 사회주의자의 대표였던 유진 뎁스의 '유연함'을 언급하고 미국에서 좌파가 주류가 되려면 "일상에 뿌리를 둔 우리 자신의 언어로 표현"(같은책, <7장>)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논지는 미국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어쩐지 일목요연하지 않다. 아마도 '양당주의' 정치체제가 굳어진 미국의 현실과 사회주의 이념 사이의 "외줄타기"의 모호함의 덫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1부>는 마르크스 이후 현대 미국까지의 사회주의 통사를 다루되 모든 것을 말하려 하지는 않고 짧게 흐름만 건드리고 있다. 마치 중국 역사가 이중텐의 [중국통사] 시리즈처럼 몇 가지 사안 중심으로 간략히 서술한다. '사회주의'에 대해 60% 가까이 호감을 표시한 21세기 미국의 신세대가 접근하기 쉽게 의도한 듯 한 서술이다.
사회주의와 진보정당 운동의 세부적인 역사를 읽어보려면 장석준의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2019)가 추천할 만 하다.


"사회주의적 전제는 명확하다. 그 핵심적인 것은 인민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품위와 존중, 공정한 대우를 바란다는 점이다. '민주적인 계급정치'는 공동의 반대자에 맞서서 인민을 단결시키고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최선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모두를 인종, 성, 편견에 뿌리를 둔 압제에 대항하는 긴 대열에 참여시킨다...
... 운동 내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있어야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고 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9장.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바스카 선카라, 2019.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피해갈 수 없다. 바스카 선카라가 이 책의 <2부>에서 평하는 버니 샌더스는 "근대적인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같은책, <8장. 맥의 귀환>). 즉, 체제 내 개량으로 선회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폐기한 '계급투쟁'을 샌더스는 미국 사회에서 다시 복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극단적 불평등에 분노한 다수 대중에게 엘리트들과 투쟁하여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오자고 주장한다. 모두 함께 미국을 위해 일하고 '국민통합'으로 국가를 살리자는 게 아니라 '계급투쟁'을 다시금 복원하여 절대 다수가 살만한 국가를 만들자고 외친다. 현대의 제대로 된 '계급정치'가 미국에 의외의 한방을 날리고 있다.

바스카 선카라는 한편으로 계급투쟁은 해본 역사가 없던 영국의 노동당에서 영국인 다수의 분노와 참여를 업은 제레미 코빈의 등극을 조명한다. 코빈은 미국의 샌더스처럼 평생 사회주의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노동계급과 함께한 인물로 '코비니즘'이 영국 노동당을 통해 제시한 경제강령은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비전을 되살렸다"(같은책, <8장>). 지배계급의 조롱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코비니즘은 체제 내 개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본의 소유권과 통제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같은책, <8장>). 비록 브렉시트 정국에서 실각하기는 했으나 다수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믿고 끊임없이 자본의 소유권에 도전하고 자본의 통제를 시도하는 코비니즘의 정치는 저자의 눈에 현대적 '사회주의 선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모든 사회주의적 전진은 세 가지 요소(대중정당, 사회운동적 기반, 노동계급의 참여)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분산된 산발적인 저항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통합하고 발전시키는 '노동계급 정당'과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9장.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바스카 선카라, 2019.


<1부>에서 사회주의 역사를 일별한 후, 신자유주의를 사기꾼 '맥(The Mack)'으로 은유한 이 책 <2부>의 <8장. 맥의 귀환>에서 19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 지배이념이 된 신자유주의에 도전하는 가장 왼쪽의 버니 샌더스의 '계급정치'와 제레미 코빈의 '대안정치'를 평가한 후 바스카 선카라는 다시 '사회주의 원칙'으로 돌아온다. 즉, 사회주의가 전면에 나서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력한 대중적 '노동자 정당', 둘째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사회운동적 기반(조직), 셋째는 마르크스로부터 강조된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이다. 의아스럽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주의 선언'의 요소가 왜 2백년 전 이야기와 같은가.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로 "느슨한 정치동맹체"를 지목한 저자는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 등의 좌파연합체보다는 확실히 강력한 노동자 중심의 대중정당에 방점을 찍고 있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노동조합의 '민주화'다. 이 전통적인 두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는 바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민주주의'다.

사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역사학도'라고 했다. 진정한 역사학은 해당 시기를 고정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원칙은 그대로라도 시대적 조건이 다르면 그 원칙이 실현되는 형태가 다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폭력혁명'을 주장했다면 그 배경은 평등한 보통선거로 정치참여가 불가능했던 19세기의 열악한 조건이 있었다. 독일 사민당 역사에서 칼 카우츠키가 19세기말 에르푸르트 강령을 통해 한층 더 낙관적인 계급투쟁과 생산수단 사회화를 주장했던 배경에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낙관적 발전과 의회의 다수점령을 통한 노동계급의 참정권 확대의 조건이 있었다. 20세기초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이 가능했다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에서 죽느냐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다가 죽느냐 둘 중 하나의 극단적 선택지를 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조건이 있었다. 스웨덴 사민당이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벗어나 자본의 이윤과 함께 동반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한 배경에는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덜 입었고 그로 인해 자본의 파괴가 덜했던 스웨덴의 조건이 한 몫 했다. '혁명'이란 대규모의 전면적 파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인데, 두 차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적 전쟁경제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이런 대규모 자본파괴를 동반했다.

지금 다시 19세기의 사회주의 원칙인 '강력한 산별노조'와 '강력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사회주의 선언'의 조건으로 내걸 수 있는 배경은, 우리 모두들 알고 있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불평등' 구조와 그럼에도 생산력 발전은 정체되며 기후위기로 인한 대재앙이 예고되는 세상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정보네트워크 등 사회기반시설이 '공유재'의 경향성을 가지면서 더 많은 다수가 연대하고 단결할 수 있는 '대중 민주주의'가 무한 확장된다는 점이다. 다수가 생산한 '공유재'를 다수가 전유함으로써 노동조합의 관료성이 허물어지고 진보정당도 민주화되는 조건이라면, 신세대 '사회주의 선언'의 조건이 다시금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민주주의'로 재소환되어도 우리 다수가 얻어올 세상은 이전 세기와 달라질 수 있다. 
역시 미국의 정치 평론가인 아론 바스타니(Aaron Bastani)가 2019년에 매우 낙관적으로 주장한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라는 놀라운 작명의 [21세기 공산주의 선언]의 시대적 배경도 동일하다. 동시대 사람인 바스카 선카라가 [사회주의 선언]의 결론(<9장>)으로 내건 '15개 테제들'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해도 변화된 현재의 시대적 배경에서 변치 않는 '사회주의 선언'의 원칙으로 돌아갈 필요는 있을지 모른다.
전혀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사회주의 선언'은 달라진 시대적 배경을 조건으로 할 때 다시금 새로워진다.

이제 비로소,
잃을 것은 낡은 체제요,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다.

***

1.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The Socialist Manifesto)](2019), Bhaska Sunkara,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2.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Aaron Bastani,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3.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1848.
4.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5.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 장석준, <서해문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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