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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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1963~1964.


1.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장. 판결, 항소, 처형>, 한나 아렌트, 1963.


그 속에 내가 없기를 바랬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있었다.

거대한 사회체제 속의 부품으로 살면서,
스스로의 입신양명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꿈꾸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해고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을 때려잡고,
농성텐트를 철거하는 자리에 화단을 만들겠다며 열심히 삽질해대던 '성실한' 공무원들을 떠올리면서,
수십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순리에 따라' 친일을 했던 자들과 독재정권에 본의 아니게 부역한 자들까지 상기하다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결국 펼쳤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로 유명한 그 책 속에 평범한 내가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

"피고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주장을 하게한 이유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피고측 변호인)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장. 피고인>, 한나 아렌트, 1963.


독일 출신으로 나치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을 도왔고 1941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1906~1975)는 유대인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된 독일 나치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 1906~1962)의 재판을 기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이주와 이송전문가'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전범재판이었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처벌할 정도의 나치정권 수괴는 아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던 중 이스라엘 정보국에 의해 1960년에 체포되고 예루살렘으로 납치되어 유대인의 신생국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유대인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되어 2년간 재판 끝에 처형당했다.

아렌트는 이 2년 간 재판의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의 재판정에 선 피고 아이히만의 '평범성'에 주목한다. 
이스라엘의 "심판대에 오른 것은 아이히만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장>). 
그는 결코 나치 수괴들처럼 '악마적'이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착실히 승진하고 출세하려는 '평범(banality)'한 독일의 '공무원'이자 '시민'이었다.

피고인 아이히만의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는 전쟁 개시 전후 독일 나치정권의 법률체계는 '합법'이었으므로 그 어느 국가도 그 법률에 따른 '국가적 공식행위'를 '범죄'로서 판단할 수 없다고 일관되게 항변했다고 한다. 따라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같은 국제재판소도 아닌 이스라엘 일국의 법정에서는 아이히만을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 행위의 불법성과 합법성을 두고 우리와 일본이 끊임없이 다투는 논리와 같다.


"요약하면, 예루살렘 재판의 실패는 뉘른베르크 재판소 설립 이래로 폭넓게 논의되고 또 충분히 인식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 모두를 파악하지 못한데 놓여있다. 그것은, 1) '승자의 법정'의 훼손된 '정의'의 문제, 2) '인류에 대한 범죄'의 타당한 정의, 그리고 3)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새로운 범죄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필로그>, 한나 아렌트, 1963.


한나 아렌트는 결론부를 이루는 <에필로그>에서 이 기록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이 기록은 '악의 평범성'의 한 전형으로서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피고인에 관한 실제적 묘사라는 것이다. 

악마와도 같은 수천만 유대인 대량학살의 부역자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단지 그가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 시민의 면모와 품성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은 '하사관에서 8천만 독일인들의 총통이 된' 히틀러를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던 출세지향적 인물로서 어떤 점에서는 '평범'하지만은 않았고, 히틀러의 나팔수였던 괴벨스가 말한대로 '위대한 인물'이 될지 '흉악한 범죄자'가 될지 양자간 하나라는 생각으로 앞만보고 달린 '유대인 이송전문가'였다. 스스로를 히틀러처럼 순수한 '이상주의자'로 규정했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임무에 있어서는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았단다. 패전의 분위기가 감돌자 하인리히 힘러 같은 나치 친위대 직속상관이 히틀러의 '최종적 해결책'(유대인 대량학살)을 지연시키고 회피하려 할 때에도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정도로, 책임질 때가 되면 '웃으며 무덤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장담하는 자부심과 책임감까지 겸비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평범한' 독일시민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유럽정복전쟁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같은책, <에필로그>)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편,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 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가 전후 유대인의 신생국 이스라엘 법정의 '정당성' 논란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국제재판소도 아닌 피해민족으로서 유대인의 국가법률로 패전국인 가해국 독일인을 단죄할 수 있는가, 유대인의 민족적 보복이 아닌 보편적 '정의'를 담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첫번째 문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법정은 '정의의 집'이 되는데 실패했다고 본다. 결코 아이히만이 무죄라고 옹호할 수는 없지만, 국제재판소가 아닌 이스라엘 단독의 아이히만 체포와 납치는 '불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번째로 민족적 복수에 불과한 예루살렘의 법정은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을 '보편적'인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데 또한 실패했다는 결론이 따른다. 유대인을 넘어 폴란드인과 집시들 같은 소수자는 물론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같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전반에 대한 단죄가 아닌 유대인 문제에만 국한된 민족적 보복행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번째 요소로서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의 특별한 '악마성'을 구축하지 못했다. 수백수천만 유대인이 학살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자 집행자임에도 아이히만은 히틀러나 괴벨스 같은 '악마'적 이미지나 '악의 화신'이 아니라 출세지향적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남고 말았다.


"이 회담(1942년 1월 '반제회의') 날이 아이히만에게 잊혀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가 '최종 해결책(유대인 대량학살)'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여전히 '폭력을 통한 그러한 피투성이의 해결책'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의구심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이 곳에서, 이 회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제3제국의 교황들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히틀러 뿐만아니라,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뿐만 아니라, 친위대나 당 뿐만 아니라, 착하고 연륜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장. 반제회의, 혹은 본디오 빌라도>, 한나 아렌트, 1963.


여기에 아이히만을 그답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있다. 바로 1942년 1월 독일 반제에서 열린 회담, 이른바 '반제회의'였다.

원래 특출나지 못했던 아이히만이 그나마 독일 군부에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게, 그가 '유대인 전문가'였다는 사실 그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많은 유대인 지도자 집단과 연결이 되었고 그들을 통해 다수 유대인들을 각국으로 이송시키는 전문가였다. 다수 유대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무국적자로 만들고 대량이주시키는 대신 소수 유대인 지도집단의 특권과 기득권은 보장하는 식이다. 식민지배에서 피식민 민중들을 분리통치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그러던 그가 나치정권의 고위층들이 모여 유대인 대량학살 집행을 결정하는 반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나치당 제3제국의 '교황'들이 모여 거리낌없이, 나아가 경쟁적으로 '최종적 해결책'의 주도적 집행자가 되려는 모습을 보며 죄의식 자체를 씻어버렸다고 한다. 마치, 유대인 랍비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죽게 만든 과정에서의 예루살렘 로마인 총독 본디오 빌라도처럼.

예수를 죽게 만든 건 빌라도 본인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유대인 랍비들이라고 말하며 손을 씻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유대인을 이송만 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총통 히틀러의 '최종적 해결책'인 대량학살을 집행할 수 있게 한 건 결정권한이 없는 아이히만 본인이 아니라 독일 나치정권의 성실하고 지적이며 선량하고 연륜있는 고위공무원 전부와 그들에 협조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소수 유대인 지도자들이라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유대인 이송전문가는 성실하고 착실하게 출세를 꿈꾸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이 되었고, 비록 직무상 한계로 인해 독일 나치정권의 고위공무원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자부심은 패전 15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국원에게 체포될 때 "내가 아이히만이다(Ich bin Eichmann)!"라고 바로 신분을 까는 당당함의 근원이 되었다.

정신이상도, 사이코패스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법정의 의도와 달리 괴물이나 악마도 아닌, '악의 평범성'의 한 전형으로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항소심 판결 후 3일만에 집행된 사형대에서 본인의 죽음을 주재하는 식의 진부(banality)한 장례연설을 유언으로 남기는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며 생을 마감했다. 

아렌트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세뇌하고 속인 아이히만 자신의 기억이 바로, '말과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같은책, <15장>), 철학없는 사고, 반성하지 않는 사유,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같은책, <후기>)로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두려운 교훈'(같은책, <15장>)을 남긴다고 말한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후기>, 한나 아렌트, 1963~1964.


거대한 체제에서 톱니바퀴와 나사와 같은 부품으로서 철학없는 '무지'와 반성없는 '무사유'는 '악의 평범성'의 기본조건이다.


3.

악(惡)에 대한 심판 과정을 통해 현실적으로 드러난 '악의 평범성' 속에서 '평범'한 내 모습을 얼핏 보았을 때, 사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전에도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입신과 출세를 위해, 가정의 안녕과 부를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시대에 따라 친일도 되었고 독재정권의 지지기반이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역시 모두가 무죄라는 생각으로 성실하게 살았던 독일 시민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국 유대인의 법정에서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 되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성실함이 '악(惡)'이 된 건 성실함 자체가 아니라 식민시대 또는 반민주 독재정권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상대성이 있다.
아이히만의 성실함이 평범한 악(惡)이 된 것 또한 예루살렘 법정의 '정의의 집'(같은책, <1장>) 여부에 대한 논란의 상대성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또 묻는다.
평범한 내가 사는 이 체제는 '정의'로운가.
과연 시대의 '악(惡)'은 무엇인가.

지금, 평범한 나의 성실함 속에 '악(惡)'은 얼만큼이나 있는가.

***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1964), Hannah Arendt, 김선욱 옮김, 정화열 해제,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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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신과 설문해자 한국한자연구소 번역총서 1
요효수 지음, 하영삼 옮김 / 도서출판3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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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
- [허신과 설문해자], 요효수, 1980년대.


"중국문자는 몇몇 기본형체가 조합되어 만들어진다. 상대적으로 말해, "'독체(獨體)'를 '문(文)'이라 하고, '합체(合體)'를 '자(字)'라 한다(獨體爲文, 合體爲字)"라는 말이 있지만,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자(文字)'라는 말이 전체적인 개념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8장. [설문해자]의 부수>, 요효수.


1.

내가 다닌 남자고등학교에는 여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녀는 전혀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이과 3반과 문과 4반의 총 일곱반이었던 우리 남학생 약 5백명은 그 홍일점 여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대단하게도 뻗쳤다.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오면 수업시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고, 신혼여행 다녀온 그녀에게 첫날밤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겠다며 야유를 보내고 버티다가 선생님이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탁자에 회초리질을 수차례 해댄 후에야 수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한자(漢字)를 좋아했던 거였지,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의 과목이 한문 시간이어서가 아니었다. 혈기왕성 사춘기였던 나 또한 혼자 몰래 그녀의 성숙하고 탱탱한 육체를 흘끔거리고 온갖 상상을 하며 수업시간에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한문 시간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었다고 '청렴결백한 모범생'을 감히 자칭하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지금 쯤은 어느덧 환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경희남고의 홍일점 김금희 선생님은 다시 말하지만 전혀 예쁘지 않았음에도 1990~91년 당시에는 이십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을 테고,
나는, 재차 강조하지만, 그녀의 한때 싱싱했고 탱글탱글했던 육체와는 상관없이, 본래부터 그림 그리듯 한자를 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마지막 한문 선생님으로 남았고, 나는 연습장에다가 열심히 한자들을 그려대면서 가끔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고 기대했으며, 학력고사를 포함하여 모든 한문 시험문제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2.

"'육서(六書)'에 대한 허신의 명칭과 순서는,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문자학의 기본이론-六書>, 요효수.


한자를 좋아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축의금이나 조의금 봉투에다가 쓸데없이 이름까지 한문으로 써대던 나였지만 오래전 배운 한자의 이론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몇해 전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쳤다가 진짜 아쉬운 점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한자의 문자이론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몇주 전 우연히 [갑골문자]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을 읽던 중,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을 알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잠재되어 있었을 한자 이론에 관한 흥미가 다시 생겼다.

서기 100년 동한(東漢/後漢) 시대의 학자 허신(許愼)은 현존하는 최초이자 최고(古)의 한자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었고, 그의 아들 허충이 아버지 허신이 이미 늙어 병상에 있었을 서기 121년에 후한 조정에 이 책을 바쳤을 때, [설문해자]가 담은 총 한자의 수는 허신이 지었을 당시의 9,353자에 1,163자가 추가된 1만자가 이미 넘었다고 전한다. 이후 5대10국 말 남당과 송나라 초의 서현과 서개 형제가 허신의 [설문해자]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대서본]과 [소서본]도 약 1만자 이상, 진(晉)나라 학자 여침이 역시 [설문해자]를 기초로 지었다는 [자림(字林)]은 12,825자에다가, 이후 양(梁)나라 고야왕의 [옥편(玉篇)]은 16,917자의 한자를 담고 있단다.
아마도 한자에 관한 이 고전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의 유래일 것이며, 그 기원은 바로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일 것이다.

[설문해자]는 그 제목의 뜻 그대로 '문을 설명(說文)'하고 '자를 분해(解字)'하여 한자라는 '문자(文字)'를 해설(解說)하는 책이 되겠다. 

한자에 대해 새삼스레 흥미가 재발된 내가 차마 허신의 고전 [설문해자]를 읽을 엄두는 못내고 그 책에 관한 해설서를 찾던 중 발견한 중국학자 요효수의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는 1980년대의 [설문해자] 연구서다. 이 책은 [설문해자]의 구조와 분석 및 한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 요효수에 의하면 허신은 후한의 광무제의 후대 명제 때인 서기 58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허신과 설문해자], <1장. 저자 허신>). [설문해자]가 완성된 해가 서기 100년이면 허신은 42세 즈음 한자에 관한 이론을 총망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기 100년 경에는 아직 한자의 원시 형태인 '갑골문'이나 청동기 '금문' 등의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라 허신은 전국시대의 '대전(大篆)'체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 시기 전국통일체인 '소전(小篆)'체에 주로 근거했다. 서기전 14세기경 은나라에서 거북의 배딱지와 짐승 어깨뼈 등을 태워 점을 치고 결과를 기록하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처음 발굴된 것이 19세기 말이라서 그렇다고는 하나 서기 1~2세기 허신의 시대에 상형문자의 원조 갑골문과 금문이 과연 전해지지 않았을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다만, 갑골문에 관한 '문자학'은 분명 없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허신은 갑골문보다는 아직 상형문자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던 춘추전국시대와 진한(秦漢) 시대의 '전서(篆書)'체에 주로 근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문자학의 기본이론'으로서 '육서(六書)'를 정리한다.

이 '육서'가 바로, 내가 고등학교 때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그 이론으로,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를 이른다([허신과 설문해자], <7장> 참고 및 재인용).

1) 지사(指事)

"'지사'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고 살피면 뜻이 드러나는 것으로 '상'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지사(指事)'는 사물의 형상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 의미를 뜻하며, '윗 상(上)'이나 '아래 하(下)'처럼 '땅(一)'의 '위(•)'나 '아래(•)'를 의미하는 한자들이 일례들이다.

2) 상형(象形)

"'상형'이라는 것은 해당 사물을 그림으로 그리고, 형체를 따라 그려낸 것으로, '일'과 '월'이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상형(象形)'은 말 그대로 사물의 형태 자체를 그림처럼 표현한 '표의문자'의 본질적 형태로, '일(日)'과 '월(月)' 또는 '용(龍)', '호(虎)', '마(馬)', '어(魚)' 등의 동물이나 '사람 인(人)' 등의 기본 형태가 그 예다.

3) 형성(形聲)

"'형성'이라는 것은 사물이 성질을 이름으로 삼고 비유되는 바를 취해 서로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강'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형성(形聲)'은 뜻과 소리가 합체한 문자로서 허신의 [설문해자]의 문자 분석의 대부분을 이룬다는 한자 발전의 주요 형태다. 즉, 기본부수와 다른 기본 형태의 결합으로서 하나 또는 여러 문자는 뜻을, 그 중 하나는 소리부를 형성한다. 기본 예는 '강(江)'이나 '하(河)'라고 [설문해자]는 말한다.

4) 회의(會意)

"'회의'라는 것은 부류를 나열하고 의미를 합쳐서,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와 '신'이 그 예에 해당한다."
- 허신, [설문해자].

'회의(會意)'는 여러 의미부가 결합하여 아예 새로운 의미의 한자로 파생된 사례로서 '형성'과 구분되며, '무기를 그치는 전쟁무기 무(武)'는 '창 과(戈)'와 ''그칠 지(止)'의 결합, '사람(人)의 말(言)을 믿는 신(信)' 등의 조합이 그 예가 아닐까 하는데, 허신의 후학들의 이에 관한 다른 이론도 있단다.

5) 전주(轉注)

"'전주'라는 것은 부류를 세우고 하나를 우두머리로 삼아, 같은 뜻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하며, '고(考)'와 '노(老)'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전주(轉注)'는 '마음 심(心)'이나 '말씀 언(言)'을 부수로 하는 수많은 한자들처럼, '서로서로 전환하며(轉) 비슷한 뜻으로 주석(注)을 다는' 한층 더 파생된 형태의 글자들이다.

6) 가차(假借)

"'가차'라는 것은 본래 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탁하여 개념을 빌린 것으로, '영(令)'과 '장(長)'이 그것이다."
- 허신, [설문해자].

'가차(假借)'는 갑골상형문자를 보지 못했던 한계로 일부 억지 조합으로 분류했던 허신의 해석과는 달리,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을 가리키는 문자와 '부정사'인 '아닐 부(不)', '하여금 령(令)' 같은 글자들이 그 일례들이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문자는 그 형체구조로 말하자면, '상형문자(象形文字)'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문자의 형체는 대단히 복잡하고, 게다가 부호의 수도 매우 많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자는 이미 부호화한 문자이며, 그 발전단계로 말하자면, 이미 어음(語音)과 매우 긴밀하게 결합한 일종의 '표음문자(表音文字)'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음의 기록을 통해 개념을 전달하지, 문자의 형상 그 자체로써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장기간의 발전과정 속에서 문자의 형체(形), 독음(音), 의미(義)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한자 자체의 특징과 그것의 형체, 독음, 의미 간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해를 위해서는 이해방법과 이론에 관한 체계가 필요한데, 이러한 이론과 방법의 하나가 바로 '육서(六書)'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요효수.


고대 은(상)나라 시기 동물뼈에 새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 새긴 금문 등의 원시 상형문자는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전서(篆書)와 대전(大篆)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의 전국통일 승상 이사의 소전(小篆)과 고문(古文)을 거쳐 진한의 전국통일 왕조의 표준문자로서 예서(隷書)체가 되면서 둥근 모양의 상형그림에서 정사각형의 추상문자가 된다. 아마도 후한 시대 서기 1~2세기의 허신은 갑골문자학은 몰랐겠지만 그 당시까지 아직 둥근 형태의 그림과 같은 '전서체'에서 각진 문자로서 '예서체'로 전환되던 국가문명의 시기에 한자라는 중국문자학을 총망라하고 체계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유일한 '표의문자'로서 한자는 우리 한글이나 서양 알파벳의 '표음문자'와는 구별되나, 그 한자의 파생과 확장 과정은 요효수에 의하면 '어음(語音)'과 긴밀히 결합되어 '표의문자'로서의 발전과정을 겪게 된다. '문자'는 글과 그림으로 쓰고 새기는 '문'과 여기에 말과 소리로 파생된 '자'로 구성된 것이라 허신이 [설문해자]를 통해 한자의 기본체계와 발전단계를 통해 규정한 것처럼, 모든 문자와 언어는 '표의'와 '표음'의 조화로써 발전한다.

아무튼, 이후 현대 한자의 본격적인 형태가 된 '해서(楷書)체'는 삼국시대 위나라 시기나 되어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니, 서기 100년 '갑골문자'를 몰랐을 허신의 [설문해자]는 '전서체'와 '예서체'를 기본으로 한다.


"창힐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대체로 부류에 근거해형체를 본떴는데, 이 때문에 '문(文)'이라 했다. 이후형체와 소리가 서로 더해졌는데, 이를 '자(字)'라 한다. '자(字)'라는 것은 파생하여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허신, [설문해자], <서(敍)>, 서기 100년.


3.

"허신은 자신이 처했던 시대적 한계 탓에, 그는 단지 주(周)나라 후기 이후부터 진한(秦漢) 때에 이르는 문자자료로만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문자는 원시 상태로부터 이미 상당히 떨어진 이후의 문자자료였다. 그래서 그가 지은 [설문해자]는 단지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문자의 본래 형체, 본래 독음, 본래 의미를 파헤쳐야 했는데,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 [허신과 설문해자], <10장. [설문해자]의 평가>, 요효수.


갑골문자학을 알 수 없었던 허신은 와변(訛變)'된 형체에 근거한 해석의 오류를 다수 범했다고 [설문해자] 연구자 요효수는 말한다. 그러나 이는 허신의 [설문해자]의 역사적 한계를 이해하면서 접근해야 할 문제로서, 후학인 청나라 고문학자들처럼 위대한 [설문해자]를 '경전화'시켜서는 안될 일이라고 [허신과 설문해자]의 저자 요효수는 여러 번 강조하면서 논문을 맺는다.

그래서 나는 한자학의 고전 [설문해자]는 존중하되,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한자학을 보기 위해 중국 한자학자 랴오원하오의 [한자나무(漢字樹)] 1~2권으로 한자공부를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2천년 전 허신의 [설문해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오래전 전혀 예쁘진 않았던 우리 경희남고의 유일했던 '여신'이자 '만인의 연인'이기도 했던 김금희 선생님을 추억하며,
다시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에 재도전해 보리라.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로서의 한자의 본질을 중심으로 삼아서 말이다.

***

1.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1980년대), 요효수, 하영삼 옮김, <도서출판3>, 2014.
2. [한자나무(漢字樹) 1~2](2012), 랴오원하오, 김락준 옮김, <교유서가>, 2021.
3. [갑골문자(甲骨文字)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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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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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
-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민음사>, 2013.


1.

'회사'라는 곳이 내 예상과 달리 '민주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종강한 1999년 12월 둘째주 목요일에 단편소설 한 편을 21세기 첫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교문을 나선 나는, 그 주 토요일에 대기업 손해보험회사의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갔다.

21세기 첫 1월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팀장인 과장급은 30대 후반이었고, 부서장은 40대 초반이었는데, 27세 신입사원이었던 내 눈에 비친 '회사'의 첫인상이 믿을 수 없게도 애초 생각했던 것과 달리 '민주적'이었다.

소설을 쓰고 싶던 이십대의 내게, 
세상은 불평등하고 그래서 부조리했으며,
더군다나 군사독재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 우리 사회는 학교든, 가정이든, 어딜 가든 다 모두 다 '군대'였다. 

그런데, 처음 만난 회사는 내가 짐작했던 것에 비해 의외로 '민.주.적'으로 보였단 거다.

물론,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2.

아마도, 군대문화에 찌든 사회라는 곳을 지레 짐작하고 심각하게 예단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군대 고참이나 상관 같을 줄 알았던 회사 선배들은 생각보다 선했고 내게 잘 해주었다. '군대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사회는 군대의 연장이다'라고 군생활 할 때 숱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회사가 그리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군대와 회사의 차이점이 있다면, 군대는 되도록 빨리 뜨고 싶은 시한부 생활이었던 반면에 회사는 오래 버티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러니 군대는 길어야 2년 볼 거 서로 막 대하는 거였고 회사는 대부분 평생 붙어있고 싶으니 서로 대놓고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물론 군대가 회사인 직업군인은 그런 경계가 없겠지만, 의외로 '민주적'으로 보이던 회사는 대놓고 까댈 수 없는 대신 주로 뒤에서 '작업'들을 해댔다.  평판이 그렇게 빨리 회자되었고 인사고과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회사마다 있었을 '밤의 황제 또는 대통령'들은 그렇게 양산되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럼에도 윗 사람 비위를 맞출 줄 몰랐기에 술도 먹고 먹은 술만큼 욕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작가와 요나만 입을 다물면 이 사건에 대해 떠들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은 '분업'화된 시스템 때문에 아주 부분적으로만 이 일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 [밤의 여행자들], <5. 마네킹의 섬>, 윤고은, 2013.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2013)은 '정글'이라는 여행사에서 한 때 잘 나가던 여행 프로그래머 고요나 과장이 회사에서 밀려나고 본인도 모르게 사라지는 잔혹한 현실을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려내는 일종의 우화다.

베트남 '무이'라는 곳은 땅이 크게 꺼져내리는 싱크홀로 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당한 곳이라며 여행사 '정글'의 인기 여행지 중 하나였지만, 이제 재난이란 게 지구상 곳곳에 만연하다보니 식상해지고 있었다.
찾아보니 베트남에 '무이 네'라는 섬은 있는 거 같은데, 소설 속 '무이'라고만 한 걸 보면 우화소설답게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도 있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한 듯 하다.

여기서도 역시,
내 소설의 주된 세계관인 '부재(不在)'가 등장한다.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데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는.
만연한 '부재'.

'어디에도 없으되, 어디에나 있는' 그 재난의 공간은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적 재난 상품을 연출하는데 결국 그런 인위적 작업 과정 자체가 진짜 재난의 원인이 된다.

결말은 같다.
재난을 조작하고 창조하던 '폴'이라는 거대한 배후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해 왔으며, 인재였든 자연재해였든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 모두를 삼켜버린다. 이 재난은 생계를 위해 재난 조작에 참여한 '무이' 섬의 원주민들은 물론, 회사에서 퇴물이 되어 어느덧 그곳으로 출장을 갔다가 어이없게 되돌아갈 길을 잃은 여행사의 설계자인 고요나 과장과 재난 시나리오 작가 및 재난 기획의 배후인 '폴'의 대리인과 같은 현지 매니저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고 만다. 

그들 모두는 '무지'했다.
재난 조작의 거대한 프로젝트 중 극히 일부분만 담당하는 '분업'을 통해 죄의식을 분담했고 아마도 '나만 그런가, 뭐'라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조작된 재난에 가담했다. 원주민들은 생계를 앞세워 사기를 합리화했고, 여행사 직원 고요나는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심지어는 그 새로운 재난의 드라마를 썼던 작가 조차도 자기만의 이야기에만 몰두했지 현실이 되고 만 재난이 시나리오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게,
'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


3.

이십대에 대학에서 들었던 노래 중에 '새세대 청춘송가'란 게 있었다. 

'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들어지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하는 청년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자주통일운동 청춘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나 스스로 생각했더랬으나 사회에 나와 한참을 지나서까지 노래의 가사가 가끔 생각나곤 했다.

어느덧 그 노랫말을 더 이상 진지함이 아닌 희극적으로 되뇌이는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나는 '철들어' 있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고자 기를 쓰면서 어느덧 나는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2000년대에 진보정당과 2010년대에 노동조합도 기웃거렸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여전히 체제의 노예였다.

2012년이었던가.
내가 노동조합 상무집행간부를 맡았던 첫 해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살자!"며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때, 박근혜 정권이 그 자리에 느닷없이 화단을 설치한다고 노동자들을 내몬적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대투쟁을 갔던 나는 거대한 배후인 박근혜 정권보다도,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해고 노동자들을 밀쳐대며 열심히 화단 만들 땅에 삽질을 해대던 서울 중구청 공무원들이 더 싫었다. 그들 힘없는 공무원들의 머릿속에는 집에서 아빠만 바라보는 가족만 있었겠지만 그때 그곳에서 그 가장들의 생계형 삽질은 분명 '악'을 행하고 있었다.

뜬금없지만,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싶었다.
독립운동을 했을까, 친일을 했을까.

아마도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친일 지식인들의 변명처럼 진짜로 해방이 될지 몰랐을 테니, 사회에서 내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며 '순리'에 따라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 지금 태어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고르게 된다. 

'분업'은 '무지'를 낳고, '무지'로 인해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시키는 대로만 성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라고 줄곧 자기 스스로를 변호했다던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마'와 같은 유대인 학살 기획자였지만, '분업'으로 '무지'했고, 그만큼 '평범'했다고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기록했다고 한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이다.

'악(惡)'은 '분업(分業)'으로 평범해진다는 생각을 노래 가사처럼 되새기며, 다음 책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제 비로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디,
그 속에 내가 없기를.

***

1.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민음사>, 2013.
2. [친일문학론](1966), 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2013.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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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전우치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7
김현양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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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과 전우치의 '타협'
- [홍길동전/전우치전], 19세기 경판본.


1.

이십대와 삼십대까지 서양철학사와 현대소설만 알던 내가 사십줄에 들어 동양으로 돌아와 예전부터 존숭하던 여말선초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따라 '성리학'의 급진성과 '유물론적' 성격을 추출하면서 따라가던 어느 날, [주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려웠지만 복희씨의 8괘와 주문왕의 64괘, 공자와 왕필, 그리고 주희의 해석에 관한 각종 해설서와 대중서들을 통해 나름대로 산가지 점을 쳐보기도 했다. 점 치기 전 정좌한 후 실은 산가지가 아닌 이쑤시개 55개이긴 했지만,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라고 두 번 외칠 때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어릴적 읽었던 [홍길동전]의 삽화가 떠올랐더랬다.

홍길동이 자기를 죽이려던 자객 특재가 들이닥치기 전 홀로 앉아 주역점을 치던, 지금은 내 머릿속 이미지로만 남은 그 삽화였다.


2.

"한편, 길동은 그 원통한 일을 생각하면 잠시도 머물지 못할 일이지만, 상공(아버지)의 엄명이 중하므로 어찌할 길이 없어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촛불을 밝히고 [주역]을 보며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들으니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가는 것이었다. 길동이 괴이하게 여겨 혼자 말하기를, 
'이 짐승은 본디 밤을 꺼리거늘, 지금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를 벌여 점을 쳐보고는 크게 놀라 책상을 물리고 둔갑법을 행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 [홍길동전], <길동을 죽여야 하옵니다>, 19세기 경판본.

조선 세종 시절에 이조판서 홍아무개의 서얼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고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출사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던 홍길동은 이미 소년시절에 [주역]에 통달하였단다. 

청룡이 천둥벼락과 함께 달려드는 태몽을 꾼 홍판서가 정실부인 유씨를 곧바로 안으려는데 양반가 부인 유씨가 체통을 지키라며 내쳤을 때, 하필 나타난 여종 춘섬을 건드려 나온 자식이 홍길동이었다. 청룡의 기운을 받고 나온 길동은 여덟살에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얼자의 운명에 속박되어 서러워했고 홍판서 또한 안타까워 했지만 세상의 질서는 한 사람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호부호형'을 못하는 길동을 신원해줄 길이 없어 무시로 길동을 꾸짖기만 한다. 
또 다른 첩 초란이 무녀, 자객과 짜고 재주 많은 길동을 암살하려 할 제, 소년 홍길동이 부리는 둔갑술은 [주역]과 같은 '인간'적인 도술이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길동의 도술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동양적 유불선이 융합된 경학과 도학을 바탕으로 연마한 다분히 '인문학'적인 도술인 것이다.


"... 길동이 이때를 틈타 공중을 향해 진언(眞言)을 외우니, 오방신장(五方神將)이 대군을 거느리고 일제히 에워쌌다. 동쪽은 청제(靑帝) 장군이요, 남쪽은 적제(赤帝) 장군이요, 서쪽은 백제(白帝) 장군이요, 북쪽은 흑제(黑帝) 장군이요, 가운데는 길동이 황금(黄金) 투구에 큰 칼을 들고 거침없이 쳐들어가, 칼 한 번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율도국 철봉태수) 현충이 탄 말을 찔러 엎어지게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 [홍길동전], <율도국의 왕이 되다>, 19세기 경판본.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한을 잊을만 하면 끊임없이 소환하며 세상에 제 이름 하나 알리고자 조선왕조 체제에 반란을 일으키던 길동이 결국 세속적 꿈이있던 병조판서 직함을 얻은 후 임금에게 사죄하고 물러났을 때, 길동의 꿈은 또 다른 왕국의 임금으로 이미 높아진 후였다.

조선체제를 속이고 희롱하던 길동은 구름을 타고 공중에 오르며 둔갑술과 변신술은 물론 분신술에 능하다. 율도국을 정벌할 때도 '오방신장'을 부리며 온갖 도술적 반칙으로 현실의 명장을 거꾸러뜨리는데, 유불선의 현실적 도학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도술의 달인이다.


"... 이렇게 하여 후세에 그 재주와 충효를 알게 함이라. 자손들이 대를 이어 태평성대를 누리더라."
- [홍길동전], <홍길동, 세상을 뜨다>, 19세기 경판본.

그렇다 하나, 결국 홍길동 전기의 대단원은 '충효'와 같은 조선왕조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활빈당 같은 도적단의 수괴로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세상에 자신의 명성과 재주를 알리기 위함이었고, 병조판서라는 현실적 요구사항이 분명했으며, 또 다른 유교 이상적 왕국 율도국왕이 된 후에도 충효를 따르며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명확한 삶의 경로가 있었다.

아마도, '인간'적 도술의 필연적 결말이리라.


"(도적) 염준이 크게 놀라 하늘을 우러러보니 한 때구름 속에서 번개가 일어나는데, 이는 번개가 아니라 운치(전우치)의 칼에서 나는 빛이었다. 염준이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진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앞에서 운치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았다. 뒤에서도 운치가 따르며, 좌우 또한 운치가 에워싸며 들어오고, 머리 위에서는 구름을 타고 칼춤을 추며 염준의 머리를 치려 하니, 염준이 정신이 어지러워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에 운치가 구름에서 내려와 가짜 운치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호령하여 염준을 결박해 본진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어 운치는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이치니, 적진의 장수와 병졸들이 염준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손을 묶어 항복했다."
- [전우치전], <염준과의 대결>, 19세기 경판본.

한편, 아마도 [홍길동전]에 영향을 받아 창작되고 구전되었을 [전우치전]은 어쩌면 최초에는 현실적인 [홍길동전]을 비꼬는 일종의 '반(反)홍길동전'이 아니었을까 나는 추측한다.

때는 고려말의 난세로서 [홍길동전]의 '태평성대'로서 조선 세종대왕 대의 배경과 달리, 난세였다.
왕조말 난세를 맞아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던 '운화 선생' 전숙의 아들로 태어난 전우치는 떼구름을 타고 나타난 동자의 태몽을 받고 태어나 본래 이름은 '구름에 다다른다'는 '운치(雲致)', '전운치'였다. 19세기 경성(서울)에서 출판된 '경판본'의 제목도 [전운치전]이었으나 후세로 이어져오며 발음하기 쉽도록 가운데 'ㄴ'이 탈락된 [전우치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벼슬을 하지 않고 산속으로 떠난 '산중처사'의 자식이라 그런지 홍길동처럼 특별한 목적이나 현실적 꿈은 없이 고려왕조를 희롱하던 전우치의 도술 또한 홍길동 못지 않게 화려하다. 
이야기의 흐름상 고려왕조를 농락하다가 잠시 '선전관'이라는 무관을 맡아 백성들을 돕고 부패관료들을 혼내주며 도적 염준을 진압하기도 하지만 전우치의 목적은 세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지 홍길동과 같은 부귀영화나 태평성대의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불리하면 공중에 올라 구름을 타고 칼날 같은 번개를 부리며 둔갑술과 변신술, 분신술에 능하다. 
전우치도 홍길동처럼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검술, 문무를 겸비하였지만 전우치의 도술은 구미호의 정령, 즉 '호정'을 먹고 터득한 것이다.
세상을 가지고 노는 전우치는 예쁜 여자로 변한 구미호를 꼬셔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의 입속에서 굴리던 '호정'을 프렌치 딥키스를 통해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는 당시로서는 음란소설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인도의 여인을 부리고 상사병에 걸린 친한 형을 돕기 위해 예쁜 여자를 꼬시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길동의 엄숙함과 진지함이라고는 눈씻고 읽어볼 수 없고 구성도 산만한 게 다분히 '동물'적 소설답다.

유불선의 동양 인문학이 다수 등장하나 '이성'적이지 않은 '감성'과 감각에 충실하니, 역시 '동물'적 도술의 영역이다.


"운치(전우치)가 조상의 무덤에 하직한 후 화담(서화담)을 모시고 구름을 타고 영주산으로 향하니, 그 뒷일은 알지 못하겠다(不知所終)."
- [전우치전], <서화담을 따라 세상을 버리다>, 19세기 경판본.

이토록 경직된 조선의 '이성'적이고 '인문학'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던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전우치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이 한문판으로 '반(反)전우치전'을 지어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끝내 굴복당하고 마는 결말까지도 지어냈단다.

19세기 경성(서울) 을지로에서 출판된 경판본 [전우치전]의 결말 또한 까불던 전우치가 결국 서화담의 도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도술을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서화담과 함께 세상을 버리고 영주산으로 떠나 신선 같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전우치전]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부지소종(不知所終)'이다.


3.

[홍길동전]과 [전우치전] 모두 '사회소설'이자 '반역소설'이지만, 당대의 대중의식과 시대정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홍길동은 애초부터 '인간'적이었고 결말도 현실의 '외부'인 율도국에서조차 현실 체제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우치는 '동물'적이고 반항적이지만 엉성한 이야기구성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황진이한테 넘어가고 말았다던 유학자 선비 서화담(서경덕)에게 굴복하고 만다.
고려말에 조선 중종조의 서경덕이라니, 엉성하고 어색한 판타지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타협'을 몰랐다.
그 시절의 나에게 기성세대의 타협이란, '배신'이고 '기회주의'였다.
그러던 내게 나이가 든다는 건 세상과 제도에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도 이 세상과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면서 어느덧 중년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타협'을 하고 살아왔다.

나이 먹을 수록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인간사 모든 게 밉든 곱든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그 거대한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우리의 고전소설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이든 '동물'적이든,
그 어떤 '도술'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타협의 인간사다.

나 자신의 나이 들어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현재의 최대강령인 민주주의의 근원 또한 '타협',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

1. [홍길동전/전우치전](19세기 경판본), 김현양 옮김, <문학동네>, 2010.
2.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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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 걸작 논픽션 27
피터 헤슬러 지음, 조성환.조재희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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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세계'의 문화투쟁
- [갑골문자], 피터 헤슬러, 2006.


"황제(黃帝)의 사관 창힐(倉頡/蒼頡)은 새나 짐승이 뛰어다니는 발자국을 보고 그 자국이 서로 같고 다른 것을 깨달아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창힐이 처음으로 만든 서계는 대개 유사함을 따라 형상을 본떴는데 그래서 '문(文)'이라고 한다. 그 뒤에 모양과 소리에 따라 서로 합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자(字)'가 생겨났다. '문'은 물체를 나타내는 요체이고, '자'는 거기서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을 대나무와 비단에 쓴 것을 '서(書)'라고 하는데, 서로 닮음을 의미한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후기>, 기원후 100년.
([갑골문자], <3부. 유물H : 글자>에서 재인용)


어린 내가 한자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였을 거다.

취학 전 잠시 어딘가로 출근을 하시던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사주셨고, 예닐곱살이었던 나는 어두운 방에 홀로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책을 펼치고는 그림들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앉은뱅이 책상에 있던 작은 한자책을 펼쳐서 따라 그리기도 했다. 
다양한 모양들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이 신기했다.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게 되었다.
우리 한글이나 영어 같은 서양 언어는 소리를 쓰는 '표음(表音)' 문자였던 거고, 내게 그림과 같았던 한자는 '표의(表意)' 문자였던 거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각지 답사와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문화를 묘사한 피터 헤슬러(Peter Hessler)는 일종의 '자유기고자'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처음에는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중국 쓰촨의 푸링이란 벽지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던 피터 헤슬러는 베이징으로 와서는 신문사 지부에서 기사 스크랩 일을 하다가 사설 독립기자로 허가받아 글을 썼다. 사무실이나 사무기기는 일하던 신문사 지부로 유령등록하고 미국의 각 잡지사에 중국 관련 글을 보내 단어당 보수를 받는 일종의 기자이자 르포작가다.

그가 2006년 출간한 책, [갑골문자]는 제목만 보면 기원전 2천 년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은(상)나라에서 시작되는 중국역사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문화 이야기다. 모티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표의문자' 한자이고 그 기원인 은(상)나라의 '갑골문자'인 것이다. 주요 소재는 냉전 후 미-중 관계와 고고학자 및 중국 각지로 퍼진 저자 자신의 푸링 시절 영어 제자들, 그리고 몇몇 중국 인민들과의 인터뷰다.


"근본적인 문제는 왜 '문자체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느냐가 아니다. 관건은 이러한 문자의 안정성이 어떻게 중국세계를 빚어냈는가에 있다... 그러나 한자는 다른 장점이 있다. 한자는 제국의 통일에 강력한 요소를 제공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통일은 일종의 민족집단과 언어의 혼합이다. '문자(文字)'는 탁월한 역사의 연속성을 창조했다. 계속되는 서사는 역대의 혼란을 무마시켰다. 한자 자체가 아름다워 서예가 기본적인 중국예술이 되었다. 서구의 문자와 비교할 때 한자의 중요성은 훨씬 크다. '문자'는 어디에나 있다."
- [갑골문자], <4부. 유물K : 잃어버린 알파벳>, 피터 헤슬러, 2006.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언어들은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는 '표음문자'로서 수십 개의 자모를 통해 다양한 말들과 방언들까지 받아적을 수 있다. 반면 글자 자체가 뜻을 상징하는 '표의문자'는 해당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이미지를 익혀야 한다. 수천 또는 수백 개의 한자를 알아야 한다. 
표음문자는 말과 음성이 먼저고, 표의문자는 '문자(文字)'가 우선이다.

피터 헤슬러가 만난 많은 고고학자들은 은(상)나라의 수도 부근 안양에서 갑골문을 발굴한 사람들인데, 그 중 징즈춘이라는 젊은 고고학자는 갑골문자로부터 시작한 거대한 '문자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한다(같은책, <1부. 유물A : 지하도시>).

은나라는 지금의 통일중국 같은 영역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 지역에 존재했던 소수 지방정권이었지만 갑골문자에서 보듯 '문자'를 남겼고, 이 독특한 한자 '문자체계'의 문화, 즉 중국만의 '문자세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수의 민족들이 대륙을 지배하면서 수용하고 적응하며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거대한 문화와 역사 자체가 된다.

동쪽의 룽산문화였던 은(상)나라를 서쪽 앙소문화의 주나라가 멸망시킨 후에도, 주나라의 봉건왕토들이 쟁투하던 춘추전국시대에도, 진시황의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한(漢)'족 문화는 물론 다양한 유목민족들과 몽골 및 여진까지도 이 '문자체계'에 동화되었다. 아마도 우리 한반도에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그 문화에 그대로 종속되어 오지 않았을까.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바로 이 '문자체계' 문화일 수 있겠다. 

영토는 실질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차적이다. 
독립적인 '문자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젊은 고고학자 징즈춘이 말한 '문자세계'다.

1949년에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중국의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70년대의 '문화혁명'이라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광기어린 대숙청 이전에 이미 한자문명을 개조하려고 시도했단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이 추앙하던 소비에트의 권력자 스탈린의 조언을 듣고는 안 그래도 다른 할 일도 많았던 상황인지라 문자혁명은 포기했단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중국은 큰 나라이므로 단순히 라틴 자모를 쓰지 말고 고유의 문자를 쓰라고 충고했단다.

피터 헤슬러가 이 길고긴 이야기 내내 추적하는 고고학자는 '천멍자'라는 인물이다.
그는 은나라 안양의 갑골문자 해독에 능했고 마오쩌둥의 문자혁명에 반대하여 오랜 한자체계를 옹호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에 천멍자는 '극좌파' 권력으로부터 '우파'로 낙인찍혔고, 은나라 갑골문 해석과 청동기 도록에 관한 자신의 학술적 업적까지도 부정당했다. '문화혁명' 당시 천멍자를 비난했던 동료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어용적 비난행위를 후회하거나 아예 언급을 자제했다는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천멍자의 갑골문자와 청동기문화에 관한 학문적 성과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의 이름으로 쓰인 이야기들과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이다. 갑자기 기절한 사람의 의식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듯 말이다. 어떤 글쓰기든 어느 정도는 이와 비슷하다."
- [갑골문자], <2부. 5장>, 피터 헤슬러, 2006.


피터 헤슬러의 이 책은 중국역사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기록한 '비교문화' 이야기에 가깝다. 
1940년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문화를 연구할 때 그녀와 연구자들이 일본에 가보지도 못했다면, 1999년에서 2002년까지 피터 헤슬러는 중국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생생한 인터뷰를 이어간다.
이제 21세기에도 한참 들어선 지금, 어느 서양인들은 한반도를 누비며 조선의 역사를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로서 묘사하고 있지 않을는지.

어찌보면 논픽션 소설 같기도 하고, 르포르타쥬 같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중국문화에 관한 생계형 잡지기사의 모읍집에 가깝다. 자신이 실제 겪고 인터뷰한 실존인물들의 증언이지만 저자로서 최대한 객관화시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프리랜서 글쓰기의 핵심'이라 정의한다.
4부에 걸친 길고 긴 인터뷰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다. 그럼에도 갑골문과 청동기, 문자세계와 중국의 각종 유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중간중간의 13개 삽입장들은 흥미롭다.


"만일 한자체계의 기원을 찾고자 할 때, 자연모방적인 도상을 찾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요. 찾아야 할 것은 다이어그램, 즉 추상화하고 성문화하는 구조입니다. 종교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동일한 욕망이 문화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어요... 이집트에서는 초기의 국왕이나 고급관리의 초상을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없어요. 분명 중국인은 중요한 권력과 위력, 존재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를 즐깁니다."
- [갑골문자], <3부. 유물G : 금 가지 않은 뼈>, 피터 헤슬러, 2006. (미국 고고학자 키틀리 인터뷰)


고대 서쪽의 이집트 설형문자나 동쪽의 중국 상형문자 모두 '표의문자'였지만, 이집트 문자는 로제타석이 발견된 19세기나 되어서야 해독된 반면, 중국의 한자는 그들 주장에 의하면 5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왔다.

피터 헤슬러의 [갑골문자]에서 유일하게 가명으로 등장하는 폴라트는 중국 서부 및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신장 위구르인이다. 한자문명에 포섭되지 않은 돌궐인의 후예 위구르인은 서방과의 교류 및 혼혈로 인해 동방의 한족 및 소수민족들과 다른 생김새다. 또한 오랫동안 중국문명에 대항해왔다. 흡사 지금까지 중국본토에 저항하는 타이완과도 같고 티베트나 몽골과도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독립된 역사와 문화, 특히 고유의 문자를 가진 우리가 종속되기를 부정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대륙'의 특정권력이라기보다는 '문자체계'로 상징되는 '문화'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위구르인이 주요 등장인물인 이유 중 하나도, 중국이 자랑하는 '상형문자' 문화가 어쩌면 중국 주변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지역민들의 문자체계가 흡수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일텐데, 사료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역대로 중원을 장악하고 대륙을 통일했다고 생각한 왕조나 정권이 다른 문화를 제거해버린 결과가 지금의 한자 문자체계일 수도 있다. 중국역사 속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후세들로부터 결국 비슷하게 묘사된 '추상'적 중국문화권력의 힘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찌보면, 
강대국으로서 닮은꼴인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사이 '문자세계' 간의 문화투쟁일 수도 있겠다.

한글이라는 표음문자를 지녔으나 표의문자체계에서 오래 살아 온 우리 한반도 '문자세계' 문화의 위치는 어디쯤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

1. [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2.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3.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Ruth Benedict,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197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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