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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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
- [귀신이 오는 밤], 2022. / [귀신들의 땅], 2019.


"귀신날 :
음력 1월 16일,
한국의 세시풍속 중 하나로
이날 일을 하거나
바깥출입을 하면
귀신이 따른다고 믿고
집에서 쉬면서
액운을 막기 위한
풍습을 행하였다."
- [귀신이 오는 밤], <구픽>, 2022.


1. 어머니는 모른다고 하셨다.

어릴적 나는 엄마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다. 
아니 그러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주 어렸을 때 기억으로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그 순간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 좋아했던 기억으로 난 믿고 있다.

엄마의 이야기는 당신이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주로 본인이 직접 보고 겪었다는 생생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곧 망하게 될 집의 지붕 처마를 타고 미리 빠져나간 뾰족한 귀와 발을 지닌 구렁이도, 시집간 언니네 집을 다녀오던 한 밤의 산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의 치마 밑 여우꼬리도, 숱한 밤의 도깨비불도, 어린 시절 내 엄마는 다 직접 보았다고 했다. 대여섯 살 때 추운 겨울 눈 오는 마당에 웅크려 누운 큰 강아지를 신기해서 만져보려 나가려다 언니들에게 제지당한 이야기는 예사였다. 줄무늬가 있었던 그 큰 강아지는 엄마 고향 감악산의 산신령인 호랑이였단다.

어느 정도 큰 다음에 나는, 이 모든 엄마표 전래동화 중 믿을만한 건 호랑이 이야기 뿐이었음을 안다. 어린 내가 엄마에게 무한반복 재생을 요청했던 그 많았던 옛날이야기 중 그나마 실제상황은 1940년대에는 충남 서산에 아마도 살았을 법한 호랑이였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가 아닌 '어머니'로 부른 후에도 내 어머니는 가끔 무언가를 보신 듯 한 밤에 상갓집을 다녀온 아버지를 문 밖에 세워두고는 굵은 소금을 두루 뿌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문 밖 눈쌓인 곳에 식칼을 밤새 꽂아두기도 했다. 아버지가 상갓집이나 제삿집에서 뭔가 '겁나 험한 것'을 데리고 왔다면서 말이다.

그런 내 어머니 조차도, 
'귀신날'은 처음 들어봤다고 한다.


2. '귀신날' 또는 '귀신'의 서사

어린 내게 옛날 이야기, 주로 본인이 겪었던 '실화'로 각색된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 같은 우리 세시풍속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곡식을 심기 전 논밭을 한바탕 태우는 쥐불놀이와 각종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음식들을 주워먹으러 동무들과 온 마을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일들이 고단했던 당신의 삶 속에서도 그나마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소환되었고, 가난하여 풀죽도 못 먹던 집에서도 이날만큼은 빚을 내서라도 좋은 음식들을 많이 준비하더라는 그런 서글픈 사연들도 있었다. 농경사회였을 당시로서 가장 중요한 풍작을 농사 시작하기 전 한 해의 첫달인 음력 1월에,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비는 풍습이겠다.

그런데, 음력 1월 15일 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이 이른바 '귀신날'이라는 걸 나는 올해 처음 들었던 거다.

<구픽> 출판사에서 '귀신'이라는 주제를 신예 작가들에게 던져주고 그에 관한 단편소설들을 모아서 엮은 앤설러지 [귀신이 오는 밤](2022)에는 정월 대보름날 다음날이 '귀신날'로 전해져 왔다고 말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놀고 들어간 다음날,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느라 열심히 일한 머슴들이 하루 쉬려고 그 다음날을 '귀신날'이라 소문냈다는 것이 그 유래란다. 음력 1월 16일 밖에 돌아다니면 귀신에게 홀리거나 잡히게 되고, 심지어 신발을 밖에 내어 놓으면 사람을 못 잡은 귀신들이 그 신발들까지 가져간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충남 서산에서 호랑이는 물론 구미호와 도깨비불, 심지어 이무기로 추정되는 괴생명체까지 목격했다던 내 어머니에게조차도 정월 대보름 다음날인 음력 1월 16일 '귀신날'은 금시초문이었다. 내 어머니의 총기는 여든이 넘도록 네살 때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아 운동장에서 열린 마을주민 집단만세 행사와 옆 할머니의 '만사이~'도 여직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한편,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2019)에서는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을 중심으로 한 7월 한달의 풍습인 '중원절(中元節) 이야기가 나온다. 
차별과 억압의 땅인 고국 대만과 시골 고향을 떠나 독일 베를린을 귀신처럼 떠돌다가 다시 귀신들이 여전히 흘러다니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성애자가 회상하는 시간의 중심이 바로 '중원절'이다. 이 역시 한 해 농사의 수확 전인 한 여름에 풍작을 기원하는 풍습이겠는데, 음력 7월 1일 '귀문(鬼門)'이 열리면서 온갖 귀신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7월 15일 보름달이 뜨면 귀신의 문이 가장 활짝 열린다는 설이다. 대만인들은 7월 말 귀신의 문이 닫힐 때까지 주인 없는 풍성한 제삿상을 계속 차려놓는다고 한다.

우리의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은 '상원(上元)이고 대만의 음력 7월은 '중원절(中元節)'이다. 
우리 귀신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에 돌아다니고, 대만의 귀신들은 음력 7월 내내 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나 귀신들이 스스로 돌아다니는 걸까.
내 보기엔 사람들이 불러내는 거다.
알아서 아무때나 돌아다니며 해코지 못하게 보름달이 뜨는 특정한 달과 날을 잡아 불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참에 모여 고된 삶의 나날을 잊고 한바탕 산 사람들도 먹고 놀자는 거다.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말이다.

과연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귀신날' 같은 '귀신'의 서사는,
먹고 살기 위해서든 놀기 위해서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부여에도 있었고, 고구려에도, 동예와 옥저에도 그 풍년 기원 축제들은 있었다.


3. '소외'와 '반전', 그리고 '자불어 괴력난신'

'귀신'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 같은 귀신의 서사를 보다보면 나는 두 가지 개념을 떠올린다.

1) 하나는 '소외'다.

대부분의 귀신들은 원혼의 형태로 살아생전 온갖 차별을 받던 자들이다.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에서는 산 자나 망자나 모두 '귀신'이다. 주인공은 동성애 남자로 오래도록 차별받았고 다섯 누나들은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과 여성차별에 익숙했으며 차별의 행위자로서 엄마 또한 대대로 억압받던 시대의 희생자였다. 결론에서는 말없이 묵묵했던 주인공의 아버지조차 대만 중화민국의 계엄과 억압에 반항하려던 비밀독서회원이었고 숨은 동성애자였다.

갖은 차별로 인해 '소외'된 자들은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지 못한 채 '귀신'이 되어 배회한다.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이 "공산주의라는 '유령(귀신)'이 전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서문>)고 선언했지만 그 귀신은 바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공산당'의 아류들은 등장했다가 명멸했지만 계급차별과 노동소외가 현존하는 한 언제까지나 '귀신'이 되어 인류의 주변을 맴돈다. 
장화와 홍련의 신원은 용감한 평안도 철산부사가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성차별의 땅에서는 장화홍련의 혼은 여전히 떠돌아다닐 게다.

2) 또 다른 하나는 '반전'이다.

영화 [식스센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귀신의 서사에서 궁극에는 화자 자신이 귀신으로 드러난다. 
우리 신예작가들의 '귀신' 선집 [귀신이 오는 밤](2022)의 첫 작품인 배명은 작가의 <1월 16일생>의 화자도 알고보니 본인이 귀신이었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내가 귀신인지 귀신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경계가 바로 이 '반전'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쉽게 말하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사람'이라는 거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이라 했다.

항상 겸손했던 공자가 현세의 '사람'에 대한 일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귀신'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반문했다는 말이다. 유교는 여타 종교들과 다르게 절대신이나 내세 또는 사물에 깃든 신이나 귀신 같은 존재를 믿지 않는다. 제사를 중시하지만 유교의 그것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다. 유교의 제삿상을 받는 조상신은 내세 또는 명부에서 '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바람과 공기처럼, 음양오행처럼 항상 떠돌아다니는 기운에 가깝다. 인간사의 요체인 현실정치를 중시하며 한편으로 [주역/역경] 같은 우주만물의 운동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한 성리학의 급진적인 요소에서 조상신이라는 '귀신'은 '사람'과는 또 다른 '물질적'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적 성리학은 '유물론'의 단초를 지니고 있다.

모든 '귀신'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 밖 '귀신'을 멀리 하고 현실 속 '사람'을 중시한 공자의 '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이다.

***

1. [귀신이 오는 밤 - 귀신날 호러 단편선], 배명은 외, <구픽>, 2022.
2. [귀신들의 땅(鬼地方)](2019), 천쓰홍, 김태성 옮김, <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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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Wisdom Classic 3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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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厚黑) vs. 박백(薄白)
- [후흑학], 신동준, 2011.


"이종오가 사상 최초로 거론한 '후흑(厚黑)'이라는 용어는 각각 '면후(面厚)'는 '뻔뻔함'으로, '심흑(心黑)'은 '음흉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역설한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중국 전래의 제왕학이 바로 '후흑'의 이론적 근거인 것이다."
- [후흑학], <1부 1장. 후흑학의 탄생>, 신동준, 2011.


중국 역사상 '3대 기인'으로 불리는 청나라 말 사람 이종오(李宗吾)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론, 역사서인 '24사' 등을 두루 공부했으나 이들로부터 이른바 '왕도(王道)'를 읽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기인'으로 평가받는 이유인데, 그는 역사상 천하를 거머쥔 인물들은 사실 '왕도'보다는 '패도(覇道)'의 제왕학을 실천했다고 보았다. 이종오는 남송의 주자학 또는 성리학 시대 이후 1천년 간 중국을 지배한 유교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의(仁義)'보다는 도가의 '도(道)'와 불교의 '공(空)'에 기초한 소위 '후흑학(厚黑學)'을 제시했다. 
1912년의 일이란다.


고전인문학자이자 언론인 신동준 선생이 이종오의 '후흑론'을 해설한 [후흑학](2011)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국제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말 외세열강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중국의 생존철학으로서 '후흑론'의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현재에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라 쓰고 있다. 
'뻔뻔함'과 '음흉함'의 처세술로만 알려진 '후흑학'은 생존을 위한 필수 이론이자 실천철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느 개인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후흑'의 처세가 필요하다는 건 다 안다. 다만 실천의 문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대다수는 저도 모르게 '후흑'의 선택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인의'와 대의명분을 선택하고는 대쪽같이 부러지는 위인들은 '후흑'의 반대말인 '박백(薄白)'으로 불린단다. 낯짝 두꺼운 '면후'의 뻔뻔함 및 속이 시커먼 '심흑'의 음흉함과 대비되는 얼굴이 두껍지 못하여 맑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박'과 '심백'의 차원이다. 뻔뻔하고 음흉해야 살아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실천하지 못하고 거꾸러지거나 물러난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의 위인이 되지 못한 '박백'으로 남았고, 천하를 거머쥔 위대한 인물들은 '후흑'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게 이종오의 [후흑학]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뻔뻔하거나 한없이 음흉하다고 해서 천하를 제패한 역사적 위인이 되는 건 아닐테다.  당대에는 잘 나가다가도 역사적으로 소인배가 된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후흑론'은 3단계로 구분된다.


[후흑학] <1부>에서 말하는 '면후심흑'의 3단계'(2장)는 다음과 같다.

1. 후여성장(厚如城墻), 흑여매탄(黑如煤炭) :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꺼멓다. 평범한 사람들이 갖출 수도 있을 초보 단계로 여기서 멈추면 그냥 사기꾼이다.

2. 후이경(厚而硬), 흑이량(黑而亮)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다. [후흑학]은 조조와 유비의 사례를 든다. 유비는 여기저기 빌붙으며 눈물로 인의를 호소하다가 결국 황제가 되었으니 '면후'의 달인이었지만 의리를 져버리지 못했으니 '심흑'은 부족했다. 한편 조조는 신의 용인술로써 '심흑'의 대가였음에도 '면후'가 부족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했단다. 동오의 손권은 '후흑'은 좀 알았지만 유비나 조조에 미치지 못했는데 다만 '면후'와 '심흑'을 그나마 균형적으로 부려 장수는 했다.

3.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색채가 없다. 이른바, '불후불흑(不厚不黑)'이라는 최고경지다. '대지약우(大智若愚)'와 같이 영리한데 멍청해 보이고 그럼에도 그 누구도 '후흑'의 혐의를 보지 못한다. 이종오가 가장 '후흑'의 대가로 꼽은 자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였다. 조조 사후 위나라를 두고 대외적으로는 제갈량과 내적으로는 조씨들 모두를 '후흑'의 전략으로 패퇴시키고는 사마씨의 세상을 연 사마의를 '후흑'의 역사에서 따를 자는 없다.

신동준 선생에 의하면 이종오의 '후흑론'은 도가와 불가의 공(空)과 도(道)를 따른다. 유가의 인(仁)과 의(義)를 앞세운 '인의론'은 결국 역사의 패배자로 '박백'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명철보신(明哲保身) 중 살아남는 게 지고의 가치인 '보신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말의 혼란기에 중국 역사를 '후흑론'으로 정리한 이종오에게 중요한 단어가 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바로 '구국(求國)'이다.

즉, 대의명분이 있는 생존투쟁의 큰 싸움판에서야말로 '후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른바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이 사례로 [후흑학] <2부>는 역사상 구국과 천하쟁패를 앞둔 '후흑'과 '박백'의 투쟁을 소개한다.

1. 춘추시대 말기 월왕 구천(후흑)과 오왕 부차(박백) : 와신상담을 통해 부차에게 오랜 기간 몸을 굽힌 구천의 역사적인 복수는 서로 죽고 죽이는 본격적인 전국시대를 열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말기 초한쟁패 또한 적이 죽어야만 내가 살아남는 '포스트-전국시대'였으니, 구천이야말로 '후흑'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2. 초한전쟁 건곤일척의 주역인 한왕 유방(후흑)과 초패왕 항우(박백) : 서민건달 유방은 여러 재능있는 자들을 두루 품고 끝까지 야망을 밀어붙인 반면, 항우는 권토중래를 거절하고는 하늘을 탓하며 천하쟁패 투쟁을 쉽게 포기하고 만다.

3. 한신(박백)을 잡아들인 계책을 낸 장량(후흑) : 토사구팽을 예견하고 속세를 떠난 장량이 유방과 여후에게 한신을 토사구팽할 계책을 낸다.

4. 유비(면후)와 조조(심흑) : '면후'와 '심흑' 단계의 대표적 사례로서, '면후'와 '심흑'의 적절한 결합으로서 '후흑'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5. 손권(후흑)과 사마의(불후불흑의 최고경지) : 손권과 동오의 장수비결도 사마의의 최고경지를 당할 수 없었다.

6. 사서삼경 중 [주역]을 즐겼지만 '박백'했던 장개석과 [자치통감]은 물론 [한비자]를 끼고 살았던 '후흑'의 모택동 : 최대군벌이 된 후 '후흑'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한 장개석의 '박백'이 농민혁명의 시대적 대의를 앞세운 모택동의 '후흑'에게 패배한 역사는 이종오의 '후흑론' 이후 사례로서 신동준 선생의 견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후흑구국'의 차원에서 논하는 '후흑학'은 바로 '제왕학'이었던 것이다.


[후흑학] <3부>가 전하는 '승자의 전략'으로서 '후흑술(厚黑術)'은 아래와 같다

1. 공(空) : 위기에서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라. '교토삼굴'.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굴을 파두는 전략이다. '공성계' 또는 '36계 주위상계(走爲上計:줄행랑)' 등이다.

2. 공(貢) : 반룡부봉(攀龍附鳳)하되 역린을 조심하라. 강한 자에게 붙되 거슬리지 말 것이다. 용의 등에 탔다고 자만하다가 [한비자] <세난>에 나오는 역린을 건드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3. 충(沖) : 호언장담으로 기선을 제압하라. 빈천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4. 봉(捧) : 박수갈채로 자부심을 만족시켜라. 대놓고 아부보다는 상대방이 듣고 보기를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하라.

5. 공(恐) : 솜에 바늘을 숨기고 때를 노려라. 섣불리 의중을 드러내거나 잘난 체 하지 말고 사마의처럼 때를 준비하라.

6. 송(送) : 비자금을 활동자금으로 활용하라. 상대방은 물론 영향력있는 주변에 뇌물도 필요하다. 유방의 책사 진평은 빈천하여 뇌물을 받았지만 이를 사적으로 쓰지 않고 전쟁 승리를 위해 항우 주변에 뿌리는 뇌물로 썼다. 

7. 공(恭) : 사람을 가려 때에 맞게 칭찬하라. 타국 출신 관리와 책사들을 배제하려는 진시황의 '축객령'을 철회시킨 초나라 출신 진나라 유세객 이사의 '간축객서'는 제갈량의 '출사표'못지 않은 역사상 명문이다. 태산은 먼지 한 톨도 거부하지 않고 대해는 작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간축객서'를 쓴 이사는 진시황 전국통일 최초의 승상이 된다.

8. 붕(繃) : 큰 인물로 포장해 신뢰케 만들라. '36계' 중 제1계인 '만천과해(瞞天過海)'는 천자인 당태종을 속여 바다를 건너게 한 설인귀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9. 농(聾) : 귀머거리 흉내로 속셈을 감추라. '36계'의 27계인 '가치부전(假痴不癲)'은 어리석은 척 하며 상대방을 속이는 적극적인 전술인데, 사마의처럼 의중을 끝까지 감추는 방책이다.


개인의 생존과 처세에서 누구나 내심 떠올리고 만지작거리는 '후흑술'은 '구국'의 거대한 생존투쟁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전략임에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종오가 중국 역사에서 오랜 기간 경직된 '인의론'를 넘어 '후흑구국'의 실천철학으로 무장하여 외세를 물리치자고 강력 주장한 것 또한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럼에도 '인의'를 지키려 한 역사를 그냥 '박백'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어쩐지 입맛을 쓰게 한다.

내 생각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내심 알고는 있을 저 '면후'와 '심흑'의 실천이 과연 훈련으로 가능할까 싶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직 내가 '구국'의 차원만큼 생존이 절박하지 않은 것인가?

***

- [후흑학(厚黑學)],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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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나와 일본 - 비릿 짭짤, 일본 어식 문화 이야기
서영찬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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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어(魚)식문화' 이야기
- [사카나와 일본], 서영찬, 2024.


"魚 물고기 어.
일본인에게 이 한자를 보여주고 한번 읽어보라 하면 대다수가 '사카나(さかな)'라고 발음할 것이다. 1973년 상용한자표가 개정된 후 초등교과과정에서 어(魚)를 '사카나'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카나'의 본래 뜻은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무엇과? 밥과 술이다. 그래서 사카나는 반찬이기도 하고 안주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모든 언어 대중 사이에 '술안주=사카나=생선'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를 통해 유추 가능한 사실은 예로부터 일본인의 주류 술안주가 생선(魚/물고기)이었다는 점이다."
- [사카나와 일본], <6. 바닷물고기 언어학>, 서영찬, 2024.


1.

내 일찍이,
'회(鱠)'를 사주는 사람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형'이라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점심에 누가 뭘 먹을까 물을 필요 없이 사시사철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늘 '물냉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저녁에 술 한 잔 할 때 안주를 뭐로 할 것이냐 누가 묻기도 전에 나는 항상 '회(鱠)'를 떠올린다. 
진심으로 1년 내내 먹고 싶은 음식이다.

물고기의 비릿함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 중 하나다. 차고 비린 술안주의 조합이 바로 '회'다.


2. 

'회(鱠)'.

우리가 날생선 음식으로 알고 있는 이 한자는 일본에서 지은 글자란다. 원래는 고기 육(肉) 변을 쓰는 '회(膾)'였다. 익혀먹는 화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닭고기와 개고기 등을 날로 먹던 풍습이 한자 '회(膾)'의 기원인데, 서기전 6세기의 공자까지도 개고기 '회'를 먹었다는 설이 있듯이 원래 '회'는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육지 날고기를 의미했단다.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와 육식을 금했던 에도시대에 물고기 어(魚) 변을 쓰는 '회(鱠)'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어식(魚食)문화'라 자칭하는 섬나라 일본에서 각종 물고기를 지칭하는 한자에 '물고기 어(魚)' 변을 붙인 일본식 조어가 등장한다.


3.

읽고 쓰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활자중독' 인문학자이자 전직 언론인 서영찬 선생은 [사카나(魚)와 일본](2024)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물고기와 해산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본에서 살아보지는 못했으나 부산 출신인 저자는 물고기에 대한 박학다식한 관심과 심화 공부를 통해 더 나아가 일본의 역사와 문화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진지하지 않고 즐겁고도 가볍게 읽기 참 좋은 책이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학술적이지 않고 "술자리나 식사 자리에서 가벼운 이야깃거리 정도"로 나눌 수 있는 소소한 내용을 목적으로 한다. 딱 내 취향이다.


"우리가 흔히 스시니, 초밥이니 부르는 것은 '니기리즈시'다. '니기리'는 '손으로 움켜쥔다'는 뜻이다. 밥알을 한 움큼 잡아 손아귀에 힘을 주고 꾸욱 움켜쥐었다가 와사비를 묻히고, 그 위에 생선살을 올린 다음 다시 한번 꾹 쥐어주면 초밥 하나가 완성된다. 이 제조 과정이 그대로 음식의 명칭이 됐다."
- [사카나와 일본], <3. 쏠쏠한 돈의 맛 : 니기리즈시>, 서영찬, 2024.

어식문화 일본의 대표음식 '스시'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말로 '초밥'이라 부르는 '스시'는 'すし' 또는 '寿司'다. 원래는 우리나라 동북해안의 가자미식혜처럼 염장생선에 밥을 얹어 발효시킨 슬로우푸드(나레즈시)였지만, 근현대 일본의 초밥은 '니기리즈시'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갖은 재료를 재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한 줌 쥐어서 만드는 패스트푸드의 대표음식이 되었다. 김밥의 유래리기도 하다. 전통 발효음식이 19세기 초부터 즉석식품으로 전환되는 식문화 변천과정에서도 변치 않는 건 '사카나(魚)'다. 소량 한 줌의 작은 밥덩이에 어떤 생선을 올려도 좋다.


[사카나와 일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0. 프롤로그
1. 애잔한 서민의 맛 
: 이와시, 멍게, 오징어, 꽁치, 가다랑어, 백합, 날치, 전갱이
2. 깊은 역사의 맛 
: 붕어, 다시마, 방어, 갯장어, 뱀장어, 붕장어, 가쓰오부시
3. 쏠쏠한 돈의 맛 
: 니기리즈시, 대게, 새우, 청어, 전어, 고등어, 명태
4. 무사의 칼맛 
: 도미, 뱅어, 아귀, 참치, 복어, 무사의 밥상
5. 신묘한 신성의 맛
: 문어, 쑤기미, 김, 전복, 연어, 고래
6. 바닷물고기 언어학

이 중 대부분은 우리 한반도에 익숙한 물고기들이다. 가다랑어와 청어, 날치와 참치 정도가 한반도와 대륙보다는 태평양 원양에 그나마 가까운 섬나라 일본의 상대적 특징이겠다. 물론 냉장냉동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어디서든 먹을 수 있으니 고대로부터 이어진 물고기 이야기인 것이다.


접대(오모테나시)를 비롯하여 물고기 중 최고는 도미(鯛/조)다. 사시미, 찜, 조림 등 어떤 음식으로도 중요한 접대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회로 많이 먹는데, 줄돔, 가시돔 같은 건 이름만 따온 거고 진짜 도미는 '참돔'이다. 임진왜란 이후 첫 조선통신사가 건너갔을 때도 에도 막부는 도미를 차렸고 우리 젊을 때만 해도 결혼식이나 돌잔치의 뷔페상에는 도미가 통째로 누워 있었다. 우리의 붕어빵은 본래 일본의 도미빵이었고, 사시미나 회로 유명한 도미의 손질은 과연 사무라이 무사의 칼맛도 난다. 

서민의 물고기 하면 이와시(鰯/약)다.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이 물고기는 청어과 생선을 싸잡아 부르는 말로 정어리와 멸치 등속의 회유성 떼거리 어종을 이른다. 떼거리로 잡히니 많은 사람들이 질리게 먹다가 버리거나 비료로도 가공하는 식이다. 다수 약한 민중들의 물고기반찬이라 약할 약(弱) 자 앞에 물고기 어(魚) 변을 붙였다. 그러나 다수의 힘을 지녀 어획량에 따라 일본 민중의 식생활을 좌지우지했다. 다수는 결코 약하지 않다.

첫 봄에 '맏물'로 잡는 가다랑어(鰹/견)는 일본 특유의 생선이다. 원양어업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에도시대에는 참치(鮪/유)보다 맏물 가다랑어가 바로 부르는 게 값 1순위였단다. 오히려 먼바다에 사는 참치가 뭍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상했거나 직전의 맛이라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가다랑어 또한 날로 먹다가 탈이 많이 나서 막부정권이 날생선 취식을 금지시키기도 했다는데, 어민들은 '겉바속촉'으로 겉만 대충 익혀 먹기도 했다. 탁탁 두드린다는 가다랑어 짚불구이 '다타키'다. 

일본 사카나의 상징인 가다랑어는 가쓰오부시(鰹節/견절)의 재료이기도 하다. 물에서 쪄낸 가다랑어를 열로 건조한 후 연기로 훈제하고 말리는 과정에서 곰팡이를 수차례 깎아내는 수개월의 과정을 거치면 딱딱한 가쓰오부시가 된다. 가쓰오부시는 중세 전국시대부터 무사들의 승전기원 식량이었고 미소된장과 주먹밥 같이 근대 일본군대의 전투식량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태(鯳/저)는 대구과의 물고기로 우리는 생태, 황태, 동태, 먹태, 북어, 노가리, 코다리, 명란 등으로 다양하게 먹지만 일본에서는 그 모양 그대로가 아니라 주로 가공한 형태로 먹었다. 어묵도 가능하지만 분홍색 어육소시지, 게맛살 등 추억의 밥반찬의 주재료가 바로 명태다. 명란젓이라는 한반도 동북부의 특산품이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잡기도 했다.

청어(鰊/련)와 연어(鮭/규)는 홋카이도 산물로 일본 혼슈의 북쪽 아이누 착취와 생선 가공업 자본축적의 상징이다. 청어와 연어를 얻기 위해 아이누족을 지배 및 착취했고 가공산업 진흥을 통해 자본축적을 했으나 현재는 청어와 연어 대부분을 수입한다는데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의 고래(鯨/경) 잡이는 끈질기다는데 전후 일본인을 먹여살린 고래를 신성시하는 점도 있겠지만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이 오래전 다리를 잃은 장소가 일본 근해였던 것처럼 일본이 고래와 가까운 문화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만 후쿠시마 방류처럼 다른 나라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처신하는 일본 우익정권의 행태는 참 일관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4.

비릿한 '어식문화'는 무릇 섬나라 일본의 것만은 아니다.
내륙 출신의 내가 생선회를 스무살에 처음 먹어보았음에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된 것만 봐도 물고기(사카나)의 비릿함은 바닷가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비릿한 어(魚)식문화 이야기는 계속된다.

비가 오든 말든,
오늘 저녁에는 지인과 함께 도미회를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여야겠다.

***

- [사카나(さかな/魚)와 일본], 서영찬, <동아시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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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지음, 정철승.황문주 옮김 / 더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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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와 '반(反)인도죄'
- [East West Street], Philippe Sands, 2016.


제목을 왜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로 지었을까, 
처음에는 궁금했다.

인간사에서 '정의(正義)'의 범위는 넓다. 
어쩌면 편향적일 수도 있는데, 보편적이어야 할 '정의'의 본래 속성과는 형용모순일 수 있는 이런 상황은, 
멀리 볼 것 없이 '계급투쟁'의 인류역사에서는 가능한 현실이다.
각자의 계급적 관점에서는 살기 위한 생존권적 선택이 바로 각자의 '정의'가 된다.
자본가에게는 돈이 '정의'인 반면,
노동자에게는 단결이 '정의'다.

하다못해 미국의 정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010)의 정의조차도 미국식 공화주의적 정의였지 인류 보편의 정의가 아니었다.

영국의 국제인권법 학자 필립 샌즈(Philippe Sands)의 책 [East West Street](2016)의 주제는 인류의 '정의(正義/Justice)'에 관한 내용은 맞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인 연합국측이 1945년 11월부터 1년간 열었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가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핵심인사들의 죄를 기소 및 판결한 과정에서 그 국제인권법의 이론적 기원을 추적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책은 더 이상의 세계대전을 통한 국제적 살상을 방지하고자 하는 국제인권법적 '정의' 실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국역본 제목이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로 된 이유가 비로소, 아직 청산되지 못한 우리의 일제강점기 식민역사와 결부하여 '정의'의 범위를 유럽 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시아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이 땅의 민주개혁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판단되었는데, 책의 대표번역자 정철승 변호사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알 수 있었다.

책의 원제는 [East West Street(동-서 거리)],
부제는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s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다.

저자 필립 샌즈는 영국의 국제인권법 학자로 유대인이었던 외할아버지 레온 부흐홀츠(같은책, <part 1>)의 출생과 삶의 궤적을 따라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친 유대인 출신 두 법이론가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전쟁 전과 전쟁 동안 민간인에게 자행된 살인, 말살, 노예화, 추방 및 기타 비인도적인 행위; 또는 행위가 자행된 국가의 법 위반과는 관련 없이 재판소의 관할권 내에서 범죄의 실행 또는 범죄와 관련되어 정치, 민족 또는 종교적 이유로 자행된 학대 행위"
-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part 2. 라우터파하트>, '뉘른베르크 헌장 제6장 c항', 필립 샌즈, 2016.

뉘른베르크 협정 또는 헌장의 제6조 c항이 정한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내용이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제법에 개인의 권리를 처음으로 정착시킨 중요한 시도로서 유대인 법학자 허쉬 라우터파하트(Hersch Lauterpacht)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영국측 수석검사(영국 법무장관) 하틀리 쇼크로스를 통해 관철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만 해도 패전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 등의 '제국'이었다. 즉, 국제법이라고 해도 주권은 왕국에게 있었고 국가권력은 국민이든 그 어느 민족이든 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전근대적 법이론이 주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이른바 '전간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비롯한 대중민주주의 혁명과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건설 등의 의회민주주의 개혁을 통해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즉 국가주권의 주체가 비로소 국민이 되었고 근대법이론 또한 이에 따라 국민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보기에 허쉬 라우터파하트의 '인도에 반하는 죄'가 천착하는 법에서의 개인권리 우선 원칙의 배경이다.
나는 '인도에 반(反)하는 죄'를 줄여 '반(反)인도죄'로 부르고자 한다.

저자의 외할아버지 레온 부흐홀츠와 동시대에 동유럽 너머 리비우(렘베르크/로보프/리보프)에 살았고 레온의 외가와 리비우 인근 도시 주기에프의 '동-서 거리(East West St.)에 걸쳐 살았을 라우터파하트는 당시 폴란드령 리비우(현 우크라이나 지역) 지역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유대인 법학자로서 전쟁 시기 영국에 정착하여 국제법에 개인 인권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시켰다. 
서로 일면식은 없었지만 라우터파하트는 같은 리비우대학 법대 후배였을 라파엘 렘킨의 사상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요약하자면,
국제법 현장에서의 '개인 vs. 집단' 관념이다.

전직 폴란드 검사 라파엘 렘킨의 '제노사이드'의 등장이다.

"특정 민족과 계급의 사람들 그리고 국가, 민족 또는 종교집단, 특히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및 다른 집단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점령 지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과 종교 집단의 말살"
-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part 4. 렘킨>, '뉘른베르크 공소장', 필립 샌즈, 2016.

'제노사이드(Genocide)'는 유대인이자 전직 폴란드 검사였고 전쟁 동안 미국으로 건너간 법학자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이 주장한 개념으로 정의는 위와 같고, 어원은 그리스어로 '종족'을 뜻하는 'genos'와 라틴어로 '살인'을 의미하는 'cide'의 합성어다. 원래 리비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렘킨이 1915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과 한참 후 아르메니아인의 오스만 제국 장관 살해의 복수행위를 보며, 그리고 국제법이 무죄를 판결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장관 살해자의 보복행위는 유죄로 선고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기 시작한 '집단학살(barbarism)'과 '파괴행위(Vandalism)'의 관계를 미국에서 새롭게 정립한 개념이 바로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정리하면, 한 집단이 다른 특정 집단을 말살할 목적으로 행하는 일련의 '집단학살'을 의미한다.

역시 유대인이자 전직 폴란드 검사였던 미국 법률가 라파엘 렘킨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미국측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미연방 법무장관)을 통해 '제노사이드'를 뉘른베르크 헌장에 삽입하기 위해 적극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게 된다. 열정적인 렘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의 주체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은 허쉬 라우터파하트의 '인도에 반하는 죄(반인도죄)'의 개인권리는 적극 수용한 것과 다르게 '제노사이드'의 집단주의는 계속 무시하다가 최종 기소문과 판결문에서야 일부 언급하기 시작한다. 

그 배경은 흑인노예 차별로 점철된 미국의 인종주의와 식민지 착취 및 학살의 역사를 가진 영국의 제국주의였다.
렘킨의 '제노사이드'는 전쟁 시기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자행된 '집단말살' 행위 일체에 대한 단죄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목적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전쟁범죄 처벌이었다. 역시 제국주의였던 승전국 그 누구도 '제노사이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테니, 뉘른베르크 국제재판에서는 패전국 독일에 대한 승전국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판결만으로 제한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히틀러 독일제국의 2인자 헤르만 괴링과 리비우 지역을 포함하여 지배관할하던 독일령 폴란드총독 한스 프랑크(같은책, <part 6>) 등은 사형판결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피고인 21명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대량이주와 집단학살의 하수인으로 국외로 도주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자들은 전후의 신생 유대인국가 이스라엘의 독단적 체포와 처벌이 불가피해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사형은 국제법적 논란을 야기한 일종의 '사적 보복'으로도 보였다.

'제노사이드'가 국제인권법에 주요하게 인정된 것은 그 이후 더 많은 국지적 전쟁과 크고 작은 집단학살이 더 자행되고 난 후였다.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후 50여년이 지나서야 '반인도죄'와 '제노사이드'가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동시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국제인권법에서 '개인(반인도죄)'과 '집단(제노사이드)'의 법이론적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지금의 국제인권법에서는 개인권리에 초점을 둔 허쉬 라우터파하트의 '반인도죄'와 집단에 중점을 둔 라파엘 렘킨의 '제노사이드' 모두가 상식이 되었다.
물론, 리비우와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그 어디에서도 단 한 번 마주치지는 못했던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의 '개인'과 '집단'이 이론적으로는 상호교차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만, 라우터파하트의 '반인도죄'의 개인인권주의는 렘킨의 '제노사이드'가 천착한 집단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표명했고, 렘킨은 '개인'을 강조하면 전쟁 전부터 벌어진 '집단'적 학살행위를 처단할 수 없다는 주장을 간헐적으로 했을 뿐이다. 

현대 국제인권법에서 '정의'의 기원은 유대인 출신의 리비우대학 법학과 선후배인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의 행적을 쫓으며 추적된다.

'개인'과 '집단'이 동시에 존중받는 국제법적 '정의(正義/Justice)'의 탄생기원이다.

***

-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East West Street - On the Origins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2016), Philippe Sands, 정철승 책임번역, <더봄>, 201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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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조선 - 제국이 재편한 음식경제사
임채성 지음, 임경택 옮김 / 돌베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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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 [음식조선], 임채성, 2019.


1.

음식 이야기인 줄 알았다.

더구나 믿고 보는 <돌베개> 출판사의 '한국학총서'라는 말에, 우리 한반도의 음식 역사 이야기를 또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살펴보고 두고 볼 일 없이 바로 주문했다.
모든 책은 결국 '역사책'이라 생각하는 나는, 세상 만물에 결국 '역사'가 깃들여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쟁에도, 미술에도, 그리고 '음식'에도. 
모든 것들의 이야기는 결국 '역사'인 것이다.

기대하던 책을 받아보고는, 그제서야 제목이 다소 심상치 않다는 생각과 함께 '서문'격인 <들어가며>를 읽고는 '음식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경제학'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다시는 본격적으로 수학과 경제학을 다루는 도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미 책을 구입했으니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저자 임채성 선생과 책을 통해 대화를 끝까지 이어가고자 출퇴근길에 며칠을 들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한 번 잡은 책을 끝까지 읽는 건 자신있다.
수학과 경제학 같이 100% 이해를 못하는 분야라도 저자와 대화를 하듯이 쭉 읽어가면 된다. 모든 대화를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끝까지 대화를 하고나면 반드시 줄거리가 이해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내게 독서는 '역사'에 관한 저자와의 대화다.


2.

"... 이러한 역사인식(식민지 수탈론)은 '강좌파'적인 견해가 강하게 반영된 '식민지 반봉건론'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개발론적 역사인식(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수탈론'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새로운(실증연구) 역사상을 제시하였다. 그 후의 식민지 경제사 연구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계승하는 입장을 취하든 비판적 입장을 취하든, 이 논의를 전제로 할 수 밖에 없었고, 종래의 일방적 '수탈론'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역사상이 그려져 왔다. 이와 같은 새로운 움직임은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사 분석의 방법론으로 도입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 [음식조선], <들어가며. 식료제국과 조선>, 임채성, 2019.


[음식조선(飲食朝鮮/Inshoku Chosen)](2019)의 저자 임채성 선생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우리나라 학자는 아니다. 일본 도쿄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현재 릿쿄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주제는 '일본 경제사'인데 일본을 넘어 한국과 대만, 나아가 중국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국제경제학과 비교경제학까지 확장하고 있단다. 연구의 소재는 '음식', '건강'과 '위생' 등이라고 한다.

[음식조선]은 임채성이라는 한국 출신의 일본 경제학자가 일본어로 쓴 책을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임경택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일제강점기 멸망한 조선 땅에서 새롭게 재편된 '음식경제사'다. 결국 동아시아 국제경제학에 깃든 '역사'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기는 하다. 그러나 '역사' 보다는 '경제학'에 방점을 둔다. 

곡물의 대표로서 쌀(미곡)과 농업 생산수단이자 고기로서의 소, 고전적 사치품인 홍삼의 동아시아 교류가 <1부. 재래에서 수출로>의 소재다. 
쌀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생산성이 향상되었지만 일본으로 대거 수출되었는데 사실 식민지 착취였다. 일제가 조선을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시키려고 했다지만 결국 농업은 '자유 시장'으로 편입되지 못했다. 일제와 총독부의 국가권력에 의한 대대적인 계획통제 및 착취가 이루어진다. 1940년대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계획경제에 의한 강력한 통제는 비단 쌀 뿐만 아니라 모든 산물의 공통적 상황이었다. 소도 마찬가지고 대한제국 말기까지도 국가 전매를 시도했던 홍삼도 그랬다.

원래 조선에는 없던 상품으로서의 우유와 사과는 일본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역시 일제와 총독부의 국가권력에 의해 여러 독과점적 '동업조합'으로 재편되었고, 반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확장된 명란젓(명태알)은 일제의 주도로 조선 특유의 상품이 된다. 

<2부. 자양과 새 맛의 교류>에서 다룬 우유와 사과는 서울우유의 전신인 '경성우유(서울우유)동업조합'을 통해 한반도의 새로운 자양분 음식으로서의 우유를 정착시켰고, 조선 토종이 아닌 19세기에 이식된 외래종 과일인 사과는 역시 동업조합의 독과점적 발전을 통해 일본의 아오모리 사과와 경쟁하게 되는 국광과 홍옥 등의 조선사과로 태어난다. 명란젓은 원래 일본에서는 먹지 않았다는데 지중해의 참치와 북대서양의 대구와 같이 한반도 동해의 명태를 주로 먹던 우리나라의 명란젓이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 일본에까지 확장된 사례다. 조선의 사과처럼 일본의 명란젓은 이제 해당나라 특유의 산물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던 <3부. 음주와 흡연>은 소주와 맥주, 그리고 담배에 관한 이야기다.

소주는 원래 재래식 증류주다. 몽골제국을 통해 서아시아 아랍에서 동아시아까지 넘어왔을 소주는 중세 아랍의 연금술사들이 물과 알코올의 끓는 온도가 다른 점에 착안하여 발효주를 끓여 먼저 수증기가 되는 알코올 성분을 다시 액화시키는 방식으로 처음 발명한 술이다. 증류기에 '땀'처럼 맺힌 것을 보고 아랍인들은 이 증류기를 '알렘빅(Alembic:땀)'이라 불렀다. 중국 원나라는 이를 '아라길'이라고 불렀는데, 소주는 서아시아는 '알렘빅', 동아시아에서는 '아라길' 주였다. 우리의 전통 소주는 이런 방식으로 만든 가정식 생산물이었지만 일제는 자본주의 상품으로서 주정식 소주를 대량생산한다. 사탕무 당밀로 원액(주정)을 만들고 물로 희석시킨 지금의 화학식 소주는 재래식 자가용 소주를 제치고 보편화되었다.

맥주는 한반도에 원래 없던 술로 독일의 제조방식이 일제를 통해 이식된 상품이다. 원래는 양주와 같이 일본인과 친일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으로 시작되었지만 자본주의적 상품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식민지 경제성장을 통한 소득 증대로 인해 민간에도 확대되었다. 일제가 서울 영등포를 비롯해 평양 등지에 독일식 맥주공장을 세웠는데 이게 조선 '비루(beer)'가 된다. 남한의 조선맥주(크라운)와 북한의 대동강맥주 등의 유래가 되겠다.

17세기에 조선에 들어온 담배 또한 자가용 곰방대 엽초를 넘어 일제가 궐련식 상품으로 대거 재편했는데, 술이나 담배 같은 기호품의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과정은 국가의 직간접적 독점전매를 통한 세수 확보의 역사다. 일제와 총독부는 술을 주류동업조합에 대한 지배를 통한 간접적 형태로, 담배는 국가전매라는 직접적 방식으로 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해방과 6.25 전쟁 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류와 담배를 통한 세수확충의 유래는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부터다.


[음식조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지 반(半)봉건론'에 기초한 '식민지 수탈론'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을 자본주의 체제라기 보다는 식민지 체제 하 절반의 봉건국가를 벗어나지 못한 후진 체제로 규정하고 일제가 한반도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식한 것이 아닌 대대적 수탈만 했다는 역사관이다. 
일본의 국제경제학자인 [음식조선]의 저자 임채성 선생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로서 복잡하고 매우 광범위한 '실증적' 통계자료를 근거로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자본주의 상품화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내세우고 있다.

책 서술 내내 일본을 '식민지 본국' 나아가 '내지'로 매우 일관되게 표현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매우 불편하다. 아마도 일본 학계의 연구서로 원서가 일본어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돌베개> 출판사가 왜 이 책을 '한국학총서'로 분류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물론 저자는 대놓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격인 <들어가며>에서는 '신고전파 경제학'적 통계수치를 근거로 삼지 않아 '실증적'이지 못한 '식민지 수탈론'을 '강좌파'로 부르면서 '실증적'인 경제학 통계에 기반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역사인식과의 일종의 '조화와 균형'을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시기였지만 분명 일제에 의해 한반도조선이 자본주의 '근대화'가 되었다는 역사인식이다.

'음식'을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로 재편된 우리의 역사를 다룬 경제학 책이지만, 역사인식은 어딘가 익숙하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균형을 말하지만 '실증주의'를 앞세운 궁극의 '식민지 근대화론'의 재편이다.

이렇게 조선인이 쓴 일본의 경제학 저서 [음식조선]은 '음식'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 '식민지 근대화론'의 재판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푸드 시스템'이 '제국' 내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그 경계에 있는 중국에까지도 퍼져갔던 것이다. 이른바 '식료제국'의 성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비자의 성장'에 대해서는 경제성장이 부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대중소비사회'의 도래를 연상하기 쉬운데, 시작은 경우에 따라 국가의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할 수 있는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비자의 분리'였다. 밀매 단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국가 폭력'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이었을 것이다."
- [음식조선], <나가며. 식료제국과 전후 푸드 시스템>, 임채성, 2019.


3.

[음식조선]이 보편화한 일본 제국주의 '내지' 주도로 재편된 동아시아 '음식경제사'에서 일관되게 주장되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다.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적 '상품화' 과정이다. 
재래식이 아닌 공장식 생산과 '상품화'를 통한 자본주의화다. 즉 쌀이나 술과 담배를 내가 만들어 내가 먹는 것이 아닌,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분리'되는 과정인 것이다. 지금의 '대중소비사회'의 전형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초기 과정은 '자유시장'이 아닌 국가 주도의 경제체제 재편이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일종의 '보호주의'였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초기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정착을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계급의 분리'라고 규정한 것이 생각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구매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시작이라는 역사인식이다.
이는 한편으로 '식민지 수탈론'의 역사인식이기도 하다.

반면, [음식조선]의 결과적 '식민지 근대화론'은 '계급투쟁'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실증'적이고 '수치통계학'적인 '신고전파 경제학'에 기반하고 있어서, '노동'과 '착취'가 아닌 '생산자'와 '소비자'만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매개로 재편된 제국주의 주도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과정을 '자유 시장'으로 포장하지는 못하고 국가권력과 사적 자본의 융합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솔직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보기에도 '자유 시장'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권력 주도의 자본주의화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공통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여담이나, [음식조선]에서 일제 식민지 '본국'과 '내지'라는 표현은 수백 번 나오는데, 1905년의 '을사늑약'은 단 한 번 나온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역사전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계급투쟁'과도 같이,
심지어 '음식'의 '경제사'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

- [음식조선(飲食朝鮮/Inshoku Chosen)](2019), 임채성, 임경택 옮김, <돌베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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