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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안'없는 냉정한 '현실', '자본주의 리얼리즘'
-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2008.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1. 자본주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마크 피셔, 2008.
1.
'90년대 초반,
한때 '신세대'였던 나는 젊은이답게 새로운 유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학 신입생이 되어 가난하고 위축되어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불량하게 담배를 꼬나물거나 최신유행 랩송을 외워서 불러제꼈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겐 어울리지 않았을 게다.
사실 앞뒤 꽉막히고 외골수에 가까웠던 난 유행의 흐름을 타느니 복고를 동경했는데, 그 대상이 '80년대였다.
실제로 '80년대 청춘이었다면 반체제를 외칠 결기도 없었을 나는, 이미 철지난 유행을 탔는데, 그 흐름이란 사회과학적으로는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문학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적어도 '90년대 초반의 젊은 내겐,
'80년대 그때 그 시절처럼,
"다른 세상은 가능했고",
'대안'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
보통 '자본주의'의 '대안'이란,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사회주의'다.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 앞에 내가 동경했던 수많은 '80년대 학번 형님들이 좌절하고 뜻을 접었지만, 나는 그래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진정한 '평등세상'을 바라며 나름대로 책을 읽으며 자습을 했고 대안세상을 그려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끄적였다.
젊은 내가 습작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 공산국가들의 체제 선전 홍보물이 아니었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현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내 주변의 인물군상과 사건들을 통해 '사실(realism)'적으로 묘사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대안세계'를 암시하는 '리얼리즘(realism)' 소설이고자 했다.
결국, 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가 되는 것에 실패했다. 실력이 부족했고 나 자신 체제에 철저히 포섭되었으며 더욱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안체제'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불평등이 극심화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 녹색 쟁점들은 이미 논쟁적인 지대며 이미 '정치화'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다. 이제부터 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있는 두 개의 상이한 아포리아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정신건강'이라는 쟁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현상은 '관료주의'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관료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가 변했으며, 이 새롭고 탈중심화된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했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3. 자본주의와 실재>, 마크 피셔, 2008.
영국의 저술가이자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Mark Fisher : 1968~2017)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블로그 글쓰기로 유명하다는데, 글쓰는 영화인인 나의 조카의 소개로 읽어보게 되었다.
마크 피셔의 첫 단행본 저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시기에 나온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으로 2018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패러디를 넘어 한층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이 책의 역자는 말한다.
끝없는 '시차적 관점'으로 테제와 반테제가 교차하는 일은 없다는 현대식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파한 동유럽 마르크스주의자 슬라보예 지젝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를 전개했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상에 기반하여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은 없다'는 것이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제임슨과 지젝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현실주의(리얼리즘)'다.
그렇다고 '역사의 종언'을 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자본주의 승리파가 아니라, 사회비판 헐리우드 영화의 배경처럼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음울하다. 아마도 영화 문외한인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들을 인용하는 바람에 저자의 주장이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이 다소 있기에 음울한 영화배경이 더 겹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피셔의 반체제적 영감의 소재 중 하나가 영화인 듯도 하다. 또한 지금이십대 초반의 영화인인 내 조카가 극찬한 이유이기도 할게다.
이 책의 제목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고 부제는 "대안은 없는가?(Is There No Alternative?)"인만큼,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대안체제'는 대놓고 없다.
그는 기존 좌파가 소비에트식 옛 노래를 흥얼거리는 통에 헷갈려 왔지만, '사회주의' 같은 다른 세상이나 대안체제를 주장하기 보다, 우리들 개인에게 오랜 시간 체화되고 내면화된 '욕망'에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어야 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신자유주의'적일 필요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신뢰할 '대안'이 없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앞으로도 정치경제적 무의식을 지배할 것이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9.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 마크 피셔, 2008.
정치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굳건하고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위기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몰락하지는 않는다는 이 책 주장의 근거는 자본가도 아니고 부르주아 정치가도 아닌 바로 우리 다수 대중의 '욕망'인 것이다. 즉, 우리들 다수대중들은 이제 다시 자본주의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외부'로 넘어가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리얼리즘)'가 바로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냉정한 본질이다.
개인의 '욕망'에 집중하다 보니, 기후 위기나 생태 문제 등의 외부 문제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피셔는 자본주의 체제의 두 가지 병리현상에 주목한다.
첫째는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고,
둘째는 체제의 '관료주의' 문제다.
'정신건강'은 체제의 '정신분열'은 개인적 문제가 아닌 체제의 구조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는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구조적으로 양산한다는 것인데, 이미 20세기 후반으로 치닫던 1960~70년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질 들뢰즈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미셸 푸코 등이 분석한 바 있다.
'관료주의'는 본연의 생산적 노동에서 벗어난 비생산적 노동이 주류가 되면서 그 자체가 실적경쟁을 이루는 '시장주의적 스탈린주의'(같은책, <6장>)로 은유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의 이러한 비생산적 관료주의 '노동'은 다수 대중의 정치경제적 투쟁으로 분쇄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
피셔의 결론은 '정신건강'에 시달린다 해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개인적' 문제들을 포함한 구조적 '관료주의' 문제 일체를 '정치화'하여, 새롭게 조직된 '정치행위주체'들에 의해 이들 문제들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거다.
즉, '욕망'으로 뭉친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 또는 전유자로서 다수대중이 다양한 '정치주체화'를 통해 이 자본주의를 통제하자는 제안이며, 이를 위해 '대안체제' 같은 꿈이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새로운 반(反)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 전(前)자본주의적 영토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반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진정한 보편성을 통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해야 한다... '정치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위주체'를 필요로 한다. 1968년 이후 노동계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두드러지는 사안인 관료제의 대규모 축소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노동 및 누가 노동을 통제할지를 둘러싼 투쟁이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구축될 때만 그럴 수 있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9.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 마크 피셔, 2008.
이 새로운 '정치주체'는 기존 노동조합일 수도 있고 새로운 조직일 수도 있다며, 마크 피셔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그의 결론 또한 '파시즘'을 만든 원인으로서 '대중심리'가 결국 그 '파시즘'에게 파산을 선고한다는 빌헬름 라이히처럼, 자본주의 체제 내 '정신분열'의 '혁명성'에 주목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처럼, '다수대중'의 권력화와 전략적 리더십을 주장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처럼,
'노동'에 기반한 '민주주의', 즉
'노동민주주의'로 수렴된다.
3.
한 때,
'90년대 '신세대'였던 내가 어느덧,
'쉰세대'가 되었지만,
사실 나는,
1993년 스무살 때도 이미,
'신세대'가 아니라 '쉰세대' 같다는 말을 들었다.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되어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안'적 전망이 사라진 자리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굳건히 들어선다 해도,
'노동'하는 '다수대중'의 '민주주의',
'노동민주주의'는 여전한 이 체제의 '대안'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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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2008), Mark Fisher,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2.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3.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4.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 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6.
5.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6.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