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의 모험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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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는 과연 '은퇴'할 수 있었을까
- [헤라클레스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1947.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1901~1909.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가.
내 어릴적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게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지만, 실은 엄밀히 말해 코넌 도일은 '단편'이라기 보다는 '중편'에 가까웠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복잡한 플롯과 대반전이 특징이라, '단편'으로 담기엔 물리적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영국의 코넌 도일(1859~1930)과 비슷한 시기 역시 영국 추리소설 작가였던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시리즈야말로 진짜 '단편'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단편' 추리소설이라 함은 비단 분량만으로 따지는 게 아니다. 추리소설 특유의 '반전'적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주인공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한 사람이 단 한 가지 단서로 인해 범인임이 갑자기 밝혀진다거나, 피해자로 간주되던 주요 등장인물이 알고보니 몇 가지 단서로 인해 그를 살해하고 범인이 변장한 것으로 급반전되는 내용 등이다. 
'단편' 추리소설에게는 짧은 분량 만큼이나 시간이 없다. 복잡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급반전'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와 가장 가깝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을 범인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게 들어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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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이미 작금과 같은 AI 로봇 문명을 대부분 예측했던 시대적 천재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도 [흑거미 클럽](1972~1973)이라는 '단편' 추리소설을 썼는데, 그의 '단편'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계속 읽어대는 통에 다른 분야로는 가지 못한 채, 나의 중학교 시절 '장편'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로까지 거슬러 역주행하게 되었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성을 찾아보기 위해 크리스티의 '분신' 같은 독거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보았고, 내처 크리스티의 '연인'과 같은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까지 읽었다.


"어젯밤 (고전학자) 버턴 박사는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자네 일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아닐세.'
하지만 그건 늙다리 친구(버턴 박사)가 잘못 생각한 거야.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란 말은, '현대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고 고쳐 말했어야 했어. 이 얼마나 재미있고 기발한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열두 사건'만 맡아 해결하고 난 뒤에 '은퇴'해야겠어. 그리고 그 '열두 사건'을 고대 헤라클레스가 겪은 '열두 개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과 특별히 관계있는 것으로 골라야지. 그래, 그건 정말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인 고상함도 맛볼 수 있겠는데 그래.
포와로는 고전 사전을 집어들고서 다시 고대신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 첫 번째 모험은 '네메아의 사자'사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진짜 살아있는 사자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 [헤라클레스의 모험], <머리말>, 애거서 크리스티, 1947.


'세계 최고의 두뇌'이자 '회색 뇌세포'를 자랑하는 포와로의 적지 않은 활약상을 읽었지만, 그의 이름(세례명) '에르퀼(에르큘)'이 '헤라클레스(허큘리스;Hercules)'의 불어식 발음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학시절 보았던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포와로'가 등장하는 작품을 검색하다가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을 주문하고 읽던 중 비로소 인식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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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모험]은 고대 그리스 신화 최강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자식들을 살해한 광란 후 회개를 위해 티린스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간 섬기는 형벌을 받던 중 수행한 '12가지 과업(The Labours)'과 비유될 수 있는 포와로의 12가지 사건들을 '단편'으로 엮은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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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인 <머리말>에서 포와로는 친구인 고전학자 버턴 박사로부터 이름(세례명)이 왜 '이교도'인 '헤라클레스(에르퀼)'냐며 비웃음을 받고는, 이 참에 오래전 고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위대한 '12가지 과업'을 완수하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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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The Labours of Hercules)'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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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메아의 사자 퇴치
2. 래르네의 히드라 퇴치
3. 아르카디아의 사슴 생포
4.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생포
5.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청소
6. 스팀팔로스의 새들 퇴치
7. 크레타 섬의 황소 생포
8. 티오메네스 왕 소유의 식인 암말 생포
9.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 탈취
10. 괴물 게리온 소유의 소 생포
11.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 수확
12.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 생포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반신반인으로 힘은 세계 최강이지만 지성은 세계 최하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의 헤라클레스'인 '에르퀼 포와로'는 완력이 아닌 오로지 지능으로 승부한다. 물론, '12가지 과업'에 비견되는 사건을 찾다보니 억지도 있다. 잘라도 다시 돋아나는 수많은 머리의 '히드라'를 일파만파 퍼지는 무성한 '소문'에 비유하고 이를 잠재우는 두번째 이야기는 그럴 듯 하지만, 강아지 유괴범을 잡는 과정에서 이용된 영리한 강아지를 '네메아의 사자'에 비유한 첫번째 이야기와 다른 몇 편은 억지스럽게 끼워맞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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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는 60편 이상의 '장편'과 20여 편의 '단편'을 썼다는데, 포와로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12편은 그녀의 몇 안되는 대표적 '단편'들에 해당되겠다. '장편' 소설 위주였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또한 위에서 언급한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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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에르퀼 포와로'는 이 '12가지 과업'을 수행한 후 그의 선언처럼 '은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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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발표 시점과 이야기 속 시대적 배경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사립탐정 역할을 본격 시작했던 포와로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추정되는데, 포와로가 죽게 되는 [커튼](1975)에서도 희대의 살인마를 직접 처치한 것을 보면, [헤라클레스의 모험]인 '12가지 과업' 이후에도 그가 '은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놀기 좋아하는 젊은 아내, 남자 친구와의 바람기...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들의 눈을 못 뜨게 하는 재였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나는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보았소. 헤이젤딘 집안의 재산 상태를 조사해 본 거요. '돈'이란 십중팔구 범죄의 '동기'가 되니까..."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지하철 괴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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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주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그의 수많은 경쟁자들 중 유일한 '여성' 라이벌 작가로 등장했다는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1865~1947)의 이름없는 '구석의 노인' 시리즈 또한 당대의 대표적 '단편'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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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 폴리 버튼이 자주 가는 식당 ABC숍에 늘 나타나 그녀에게 최근의 미스터리 사건들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나름의 추리를 통해 범인을 지목하고는 사라지는 '구석의 노인(The Old Man in the Corner)'은 이름도,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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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매거진을 통해 '셜록 홈즈'와 동시대에 '단편' 추리소설의 전장에서 경쟁했던 무명의 '구석의 노인' 연작은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가 매거진에 게재한 역시 매우 단순한 반전으로 구성된 '단편'들을 모아 1901년의 '제1단편집'과 1909년의 '제2단편집'으로 묶였다. 
마을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서가에서 대출한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 중 몇 편을 우리말로 엮은 책이었다.


"팔레트 씨의 증언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그로 인해 지금까지 다이크 노인의 살해 사건을 덮고 있던 수수께끼의 비밀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 같았소. 즉 그의 증언이 이 사건에 '동기'를 제공해준 것이오. '돈'이라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강력한 '동기'를."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슨 그로브의 수수께끼>,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1단편집',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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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근본적 '동기'는 '돈'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수차례 강조하고, 역시 처음에 용의자로 '억울'하게 지명되어 검시 법정에 세워졌으나 알리바이가 밝혀져 풀려난 인물들에 대해 '구석의 노인'은 해당 알리바이가 마술처럼 가능토록 했던 '공범'이나 헛점 등을 추리하고 밝혀내면서 ABC숍 식당 안 맞은편에 앉은 여기자 폴리에게 답을 건네고는 사라지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건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범인이 지나치게 얼빠지고 서툴게 보이며, 증거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을 때일수록 경찰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거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젠트 파크의 살인>,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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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하든 손으로는 항상 종이접기를 하듯, '구석의 노인'은 추리과정에 대한 썰을 여기자 폴리에게 끊임없이 주절거리면서 손으로는 끈으로 복잡한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안락의자 탐정' 같아 보여도 그는 살인사건 피살자를 둘러싼 검시 법정의 맨앞자리에 꼭 참석하고 용의자들의 사진을 찍으며 관련자들의 공방을 주의깊게 시청하고 정리하며 추리하는 활약을 전개한다. 
정체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는 탐정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듯 해도 결국 '단순'한 요점을 놓치기 일쑤인 경찰 당국을 비웃어대며 그럴듯하게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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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대로, 피해자와 가까울수록, 행동이 어설플수록, 가장 범인에 그럴듯하지 않을수록, 반대로 처음부터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가 풀려날수록 경찰들처럼 단순한 '반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구석의 노인'은 독자들의 대표자인 여기자 폴리에게 경고한다.


"처음 만났을 때(<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1901) 당신(구석의 노인)이 하신 말씀,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이 사건은 분명히 수수께끼예요. 파시 거리(Percy St.)의 이 괴사건은, 당신은 경찰과 마찬가지로 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는 거예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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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무능한 경찰이 보지 못하는 '반전'의 비밀을 밝히는 이 '구석의 노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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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1909)에서는 살인 현장에서 창문을 임시로 묶어둔 복잡한 '매듭'을 통해 이 '탐정'인 채 하는 '구석의 노인'이 정작 살인자 본인이 아닐까 하는 여운을 남기며 ABC숍에서 그 노인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데, 나름의 추리과정을 일방적으로 여기자 폴리에게 읊어대는 이전의 대부분 사건의 진범 또한 이 '구석의 노인'이 아닐까 독자들이 추정을 하게끔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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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공언하며 거만하게 추리를 해대던 정체불명의 '구석의 노인'은 본인이 '범죄자'일 수 있다는 의혹과 함께 '은퇴'하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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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구석의 노인'이 이 모든 사건의 진범이자 배후 조종자 또는 공작자라면, 
그는 엄청난 '희대의 살인마'라 할 수 있겠다.

에르퀼 포와로가 '12가지 과업'인 [헤라클레스의 모험](1947)을 마친 후에도 결국 '은퇴'를 하지 못하고, 그의 진정 '마지막' 활약인 [커튼](1975)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이 '마지막' 사건을 풀고 나서야 '은퇴'하는 이유 또한 포와로가 오랜 시절 쫓던 희대의 살인마 '스티븐 노튼'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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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의 진정한 '은퇴'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마친 후가 아니라,
'희대의 살인마'를 영원히 '은퇴'시킴과 동시에,
포와로 본인 삶의 '커튼'을 내리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아주 '단순'한 급반전을 무기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단편'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두 인물을 만났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영원한 '연인' 에르퀼(헤라클레스) 포와로 탐정과,
에무스카 오르치의 연작과도 같은 '단편' 사건들 속 어쩌면 진범으로 추정되는 '구석의 노인'.

이 둘이 '단편'의 단순한 반전을 넘어 '장편'의 무대에서 만났다면 과연 누가 먼저 '은퇴'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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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궁금해진다.

***

1.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 Agatha Christie, 황해선 옮김, <해문출판사>, 1990~2009.
2. [구석의 노인 사건집((The Case Book of the Old Man in the Corner)](1901~1909), Emmuska Baroness Orczy, 이정태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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