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뇌세포'의 '처음'과 '마지막'
- [코끼리는 기억한다] / [커튼]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1920~1975.
"맞는 말이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과거의 어느 곳으로부터 보금자리로 돌아올 가능성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갖고 있다.'"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1부 9장. 코끼리 조사의 결과>, 애거서 크리스티, 1972.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스럽고 공포에 싸인 분위기를 추적하던 중, 잠시 나의 장편소설 읽기 원천이었던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의 분신과 같은 '여성' 탐정 '미스 마플(Ms. Marple)' 할머니의 '마지막' 활약까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미스 마플의 첫 번째 등장은 1930년 발표된 [목사관 살인사건]이었다. 마플 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활동했는데, '여성' 작가의 '여성' 주인공 탐정이라 해서 별 다른 특성은 없고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 같은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등단과 함께 등장했던 주요 명탐정이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였으므로 나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 탐색을 멈추고 명탐정 포와로의 활약을 마저 확인하고 싶어졌다.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작가 자신의 '분신'과 같은 '미스 마플'을 창조했는데, 등단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부터 등장한 에르퀼 포와로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평생 '연인'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으로 유명하고, 그 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 [ABC 살인사건](1936), [테이블 위의 카드](1936), [메소포타미아의 죽음](1936), [나일강의 죽음](1937) 등 약 38편의 걸출한 작품에서 활약한 에르퀼 포와로는 평생 80편 이상의 장/단편 작품을 썼다던 애거서 크리스티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게 된다.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는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제1차 대전 중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한 후로, 1975년 [커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55년을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지냈으니, 현실에서는 두 번 결혼한 크리스티에게 포와로는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던 이야기 속의 '진짜' 남편과도 같다고 하겠다.
동그랗고 큰 대머리에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작은 키(약 163cm)로 묘사되는 포와로는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 후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본격 사립탐정 역할을 하는데, 자칭 세계 최고의 뛰어난 '회색 뇌세포'를 작동시켜 오래된 살인사건을 몇 건 밝혀내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라 자부하고 본인의 '회색 뇌세포'를 자랑한다.
"'글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포와로는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올리버 부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사실 전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코끼리?'
...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코끼리를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코끼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뛰어나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몇몇 있으니까요...'"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장. 코끼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 애거서 크리스티, 1972.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라는 작품이다.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함께 등장한 추리소설 작가 올리버 부인이 가져온 14년 전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이미 노신사가 되었을 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이 오래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만나 오랜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을 도우면서 진위가 불분명한 몇 가지 단서들(쌍둥이, 가발, 개, 가정교사 등)을 추적하며 의문에 싸였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에게 다가갔다.
'이젠 런던으로 돌아가야죠. 비극적인 사건과 애정에 얽힌 문제는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가야겠죠.'
'코끼리는 기억할 수 있어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에요. 자비롭게도 우리 인간은 잊어버릴 수가 있죠.'"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부 20장. 사문회>, 애거서 크리스티, 1972.
이 작품에 '코끼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능이 높고 기억력이 좋다는 '코끼리'를 오래전 관련자들에 은유하며, 그들의 '기억'이 '코끼리'의 '기억력'처럼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진실을 가리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사한다는 뜻이다.
오래전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보통은 과거의 죄를 덮기 위해 현재의 새로운 살인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살인자들이 이미 죽음으로 마무리된 사건으로 그 '긴 그림자'의 폐해가 그리 짙지는 않다.
그러므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래븐스크로프트 부부의 딸 실리아의 앞날에 포와로와 올리버 부인 콤비는 '코끼리'와 다르게 '망각'에 익숙한 '인간'의 장점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격려해주고 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에서 에르퀼 포와로는 노신사가 되었지만 아직 팔팔하게 '마지막' 활약을 한다. 반면, 그의 진짜 '마지막' 작품에서 포와로는 거의 삶의 끝자락에서(나중에 이 또한 연기로 판명나게 되지만)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데, 그 장소는 바로 포와로가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스타일즈(Styles)' 저택으로 선택된다.
"'이곳의 분위기 말이에요. (헤이스팅스) 선생님은 그런 걸 느끼지 못하세요? 저는 느껴요. 어쩐지 '사악한' 분위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세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방금 말한 게 사실일까?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죽음. 살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죽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장소에 강한 인상이 남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심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스타일즈 저택'은 그렇게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흔적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 이 벽들, 이 정원 안에서 살인의 음모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는 결정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맺게 되었었지. 그것이 아직도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단 말인가?"
- [커튼], <제7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영국 런던 대공습이 한창일 때 대부분 영국인들이 그랬듯,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또한 내일 자신이 과연 살아 있을지를 오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담은 작품을 써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영원한 '연인' 포와로와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서였겠다. 그 작품이 바로 [커튼]으로, 포와로의 죽음으로 머무리되는 이야기다.
제2차 대전 후 살아남은 애거서 크리스티는 [커튼]을 미발표작으로 유보하다가 작가의 만년인 1975년에 발표하면서 작가 본인보다 먼저 보내준다. 크리스티가 영원토록 사랑했던 '연인' 포와로는 1975년에 먼저 죽고 작가 자신의 '분신' 미스 마플은 그녀의 사후인 1976년에도 여전히 살아서 활약한다.
그 작품이 바로 [잠자는 살인](1976)이다.
물론, 주인공 탐정의 '마지막' 활약 시점과 작품의 '마지막' 발표 시점의 차이는 있다.
즉,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은 [복수의 여신](1971)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발표작은 [잠자는 살인](1976)이고,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이지만 이 작품은 1940년대에 이미 창작되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실제 그의 '마지막' 활약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상정하고 오래 전에 써두었던 [커튼]을 한참 후에 발표한 것이니, 포와로의 실제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인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포와로 작품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로 보면 되겠다.
그러므로 첫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 처음 등장한 망명객 포와로의 연령대가 5~60대라고 치면 [커튼](1975)의 발표 연도를 고려하면 포와로는 100살이 넘겠지만, 실제로 [커튼]이 1940년대에 씌어졌다니 80대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는 그 배경이 발표된 시기가 아니라 대략 제2차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생각해야겠다.
[커튼](1975)에서 포와로는 명백히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첫 등장했던 '스타일즈 저택'에서 극악한 '살인자 X'를 본인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는 마치 '자연사'와 같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은 헤이스팅스, 나의 '마지막' 사건이 될 걸세. 또한, 가장 흥미있는 사건이지. 가장 관심있는 범죄가 될 거야. 우리가 다루고 있는 'X'는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녀석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네. 그만큼이나, 이 친구야, 이 'X'는 나를 패배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이 에르큘 포와로를 말이야! 그는 내가 전혀 해답을 찾아낼 수 없는 공격법을 개발했다네.'
'당신이 건강했다면...'
...
에르큘 포와로는 바로 화를 냈다.
...
'... 나의 사지가 못 쓰게 되었고 심장도 나를 농락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두뇌'만은, 헤이스팅스, 나의 '두뇌'는 고장 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그 기능을 다 발휘하고 있단 말이야. 아직도 최고로 우수하다고, 나의 '두뇌'는 말일세.'"
- [커튼], <제15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커튼]의 살인자 'X'는 본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교묘하게 사주하여 수많은 살인을 해 온 자로, 에르퀼 포와로가 오랫 동안 추적해 왔고 결국 '사악한' 기운이 유령처럼 감도는 불길한 '스타일즈 저택'으로 살인자 'X'를 유인히여 결단낸 후 포와로 스스로도 죽는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평생 '살인'을 증오하고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겨온 포와로가 희대의 살인마와의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되 법의 처벌이 아닌 사적이고 인간적인 응징을 하면서 이젠 늙어버린 자신의 육신 속 아직 건재한 '회색 뇌세포'를 정지시키고 마는 [커튼](1975)은 확실한 포와로 '마지막' 작품이다.
이렇게 오래 전 애거서 크리스티와 그녀의 연인 에르퀼 포와로의 '처음'과 '마지막'을 새삼 읽었으나, 이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여왕과 그녀의 평생 연인 '세계 최고'의 '회색 뇌세포' 두뇌, 에르퀼 포와로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가 없다.
그가 활약한 소설 중 내가 안 읽은 작품 몇 권을,
역시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주문한다.
지금 바로 읽을지, 또 언제 읽어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
1.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 Agatha Christie, 권순홍 옮김, <해문출판사>, 1988~2010.
2. [커튼(Curtain)](1975),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9.
3.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1920),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8.